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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8화 (8/125)

8화

“들어가십시오.”

다그닥 다그닥.

마차는 나를 공작 저 대문이 보이는 숲길의 끝에 내려다 주고서 떠났다. 혹시나 들킬 것을 염려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으나 다행히도 무사히 빠져나갔다. 샛길을 아는 솜씨 좋은 마부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백 걸음쯤 걸어 문에 다가가자, 나를 발견한 문지기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아닛. 공녀님?!”

“어서 주인님들께 알려!”

한 명은 보고를 하기 위해 안으로 급히 뛰어들어 가고, 두 명은 내게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이끌어주었다.

공작 저는 당연하게도 어마아마하게 컸다.

크고 화려한 건물 앞으로는 전문 정원사에 의해 잘 가꾸어진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가 방금 지내다 왔던 대공의 시골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물론 그곳이 공식적인 대공 저는 아니겠지만.

내가 저택 건물에 다다랐을 즈음,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아이고! 에일린.”

“에일린 괜찮느냐?”

납치되었던 딸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코웻 공작 부부는 한걸음에 달려온 듯했다. 나를 보자 사지는 멀쩡한지 정신은 멀쩡한지,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당신의 딸은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까지 통통하게 올랐어요….

내가 보기에도 요양을 다녀온 것같이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전 괜찮아요.”

원래는 안심시키려고 해야 할 말인데 문자 그대로인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만난 공작 부부였다. 이 두 사람을 보자 이곳이 소설 속이고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낯선 이들을 갑자기 내 부모님으로 대우해드려야 하는 건 아주 어색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원래도 부모님과 사근사근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해오던 대로만 하면 되겠지.

와락.

그러나 내 예상은 살짝 빗나간 느낌이었다. 그들은 도도한 에일린 코웻과는 전혀 다른 성정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공작 부부는 나를 안은 채로 눈물지으며 기도를 올렸다. 에일린은 따스하고 사랑이 많은 부모님을 가졌구나.

공작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졌음에도 보이는 품위나 주변 시선보다는 자식의 안위가 먼저라는 건, 이들이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였다.

이왕이면 따뜻한 편이 내게도 훨씬 좋은 일이지.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치르고 나자, 공작 부부와 나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에일린의 평판은 꽤 좋은 편이었는지 만나는 사용인마다 나를 반겨주었다. “공녀님!”이라고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거나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유모라는 분은 아예 나를 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우리 공녀님. 이 늙은이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이제 괜찮아요.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맞습니다, 맞아요. 하늘이 도왔네. 감사합니다.”

나는 유모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그렇게 한바탕 환영식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에일린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잠시 쉬고 계세요 공녀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부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나를 돌봐주는 하녀 클레어가 인사를 하고 떠나자 드디어 홀로 남겨졌다.

“하아…….”

나는 뭔가 진이 빠지는 기분에 침대 끝에 털썩 앉았다.

방은 공녀가 납치되어 있을 때에도 날마다 청소했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차분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분위기는 에일린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벽지도 소파도 창틀도 자연을 닮은 다양한 채도의 초록색이었는데, 그건 그녀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았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우아하게 장식된 화장대를 발견했다.

거울이구나.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 앞에 놓인 쿠션이 빵빵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커다란 거울에 비친 에일린 코웻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은 대공을 보며 황홀경 속에 지내느라 바빴으니, 이제야 나를 돌아볼 여유를 챙기는 것이다.

마주한 거울 속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서양풍 로맨스 판타지 세계에는 주연이나 조연이 하나같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인물들이 훤했다. 그중에서도 에일린의 분홍빛 머리칼과 투명한 피부는 거짓말 안 하고 꼭 요정 같았다.

TV 속 연예인을 보면서 하루만 저런 얼굴로 살아봤으면 싶었었는데, 이런 미녀가 되고 보니 썩 괜찮다?

미인이 된 나를 보자 대공과 헤어져서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얼굴을 보니까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일 황제는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에일린 코웻을 버린 걸까?

나는 서둘러 원작을 떠올려보았다. 이후의 이야기의 진행은 이랬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히 집으로 돌아간 에일린은 그날부로 공작 저에서 두문불출한다.

그러자 저잣거리와 사교계에는 그녀에 관한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공녀가 외부 남자에게 잡혀가 일을 당했고 그 수치심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큰 상관이 없었다.

황제는 그런 오명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에일린을 내친 것이다. 이 ‘기다렸다는 듯이’가 중요한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이 황제를 얼마나 많이 욕했는지 모른다.

나쁜 놈! 치사한 놈!

갱생하기 전에 황제가 얼마나 뭐 같았는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었지만 그래 봤자 그는 남자주인공이었다.

작가와 세계관의 사랑을 받는 자. 어차피 남주는 잘 되게 되어 있어. 일명 어남잘.

이래서 후회남 키워드를 선호하지 않는 나지만, 이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를 보게 된 건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 날 마침 웹소설 하나를 완결까지 끝내고 훌훌 털어버린 나는 다음으로 뭘 볼까 고민하며 플랫폼을 뒤지고 있었다. 어떤 것이 재밌을까나 휙휙 넘기는 중에 우연히 어떤 표지가 눈에 띄어 클릭을 했다. 제목은 읽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이 레이몬드 루슬릿 대공이 그려진 표지였다.

대공의 그림을 보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와, 이 사람. 진짜 내 타입인데?!

나는 그렇게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2D 인물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이 있었기에 대공이 있는 것이니, 나는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최애를 영접할 수 있었기에 빙의했다는 사실 또한 큰 거부감이 없었다.

다만 이제는 내가 에일린 코웻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내 머릿속만 혼란스러울 테니까.

“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리고는 거울 속의 녹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중요한 다짐을 앞둘 때마다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나는 에일릿 코웻이다. 에일린 코웻.

코웻 공작 가의 무남독녀로, 지금 신분은 황제의 공식적인 약혼녀다.

그것은 곧 깨어질 약혼이기에 앞으로 나는 전적으로 루슬로 대공을 도울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결심하며 움켜쥔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작가가 시작과 끝을 정하는 소설 세계에서,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기로 다짐했다.

똑똑똑.

“아가씨. 점심시간이에요.”

“네. 나가요.”

그리고 그 첫발을 내디딜 시간이었다.

“오늘 식사는 공작님과 마님이 함께 하실 거라 제1 다이닝룸으로 가실게요.”

“다 함께 식사하는군요.”

“네. 아시다시피 원래는 굉장히 바쁘시지만 아가씨를 위해 시간을 내신 거지요.”

나를 안내해주던 하녀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납치당했던 딸의 안정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낸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선 나는 미리 와 앉아있는 공작 부부를 발견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는 식탁 다리가 부러지도록 아주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헙. 진수성찬이다…!

식탁 위에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들로 꽉 차 있었다. 잃어버렸던 소중한 자식이 되돌아왔으니 그간의 고생을 영양으로 채워주고픈 부모의 마음이겠지.

이렇게 가는 곳마다 맛있는 것투성이라니. 내가 소설 속에 빙의한 게 어쩌면 먹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일린. 물 먼저 마셔.”

“음식을 입안에 넣고 꼭꼭 씹어 먹으렴.”

내가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자, 부모님은 다정하게도 나를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장성한 딸에게 항상 이랬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도 납치되었던 것이 가슴에 사무쳐 일시적으로 나오는 과한 행동이겠거니 싶었다.

나는 수프를 떠먹으면서 공작과 공작부인을 차례대로 보았다.

에일린은 분홍색 머리칼은 아빠, 녹안은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빠가 잘생겼냐. 나쁘진 않은 정도다. 그럼 엄마는? 엄마가 상당히 잘생긴 얼굴에 속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에일린은 조합이 아주 훌륭했다.

역시 조화가 중요해!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부모님은 서로 자기를 닮아서 예쁘다며 앞다투어 자랑했다.

“오늘도 분홍빛 머리칼이 아주 아름답구나.”

“날 닮은 녹안은 얼마나 근사하게요. 호호호.”

부모님은 일부러 일상 이야기를 나누려고 애썼다.

범죄 피해자들은 범죄의 현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걸 잘 아는지 납치에 관해서는 일절 묻는 법이 없었다.

근 일주일간 잃어버린 딸을 찾아 헤매었으니 그 일이 궁금하기도 할 텐데도, 입에 묵직한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니 존경심이 우러나올 정도였다.

공작 부부가 이토록 성품이 좋았구나.

소설에서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에일린. 네 사촌 제니퍼를 기억하니? 일 년 전에 결혼을 한 아이 말이야. 이번에 임신을 했다는 구나.”

“어머. 기쁜 일이네요. 축하해줘야겠어요.”

“그래. 네 편지를 받는다면 기뻐할 거야.”

다행히도 원래의 에일린을 연기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과묵한 데다 동작이 크지 않고 얌전했다. 내가 어색함을 느끼며 조심하는 행동이 그와 흡사한 분위기를 만드는 듯했다.

가끔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납치를 당하다가 온 터라 그 정도의 작은 변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공작 저로 온 첫날.

적당히 적응을 잘 마친 나는, 그러나 그다음 날부터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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