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는 그렇게 밤을 거의 꼴딱 새다시피 하고서 일어났다.
믿기 싫었지만 아침이었다. 이곳을 떠나야 하는 아침.
세상에 태어나 이날처럼 저주스러운 태양도 없었을 것이다.
챙기느라 분주한 사용인들 사이에서 나 또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몸 하나만 달랑 들려 잡혀 왔으니 짐이랄 것도 없었지만, 입고 온 드레스를 다시 착용하고서 아무런 무늬도 없는 마차 위에 올랐다.
세상에 이런 포로가 또 있을까.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엉엉 우는 포로.
물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추한 꼴을 보여줄 순 없었으니 속으로만 꾹 삼켰다. 대신에 죄 없는 아랫입술만 깨물고 또 깨물었다.
대공에게 짐이 될 순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돌아가는 게 답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레이몬드 루슬로를 사랑하는 찐 팬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으려니 배웅하는 무리 속으로 대공이 합류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마차의 열린 문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보내는 그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대공의 눈빛도 나처럼 어지간히 쓸쓸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납치를 해놓고도 결국 원하는 바를 속 시원히 이루지 못했으니 씁쓸한 거겠지.
당연히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나를 보내는 게 기뻐 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조심히 가시오. 공녀.”
“안녕히 계세요. 대공님.”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흐흑.
잘 가. 가지마. 겉과 속이 달랐던 그 유행가가 떠오르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진심은 목 안으로 삼켜버렸다.
“꼭 다시 만나요.”라고 작게 되뇌자 마차의 문이 닫혔다. 이랴, 하고 마부가 말을 모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대공의 곁을 떠났다.
***
대공 루슬로의 시골 영지의 저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슬로 대공이 된 레이몬드는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테라스에 서 있었다. 분명 큰 그림을 그리며 굳은 결심으로 에일린 코웻을 데려왔건만 그녀를 납치한 의미는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의미를 조금은 남기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서 코웻 공녀에게 복면을 씌워 강제로 끌고 왔다. 그리고 파렴치한 짓으로 괴로움을 주기 위해 복면을 휙 낚아채었다.
복면을 거두면 두 눈 가득 독기를 품고 있는 여인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입가에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으니까.
“……!”
그 모습은 레이몬드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납치를 당했는데 왜 화가 나 있지 않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당황하여 뇌가 굳어버린 그는 그러나 이번 일로 그려둔 큰 그림을 떠올렸다. 그는 혼란을 뒤로 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강제키스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그만 멈칫했다. 어서 오라며 맞이하듯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공녀의 붉은 입술을 발견한 것이다.
“……!”
레이몬드는 또 한 번 혼란을 느꼈다.
‘내가 키스를 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째서 원하는 것 같지?’
그는 동공이 떨리다가 그만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침대가 흔들리더니 몸이 기울어 입술이 공녀의 볼에 닿고 말았다.
그 순간 청량한 향기가 콧속으로 훅 끼쳐왔다. 그와 동시에 멈추어있던 기차가 달리기를 시작하듯이, 심장이 북처럼 쿵쾅대기 시작했다.
‘뭐지, 이 느낌은….’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야릇한,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몸이 고장 난 듯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 이상 휩쓸렸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잽싸게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같이 식사하자며 붙드는 공녀에 의해 저지당했다.
올곧은 코웻 공녀의 성품상 포로로 잡혀 와 식사도 한 끼 제대로 먹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기에 레이몬드는 잠시 고민해보다가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공녀의 알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버섯을 우스꽝스럽게 먹는 것도 모자라 먹던 포크로 찍은 버섯을 자신에게도 먹으라고 권했다. 또한 디저트를 같이 먹자고 하질 않나, 숄을 덮어주는 자신의 팔을 못 가게 꽉 붙들 지를 않나. 자기 전에 곁에 있어 달라는 주문을 들었을 땐, 그 당당함에 하마터면 자장가까지 불러줄 뻔했다.
에일린이 실수로 레이몬드의 손가락 끝을 베었을 때는 어떻고.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레이몬드는 너무 놀랐지만, 그 순간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라 손가락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슴이 따뜻해져 버렸다.
그래서였을까.
“카르고를 조심하세요.”
“카르고 린저? 그는 왜….”
공녀가 카르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었을 때, 레이몬드는 당연하듯 그를 먼저 의심했다. 물론 심복인 멜라스도 카르고를 경계했기에 원래부터 신빙성 있는 의견이긴 했지만, 다짜고짜 그녀의 말을 믿는 자신이 우스웠다.
순전히 그녀의 호소력 있는 눈빛이 레이몬드의 마음을 뒤흔든 것 같았다.
‘멜라스가 알면 섭섭하겠어.’
그는 자신의 오른팔 격인 멜라스를 떠올리며 미안해졌다.
늘 신중을 기하는 성품 때문에 그의 의견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는데, 여인의 말 한마디에 곧장 믿어버리다니.
어쨌든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의견이 같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우선 절반만 믿고 사실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는 일을 도모하기 전에 먼저 에일린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녀의 안전을 우선 확보하고 나서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해서다.
“코웻 공녀에게 내일 오전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전해.”
“예. 대공 전하.”
레이몬드는 부하를 통해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직접 얘기해도 되는데 왜인지 공녀의 눈을 보면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여러 번을 생각해봐도 그게 맞는데…. 왜 보내려는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질까. 왜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있는지 묻고 싶을까.
문득 공녀의 칼에 베였던 손가락 끝을 보았다. 상처는 말끔히 나아있었다.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진 그는 답답함에 밤바람을 쐬려고 운동장으로 나와 보았지만, 머릿속은 공녀에 대한 생각만 더해졌다.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낸 벚나무를 보다가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이 떠올라 옅게 미소했다.
그러다 공녀가 있는 방을 올려다보았다.
바람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달빛에 그녀의 시선이 실린 듯했다. 아름다운 환영이었지만 실제가 아니었기에 쓸쓸해졌다.
나는 어떤 신기루를 좇고 있는가.
어리석은 자신을 깨달은 레이몬드는 망상에 젖은 밤 산책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저택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
공녀를 돌려보내고 난 후 레이몬드는 즉각 일을 시행했다. 서둘러 부하의 배신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카르고를 자신의 방으로 은밀히 불렀다.
“카르고. 이 쪽지를 오늘 밤 10시 튤립나무에서 루크에게 전해줘야 한다.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돼.”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쪽지 안에는 레이몬드가 언제 방문하겠다는 일정이 적혀 있었는데, 실은 가짜로 작성된 쪽지였다.
그걸 까맣게 모르던 카르고는 쪽지를 미리 열어본 후에 황제 쪽에 정보를 넘기려 했고, 미행하던 멜라스 무리는 그가 황제의 사람과 내통하는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카르고는 미리 약속되어있는 대로 딱따구리가 만들어둔 둥지에 쪽지를 둔 채 근처로 이동했다. 달빛이 잘 드는 어느 공터. 카르고는 세 번째로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 바닥을 다섯 번 두드렸다. 그러자 나무에서 한 인영이 내려왔다.
“대공의 일정입니다.”
그가 쪽지를 넘기려고 할 그때였다.
푸스푸스슥.
공터를 둘러싼 수풀에서 대공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즉시 두 사람을 포위했다.
뒤에서 결박당한 카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당황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며 다가오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메……멜라스님.”
“네게 더 이상 그리 불리고 싶지 않다. 카르고. 대공 전하의 은혜도 모르고 간자의 짓을 하다니.”
“오……오해이십니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조사해보면 알겠지.”
멜라스는 생포에 성공한 두 사람을 끌고 가려고 했으나, 미처 대응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헉. 멜라스님. 이 자가 혀를 깨물었습니다.”
“큭. 이런.”
황제의 사람은 그 순간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카르고는 그 모습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황제를 배신하고 살아있느니 죽는 게 낫구나 싶은 탓에.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도 각오하지도 않은 그는 그저 말처럼 끌려갔다.
돌아간 멜라스는 대공에게 즉시 보고를 올렸다.
“대공 전하. 황제의 사람을 붙잡았습니다만, 그가 자결을 했습니다.”
“자결을 했다고?”
“붙잡히자마자 혀를 깨물고 쓰러진 걸로 보아 입안에 미리 독극물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극도로 훈련된 자인가 보군. 역시 황실특임대인가.”
“예. 그런 듯합니다.”
더는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꼬리를 밟은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동안 정보가 새어나가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멜라스는 카르고가 잡히고 나자 한숨을 크게 돌렸다. 카르고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덜미를 붙잡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대공이 자신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음을 감사했다.
“대공 전하. 그나저나 코웻 공녀는 정말로 함구할까요?”
간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자 다음 걱정거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멜라스는 속에 묵혀두었던 얘기를 꺼냈다.
원래 그는 대공이 공녀에게 얼굴을 공개하고 또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썩 염려스러웠다. 입만 뻥긋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길을 대공은 왜 굳이 선택하는 걸까.
“그래.”
그러나 대공은 마치 본인의 마음인 것처럼 단언했다. 그게 이상스럽기도 했지만 여태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니 뭔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나 싶었다.
멜라스는 코웻 공녀를 떠올려보았다.
입이 무겁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사실 이곳에 와서는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에 반신반의했다. 우아한 한 마리의 백조라는 둥, 기품 그 자체라는 둥 하는 평가에는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보다는 비슷한 동물을 굳이 찾자면….
“다람쥐 같아.”
대공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멜라스가 “그래. 다람쥐!”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음? 방금 뭐라고 했나?”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멜라스는 “크흠.”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대공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있는 것 같았지만, 무심코 실내 온도가 좀 높나보다 생각했다.
멜라스가 보기에도 코웻 공녀가 대공을 쪼르르 쫓아다니는 거나 음식을 열심히 먹는 모습은 우아하기보다는 귀여운 것에 가까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공녀가 납치범의 정체에 대해 침묵을 지킨 건 사실화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총명한 멜라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지켜본 바에 의하면 공녀를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