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카르고를 조심하세요.”
“카르고? 카르고 린저? 그는 왜….”
내 입에서 뜬금없는 이름과 내용이 튀어나오자, 대공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차올랐다.
카르고 린저는 루슬로 대공의 부하 중에 하나로, 원래는 대공이 영지를 시찰하다가 불량배들로부터 구해낸 평민이었다. 가난한 그의 빚을 탕감해주고 부하로 두었는데, 지략이 뛰어나 책사처럼 쓰고 있었다.
루슬로 대공의 보좌관이자 오른팔 격인 멜라스는 그를 반대했다. 카르고는 성정이 간사하여 신뢰하기에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우리 마음씨 착한 대공이 우기는 바람에 곁에 두게 되었지만 말이다.
소설을 볼 때도 생각했지만 멜라스는 사람 보는 눈이 매서웠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어야 했다.
자신의 오른팔과 같은 의견을 말한다면 마음을 충분히 흔들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카르고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아시잖아요.”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간결하게 말하는 쪽을 택했다.
“아니. 공녀가 그걸 어떻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대공님.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대사 같은 문장을 구사하며 강조 어택을 날렸다.
카르고가 넘어가는 시기는 살짝 모호하지만, 에일린이 납치되자마자 황제가 작업에 들어간 것 같으니 지금쯤 얘기하면 얼추 맞아떨어질 터였다.
이야기를 들은 대공의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 떨렸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문과 고뇌, 그리고 믿음과 불신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확신에 차 있는 내 눈동자를 보자 흔들리던 눈동자도 마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공녀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소. 충고해줘서 고맙소.”
그는 가까스로 진정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말은 저리해도 대공이 이 얘기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원체 성품이 진중하여 누구의 말이라도 일단은 경청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에일린 코웻 자체가 따지고 보면 황제의 측근이니 정보의 질은 믿을만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기만을 바라야지.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그가 생각하고 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공녀. 잠깐만.”
그때 대공은 떠나려는 내 팔목을 급히 움켜쥐었다.
“네?”
옥죄어 온 그의 손 감금에 순간 몸이 굳었다.
놀란 것도 있었지만 실은 설렘이 훨씬 더 컸다. 최애한테 꿈에도 그리던 길막을 당하다니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쳐대는 것이다.
대공은 팔목을 쥔 채로 그대로 일어섰다. 머리 높이가 한없이 쑥 올라가는 걸 보자 새삼 그와의 키 차이가 느껴졌다. 그의 커다란 손에 쥐어진 에일린의 가느다란 팔목도 두 사람의 골격의 대비를 확인시켜주었다.
“공녀는…. 아니. 되었소.”
대공은 말을 하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입안에 맴도는 것을 내어놓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어려웠는지 그만 포기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직선으로 뚝 떨어지는 팔목을 보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자유가 싫어 싫다고!
나를 놓지 마. 제발 날 꽉 잡아줘!
대공에게 계속 납치당해 있기를 원하는 지금의 내 심정과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했다.
지금 내 심정을 들킨다면 기껏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던져둔 단서는 설득력이 0으로 수렴해갈 테니까.
이 순간만큼은 주접을 들켜선 안 돼. 쉿.
“할 말이 없으시면 가볼게요.”
“그리 하시오.”
나는 아랫입술을 꾹 짓누르며 문 쪽으로 뒤돌아섰다.
어쩐지 한 번 더 붙잡을 것 같았던 대공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나의 사랑, 나의 최애 레이몬드 루슬로 대공은 적성에도 안 맞는 겁박은 벌써 관두시려나 보다. 그는 부하를 통해서 내일 오전에 집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원작소설에서는 루슬로 대공이 에일린을 사흘간 붙잡아 두었다가 나흘째 되는 날 집으로 돌려보낸다. 굶어 죽을까 봐 염려가 된 탓이었다.
나의 경우는 내일 나가면 6일째. 잘 먹은 덕에 이틀이 더 연장되긴 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하나였다.
더 이상 최애를 볼 수 없다는 것.
이 명백한 사실이 내 기분을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저기압으로 만들어놓았다.
집으로 안 갈 수는 없는 걸까.
휴우. 땅을 꺼트릴 듯한 내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빈 찻잔을 앞에 두고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 무슨 근심이 있으시오?”
“있지요. 네. 있고 말고요.”
나는 한숨인지 말소리인지 모를 만큼 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오?”
대공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하소연이 담긴 입을 열려다 말고 멈칫했다. 문득 이 대화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범이 포로에게 근심이 있냐고 묻질 않나, 포로는 계속 납치되어 있고 싶어서 우울해 있지를 않나.
기이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판이었다.
‘저를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가 계속 납치되어 있으려면 뭘 하면 될까요?’
‘영원히 대공께 납치되어 있고 싶어요.’
말을 다듬을수록 어쩐지 점점 고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세 문장을 모두 엎어버리고 전혀 다른 질문을 택해야 했다.
“아니에요. 그것보다 저는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나는 건가요?”
“그렇소. 내 부하가 마차로 공작 저 앞까지 안전하게 모셔줄 거요.”
“하아. 그렇군요.”
나는 또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모습을 쳐다보던 대공은 입안에 모래가 맴돌 듯 불편한 얼굴이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겠군.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하루만 더 참으시오.”
“아니요. 전혀 그런 거 아니에요. 전 여기 있는 게 좋거든요.”
저도 모르게 본심이 술술 나와 버리자 대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좀 더 있어도 전 괜찮다고요. 그러니까 편하게 하시라는 말씀이에요. 하하하.”
나는 얼굴까지 빨개져서는 횡설수설했다.
내 본분과 욕망은 충돌하고 뒤엉켜 여과 없이 입 밖으로 술술 빠져나왔다. 막 수습 불가의 지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을 때 마침 대공이 나서서 막아주었다.
“고맙소. 공녀. 그리고 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차분해진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대공은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빛을 담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어려운 부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돌아가면 납치범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대공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스스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음을 알았나 보다. 상식적으로 납치범을 발설하지 말라는 것은 협박이라도 통하기 힘든 부분이니까.
그래 원래라면 그렇다. 하지만 그의 경우엔 아주 운이 좋았다.
왜냐면 내가 당신의 덕후니까요!
“당연하죠! 대공님은 걱정 꽉 붙들어 매시고 제게 맡겨주세요!”
나는 꽉 쥔 주먹으로 한껏 내민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마치 영업사원이 으쌰으쌰 하듯이 일부러 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공이 나를 돌려보내 놓고 나면 얼마나 가슴앓이를 할까? 내 최애가 노심초사하여 물만 먹어도 체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상상을 하자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자동반사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대공의 눈도 튀어나올 듯이 커졌지만 말이다.
내가 좀 오버했나?
조금은 상식적인 선으로 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비밀은… 지킬게요.”
나는 다시 귀족 아가씨처럼 얌전하게 말했다. 격양되었던 목소리의 톤을 낮추고 삐져나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고맙소.”
그제야 대공의 놀람 가득한 얼굴도 다소 누그러졌다. 어쩐지 한쪽 눈썹이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
루슬로 영지의 한 시골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 밤.
침대에 누운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대신 밤새도록 내 빙의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있어서 대공에게 미리 위험요소를 알려줄 수 있으니까.
내가 레이몬드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낯선 세계로 떨어진 막막함이 이제야 몰려오기 시작한 듯했다.
상상 속에서 수백 번도 더 결혼식을 올린 서방님이 계시기에 푸근했던 내 마음은, 이제 망망대해의 한가운데로 떨어진 사람 같았다.
원작을 그리 많이 읽었으니 모든 것이 내 집 앞마당처럼 익숙하긴 했지만, 이곳을 잘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후우….”
긴 한숨을 내어보아도 들썩이는 감정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창을 열었다. 밤공기를 마시면 속이 뻥 뚫릴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허허벌판 같은 마당에 한 인영이 보였다.
잠시 구름 뒤로 가려졌던 달이 다시금 드러나자, 곧 가시광선의 반사가 이루어졌다. 달빛샤워를 받은 양 반짝거리는 그는 온 우주를 담고 있는 까만 머리칼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한눈에 반할 것 같은 비주얼의 주인공은 그밖에 없었다. 레이몬드 루슬로였다.
“레이몬드.”
나는 대공의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보았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고 입술만을 가만가만히 움직인 모양새였다.
그런데 이 작은 소리가 들린 걸까. 그 순간 대공이 고개를 휙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아잇 깜짝이야.
나는 놀라서 창에 얹은 손을 움찔거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꼭 훔쳐보다가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쪽을 바라보는 대공의 눈빛이 어쩐지 구슬퍼 보였다.
달빛 때문일까. 처연함을 담은 눈동자가 내 가슴을 고요하고도 폭풍같이 훑고 지나갔다.
어쩐지 눈을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창을 조금만 열어둔 터라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괜스레 그랬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곧 대공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모습은 달빛을 등 뒤로 받아내며 저택 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