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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5화 (5/125)

5화

그걸 여태 까먹고 있었다니. 나란 멍청이 같으니…!

“왜 그러시오?”

그렇게 자책을 하고 있으려니 대공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마치 풀숲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에 놀란 토끼 같았다. 귀여워…!

“아니에요. 하하하.”

나는 또 한 번 손사래를 치며 강조해야 했다. 지금 당장 그에게 말해주기엔 살짝 무리가 있었으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자리에 앉아 한 손에 하나씩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는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슥삭슥삭.

이게 왜 이렇게 반항하는 거야?

스테이크가 생각만큼 잘 잘리지 않아 칼을 접시에다 대고 계속해서 비벼대고 있자니 대공이 내게로 다가왔다.

“공녀. 내가 해주겠….”

“아니에요. 앗?”

오기를 부리던 나는 힘을 세게 주다가 그만 칼끝이 미끄러졌다. 그러자 접시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칼은 앞으로 나아가 내게로 뻗쳐온 대공의 손을 그만 베고 말았다. 그 순간 스친 칼날에 대공의 손가락 끝이 갈라졌다.

썰어야 할 고기는 죽어도 안 썰리더니 남의 피부만 갈라놔? 게다가 접시는 왜 부서진 거야?

이 칼이 안 드는 게 아니라 고기가 과하게 질긴 것임을 증명한 대목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꺄악! 어떡해!!”

나는 마치 내가 베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나이프를 집어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대공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눈 가까이에 대어 상처를 확인했다.

종이 끝에 베인 듯 아주 살짝 피부가 열렸을 뿐이었지만, 끝에는 피가 한 방울 맺혀있었다. 그걸 보자 내 가슴이 반으로 갈라져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고통이 전해져왔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고 뭐고 당황해버린 나는 다짜고짜 대공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최애를 다치게 만든 자신을 학대할 틈도 없이, 상처부터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

그 순간 대공의 몸이 뻣뻣해진 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찌릿하니 아픈 걸까?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서 있기만 했다.

“어떡하면 좋아.”

“괘……괜찮소. 이 정도 가지고.”

“안 돼요.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렸다.

최애가 피를 흘리게 하다니,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

이제야 자책 타임이 시작되려는데 그가 손을 빼더니 등 뒤로 숨겼다. 얼굴에 열감이 가득한 걸로 봐서는 따가운 것 같은데 딴엔 강한 척하느라 참고 있는 듯했다.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그……렇다면 알겠소.”

안타까워하는 내 심정이 전해졌는지 대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람을 불렀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들어와서는 약 상자를 두고 나갔다.

나는 상자를 열어 상처에 바를만한 연고 같은 것을 찾아냈다. 뚜껑을 돌려 손가락 끝에 약을 조금 묻히고는 대공에게 말했다.

“손을 좀 줘보세요.”

“여기 있소.”

대공은 다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이 고운 긴 손가락. 그 아름다운 걸작을 보자 가슴이 새싹이 돋듯 간질거려왔다.

드디어 최애의 살결을 영접하는구나.

내 두 손이 덜덜 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값지고 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이내 톡, 하고 닿았다.

찌르르르르. 닿으면 전기가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온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감각에 머리까지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연고를 대공의 손가락 끝에 슬며시 문질렀다. 그가 움찔대는 게 쓰라려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설렘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쓰레기같이 여겨졌다.

‘좋지만 좋지만은 않아. 그런데 솔직히 좋다.’

나는 두 가지 상충하는 심정을 떠안은 채로 가까스로 약을 다 발랐다.

“다 됐어요.”

“고맙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황급히 손을 거두어갔다. 손끝이 그렇게나 쓰라렸을까?

빨개진 그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미안함이 몰려왔다.

대공은 하녀를 시켜서 접시 조각과 잔재물들을 치우게 하고 부드러운 스테이크로 다시 준비해오게 했다. 이번 고기는 입에 딱 맞는 크기로 잘려서 나온 상태였다.

“드시오.”

“네.”

이후 식사 시간은 말없이 음식만 먹다가 끝이 났다.

그는 평소 버릇대로 고개를 숙인 채 먹는 데에만 열중했고, 나는 아까 떠오른 것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던 탓이었다.

눈앞의 최애에게서 정신을 떨어뜨릴 만큼 중요한 그것은, 다름 아닌 대공의 안전에 관한 것이었다.

원작에서 대공은 납치한 에일린을 돌려보내고 나서 얼마 있다가 큰 위기를 맞는다. 황제가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실은 나도 기이하게 여겼던 부분이 있는데, 에일린은 납치범이 레이몬드 루슬로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주위의 열렬한 추궁에도 오로지 “사흘 내내 복면을 쓰고 있어서 모르겠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에일린 또한 그곳에서는 일개의 조연에 불과했기에 서술되지 않은 그녀의 심정은 알 수 없었다. 의혹을 제기하기엔 몇 줄의 서술로 짧게 지나갔으니까. 다만 수많은 댓글들을 훑는 중에, 에일린이 루슬로 대공을 좋아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하나쯤 있었던 것 같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깨 으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대공을 의심한다. 사실 본인이 찔리는 부분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어쩌면 증거 따위는 필요치 않을지도 몰랐다. 자식이 없는 황제에게 제2 황위 계승자인 대공의 존재는 큰 위협이 될 테니까.

오히려 호시탐탐 노리다가 이참에 기회를 잡은 것일 테지.

“그럼 주무시오.”

식당 앞에서 헤어지면서 대공은 인사를 던지고 사라졌다.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빠르게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있어서 서두르는 걸까.

대공은 아주 아주 높은 지위다. 황족과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 중의 귀족으로, 평생을 딩가딩가 놀아도 먹고 사는 것에 지장이 없다. 그런데 우리 레이몬드는 어떻게 저렇게나 부지런한지, 그 점이 멋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는 하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찍이 침대에 누워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하나씩 정리해보았다. 어제는 금세 잠들어버리는 통에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었다.

남자주인공인 카일 황제는 아무리 나쁜 놈이라지만 어쨌든 그는 주인공이다. 선악의 유무를 떠나 세계의 버프를 한 몸에 받는 존재고, 악역은 정확히 그 반대다. 그러니 소설의 전개는 당연하게도 모든 것이 악역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와 엎치락뒤치락하던 대공이 점점 주인공한테 당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빙의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스스로 꼽아보자면 바로 그를 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레이몬드 루슬로를 구하러 이 세계로 온 수호천사인 셈이지.

“이 수호천사가 반드시 구해줄게요!”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달빛이 내리쬐어 그리 어둡지 않은 방안에서 혼자 독백 무대를 펼치고 있는 배우같이 굴었다.

황제의 첫 번째 반격은 이것이었다.

대공의 부하 중 하나인 카르고를 포섭하는 것. 카르고는 돈 몇 푼에 대공에게서 황제로 쉽게 노선을 갈아타 버린다. 의리 없는 놈 같으니.

원작에서 그놈은 황제 측과 내통하며 레이몬드의 스케줄 정보를 넘긴다. 황제 측은 레이몬드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를 주시하다가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홀로 정보상으로 가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암살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레이몬드는 병사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만다.

상처가 목숨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일로 인해 대공의 세력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간자라는 존재의 여파였다.

간자란 그런 것이니까. 그 존재는 한 번 들키고 나면 내부에 불신을 퍼트리는 최고의 무기였다.

세력도 세력인데, 실은 내 의도는 한 가지로 분명했다.

내 최애의 손가락 끝에 난 작은 상처도 싫은데, 무려 부상을 입는다고?

안 돼. 반드시 막아야 해!

그리하여 그 결심대로 다음 날 오전 나는 대공을 찾았다.

“대공님은 어디에 계세요?”

“현재 집무실에 계십니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용인에게 물어보자 들려온 대답은 내 예상대로였다.

식사와 디저트 시간만으로도 대공과 둘이서 보내는 시간은 많았지만 주위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 그와 밀폐된 공간에서 독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혼자 일하는 시간에 맞추어 그를 찾았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지만, 소설에서 보아 그의 스케줄을 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뭐, 포로가 저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하지만.

똑똑똑.

“들어와.”

벌컥.

안에서 허락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손잡이를 돌린 채 힘껏 문을 밀었다. 묵직한 나무문이 벌컥 열리더니 커다란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은 그곳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머…멋있어!

제복을 입은 채 집중하는 남자의 모습이란 섹시 그 자체였다.

저 날렵한 콧대하며 부드럽게 꺾인 턱선, 집중하느라 살짝 구겨진 미간과 매 시각 꿈틀대고 있는 손의 힘줄이라니…

저런 멋짐이라면 온종일 보고 있어도 도통 질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코피가 퐝 터질 것 같은 광경에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있을 때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코웻 공녀?”

“대…대공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를 바라보는 대공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연 존재가 나라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결의에 찬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대공은 펜을 움직이던 손을 즉각 멈추고 “그러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서는 내게도 앉으라며 손을 내밀었다.

“차를 내오라고 시키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건 각 잡고 설득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차 한 잔의 여유같은 건 집중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조금 뜸을 들이면서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는 이런 걸 해줄 필요가 있다.

“대공님.”

내가 부르자 대공은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좋았으나 지금은 감탄에 젖어들 때가 아니다. 나는 이 시간만큼은 주접을 꾹 삼켰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가 당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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