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날도 이 다음 날도.
대공은 내가 우기는 통에 밥 세 끼에 디저트 시간까지 모두 나와 함께 보냈다.
나는 밥도 잘 먹고 간식도 잘 먹은 덕에 살까지 포동포동하게 올랐다.
에일린이 원체 말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뚱뚱해질 뻔했다. 여기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최애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해놓고 막상 그를 먹이려니까 나도 열심히 먹어야만 했다. 둘 다 얼굴이 반질반질한 것이 누가 납치범이고 누가 포로라고 생각이나 할까.
그나저나 오늘은 병사들의 대대적인 실전훈련이 있는 날이란다.
훈련 장소는 저택 앞마당. 원작에서는 납치 장소에 대해서 끝까지 언급이 없었지만, 아마도 대공 영지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닌가 싶다. 과연 시골이라 그런지 공간이 아주 넓었다.
훈련이야 뭔가를 먹거나 부하들이랑 작당 모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상처럼 계속하는 듯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루슬로 대공이 직접 참석한다고 했다.
“잠시 다녀오겠소.”
아침 식사를 마친 대공은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는 내가 구경하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통에 훈련장이 보이는 장소로 데려다주었다. 저택의 3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테라스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면 훈련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와! 많다.”
내리쬐는 햇살에 손을 들어 얼굴에 차양을 만들었다. 수백의 병사들이 드넓은 공간에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손목은 맨 처음 이후로는 포박하지 않은 상태였다. 병사들이 포진해있는 이 저택에서 연약한 귀족 영애의 몸으로는 위협도 되지 않을 테고 도주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도망은 꿈도 꾸지 않지. 최애와 함께하는 이곳이 지상낙원인데 내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이야?
챙 챙챙 챙.
그때였다. 훈련장에서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중으로 울려 퍼졌다. 서둘러 아래를 보니 어느새 병사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병사들끼리 돌아가면서 일대일로 대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머 어머!”
내 입에서는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분, 나의 레이몬드 루슬로 대공이 보였으니까. 오늘도 요염한 흑발에 푸른 여의주를 지닌 그는 누가 봐도 군계일학이었다.
오늘의 대공은 붉은 제복 대신에 올블랙의 훈련복을 입어 시크한 매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도 간단한 아머를 착용하고 검집을 허리에 차 무장을 하고 있었고.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자 칼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 때문인지 온몸에서는 유독 활기찬 기운이 풍겨 나왔다.
앗. 안 그래도 눈부신데 더 보태지 마.
나는 눈을 찡긋거렸다.
대공은 영롱한 자태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릭 휙.
검을 쥔 손에 핏대가 서고 팔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상대를 경계하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허벅지는 탄탄한 근육으로 뭉쳐있었다.
“아아.”
나는 그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저걸 눈으로만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아깝잖아. 그래. 녹화… 녹화를 해야 하는데…!
하지만 이곳은 빙의한 소설 세계. 당연히 스마트폰도 캠코더도 없었다.
나는 머리채를 붙잡으며 절규했고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이 일을 어째. 저 장면을 찍어서 동영상을 올린다면 세계가 하나 되고 난리 나고, 지구의 함성이 우주로 쏘아 올려져 화성까지 가 닿았을 텐데.
당연히 우리 팬들은 야단법석을 떨 테고 그 아래에는 주접을 떠는 댓글들이 주루루룩 달리겠지.
꺄아아아아악! 코피 퐝 터짐!!!
저 세상 멋짐이다 증말.
잘 생긴데다가 칼도 잘 다루고. 우리 레이몬드는 못 하는 게 뭐야?
못 하는 걸 못 하는 우리 대공님♡
자랑스러움이 솟구쳐 올라와 가슴 속을 따뜻하게 채웠다. 이 현장이 공유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라도 볼 수 있으니 낭비는 아니라는 논리로 정신승리를 이룩했다.
기다란 장검이 공기를 가르고 바람을 갈랐다. 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검은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어깨를 펴고 검을 더 세워.”
“윽.”
“그렇게 움츠리다간 적에게 틈을 내어줄 뿐이다.”
“죄……죄송합니다.”
움직임을 따라가기 버거워하던 부하는 대공에게 혼쭐이 나고 있었다. 그는 검을 내리고는 전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녁은 굶을 줄 알아.”
“옙!”
오와. 우리 대공 카리스마 봐. 멋있다 멋있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나올 뻔했다.
작가가 표현하기로 그의 검술 실력은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혔다. 기술이 빼어난 데다가 힘까지 뒷받침되어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능력이 대단했다.
다만, 대공이라는 신분상 황제의 자리를 언제든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력을 반쯤은 숨긴 채 살아갔다.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수풀에 웅크린 채 때를 기다리는 호랑이처럼.
나는 하나라도 놓칠 세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동자에 카메라를 이식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영혼을 팔면 그를 볼 수가 없으니까 그냥 관두자.
훈련은 순식간에 후딱 지나갔다. 최애의 영상은 밤새도록 감상해도 부족하건만 두 시간 가까이 혹사당한 병사들은 땀으로 범벅된 채 녹초가 되어있었다.
반면 대공은 땀만 조금 흘릴 뿐 아주 멀쩡했다. 축복을 받고 타고난 체질은 체력까지도 좋았다.
그는 부하에게서 건네받은 수건으로 이마를 훔치고 있었다.
아. 좋은 감상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구경하느라 나도 꽤 애썼던 모양이다. 운동을 끝마친 후 느끼는 나른함 같은 종류가 훅 끼쳐왔다.
원래라면 찍어둔 동영상을 돌려보며 캡처라도 해야 하는데… 살짝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차피 나는 아이돌 덕후가 아니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시키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3분쯤 지났을까.
별안간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테라스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자 깊은 여운에 멍하니 있던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레이디 에일린.”
“….”
나는 꿈이라도 꾸는 듯이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대공은 땀에 젖은 훈련복 차림 그대로였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훈련 동안 고르게 쉬던 숨까지 헐떡대고 있었다.
설마 훈련장에서 여기까지 3분 만에 돌파한 건가?
그게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고심해보던 나는, 그 가능성을 대공의 다리에서 찾았다. 저렇게 긴 다리를 가지면 달리기도 빠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대공의 잘 빠진 근육질 다리를 감상하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발견하고서 움찔 놀랐다. 그는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소?”
“네? 뭐가요?”
뭐가 괜찮냐는 거지? 설마 본인의 훈련하는 모습이 괜찮았냐고 묻는 건가.
그렇다면 당연히 괜찮았고 말고요.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질문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쓰러지는 것 같았는데….”
“네? ……아.”
역시 그 얘기가 아니었다. 대공은 훈련이 끝나고서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내가 쓰러진 걸로 착각했나 보다.
나는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대공님. 그냥 급격히 피곤해져서 앉은 거랍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살짝 미심쩍어 보였지만 그럭저럭 믿기로 결심한 표정이었다.
오해를 풀고 나자 그제야 눈앞의 대공이 인식되었다.
가까이서 본 대공은 온몸이 땀에 절어있었다.
그의 땀 냄새.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땀 냄새에는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이 들어있다고.
지금 이 순간 이론은 현실화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상대에게 덤벼들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슬금슬금 다가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우리 최애는 땀 냄새까지도 향기롭구나.
나는 마치 맛있는 간식을 찾는 개처럼 본능적으로 킁킁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훈련이 제법 고단했던 걸까?
멀쩡해 보이던 대공의 얼굴에는 열이 잔뜩 올라있었다. 운동을 하면 혈액이 순환되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법이지.
“괜찮으면 되었소. 씻고 나서 식사를 하지.”
“네.”
나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감상했던 최애를 다시 가까이서 감상할 시간이었다. 야호!
***
식사자리에 온 대공은 샤워를 끝내고 제복 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 맡은 야릇한 냄새가 사라져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제는 그의 체취와 워시 향기가 섞여들었다. 그 냄새가 실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혔고 내 가슴 또한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대공은 훈련으로 인해 허기가 졌는지 식사에만 열중했다.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입에 쏙 넣은 나는 당연히도 시선은 오직 대공에게 꽂은 채였다.
그러다 문득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원작을 수십 번 정독하면서 레이몬드를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솔직히 아무리 나라도 지금 그의 심정은 잘 모르겠다.
원작 소설에서랑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달랐으니까.
원작의 에일린은 철벽을 치며 대공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녀는 같이 식사를 하기는커녕 방으로 가져다주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대공은 결국 나흘째 되는 날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반면에 나는 어떤가.
철벽을 쳐? 우습다. 벽을 허물다 못해 레드카펫을 깔아도 부족하다. 마치 컬링선수처럼 대공이 나에게로 수월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빙판을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있지.
상황이 극과 극의 양상을 띠다 보니 대공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이야기의 큰 줄기가 바뀌진 않겠지?
“입맛에 맞지 않소?”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대공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나는 그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더 열심히 먹었다. 그는 그런 내 모습에 안심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입안에서 방울토마토가 터지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내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대공에게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던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을…!
“아. 맞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