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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3화 (3/125)

3화

“덮으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대공이 준 클래식한 스타일의 숄을 어깨에 두르려고 그것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어찌나 곱게 다림질이 되어있는지 겹쳐진 부분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내가 숄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지켜보던 대공은 숄을 도로 빼앗아 들었다.

어? 도로 가져가는 건가?

“손이 많이 가는 레이디로군.”

그는 단 한 번에 숄을 넓게 펼쳐서는 그대로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자 대공이 나를 살짝 안는 동작이 완성되었다.

어머나! 이게 웬 은혜로운 일이야.

나는 감격에 젖어 들어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어깨를 덮은 숄이 행여나 날아갈세라 얼른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레……레이디 에일린?”

“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일까. 나는 숄과 함께 그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내게 백허그를 오래오래 하고 있어 주길 바라는 본능이, 이성이 눈치채기 전에 먼저 움직인 것이지.

잘했어 나 자신. 최고다 나 자신!

“어머 죄송해요.”

그러나 차마 티를 낼 수는 없기에 마지못해 팔을 빼주었다.

말과는 다르게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에 대공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거렸다.

***

시간은 흐르고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나는 하녀들의 도움으로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목욕재계를 하고 나서는 향기 나는 오일을 몸 전체에 발라주고 기다란 머리칼까지 빗으로 빗겨주었다.

에일린은 일종의 포로인데 이렇게까지 잘해주니 누가 대공을 보고 악역이라고 하겠어?

잘 준비를 모두 끝마친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보를 정리해준 하녀가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고 나가려는데, 대공이 바통터치를 하듯 방으로 들어왔다.

“대공님.”

당장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내가 상체를 일으키려 들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저지했다.

“불을 꺼주러 왔소.”

세상에. 최애가 나 잘 자라고 불 꺼준대.

마음 같아서는 잠들 때까지 자장가라도 불러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욕구를 꾹 눌렀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시나요?”

자장가 불러달라고 안 한댔지, 다른 거 요구 안 한다고는 안 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대공의 눈동자에는 또 한 차례 지진이 일어났다. 온종일 나를 보며 당황하는 저 모습이 조금은 가엾기도 했지만, 이렇게나 귀여우니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내가…… 그래야 하나?”

당황한 대공이 내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잠이 들 때까지 있어 달라는 포로의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는 지나치게 매너가 넘쳐흘렀다.

“네. 그래 주시면 좋죠. 이곳은 낯설어서 잠이 잘 오지 않거든요.”

나는 뻔뻔하고도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은 그가 옆에 있으면 얼굴을 보느라 더 자지 않을 게 뻔했지만, 바로 그걸 원한 것이기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대공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공녀가 원한다면 그리 하겠소.”

악역인 척하는 데 가만 보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순둥이라니까.

대공은 의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멋쩍어하는 그가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몰라 헤매는 게 보였다.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최애의 얼굴을 보는 건 내가 날마다 해오던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면이 아닌 입체라는 사실이 나를 더 감격스럽게 만들었다.

설마 이거 꿈이라서 자고 일어나면 끝나있는 건 아니겠지?

꿈이라고 믿는 쪽이 훨씬 설득력이 높았다. 그만큼 환상적이었으니까.

최애가 내 눈앞에 있다니…. 내 최애가….

나는 감격에 젖어 눈을 부릅떴다.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주는 감각 때문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그럴수록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도록 더욱 힘을 주었다.

시각이 주는 황홀함 때문에 잠들기가 아까워 버티던 나는, 새롭게 펼쳐진 삶이 고단했는지 결국 내 바람과는 반대로 이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다행히 빙의는 꿈이 아니었다.

환한 아침 햇살에 눈을 뜨자마자 보인 방은 잠들기 전과 같은 장소가 분명했으니까.

다만 자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잠들기 전까지 눈앞에 있던 레이몬드 루슬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눈동자에 담고 있고 싶어서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다가 결국 잠이 들어버렸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아까웠다. 가능한 한 많이 오래도록 보고 싶었는데.

내가 아쉬움을 달래며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그때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세요?”

“공녀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정중한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응답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어제 나를 시중들어주었던 하녀인 것 같았다.

“네. 들어오세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온 하녀들은 나를 씻기기 시작했다. 어젯밤 자기 전에 했던 절차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이 씻겨주고 옷을 갈아 입혀주는 건 어색한 일이었지만 그저 해주는 대로 받았다. 갓 태어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거고, 따지고 보면 나는 이 소설에 갓 태어난 셈이니까.

“공녀님. 팔을 들어보세요.”

나는 팔을 올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영혼이 에일린의 몸에 들어왔다면 에일린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바뀐 걸까?

내 몸은 여기로 오기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상황상 즉사했을 것 같지만, 어쩌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수도 있다. 거기에 에일린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말이야, 도도한 에일린이 건방진 오빠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얄미운 오빠를 생각하자 문득 부모님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는 어쩌고 있을까? 내 걱정을 많이 하겠지?

“공녀님. 등을 밀어드리겠습니다.”

까슬까슬한 샤워 타올이 등을 문지르는 감각이 느껴지자 내 눈동자는 금세 촉촉해졌다.

따가운 것이 등인지 심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 같아서, 고개를 힘차게 도리도리 저었다.

됐어. 어차피 빙의 돼버렸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전생에 관한 건 잊어버리기로 했다. 소설 속에 들어온 이상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내야만 하니까.

넓고 보송보송한 수건에 싸여 물기를 닦아내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나왔다. 하녀들이 피부를 부드럽게 만드는 오일을 발라주자 몸에서 윤기가 흘렀다.

오늘 내가 입을 옷은 대공 쪽에서 준비한 베이지색의 드레스였다.

공작 딸의 옷으로는 품격이 조금 떨어졌지만, 포로가 입을 옷이라고 하기에는 넘치게 기품 있었다.

“여기에 다리를 넣으세요.”

나는 드레스를 입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슬픔에 잠겨있기보다는 내 처지에 대해 하나라도 더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우선 말도 통하고 글자도 읽을 수 있는 걸 보니 하드웨어는 온 것 같은데 소프트웨어의 행방은 모르겠다. 내가 가진 기억은 나 임윤경의 것이 확실하고, 에일린 코웻에 대해 아는 것도 그녀의 기억이 아닌 소설 속 내용이 전부였다.

기왕 빙의할 거라면 기억도 같이 오면 편했을 텐데.

장단점이 있겠지만 적응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살아내면서 스스로 정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는 생각 속에서 단장을 끝마친 나는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루슬로 대공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공녀. 오셨소.”

그가 고개를 들며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이럴 수가. 이건 꿈이 틀림없어!

꿈이 아니고서는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일 리가 없잖아.

내 근심 걱정과 약간의 우울함은 그를 보는 순간에 몽땅 하늘 높이 증발했다.

까만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올린 대공은 잘생긴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 바람에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어젯밤, 아니 매일 밤 영원토록 머금고 싶었던 자태가 다시금 눈앞에 놓이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와. 와.”

나는 감격에 겨워 입을 막고 신음을 뱉다가 곧 두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대공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공녀. 혹 어디 아프시오?”

“제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아요. 당신을 바라보니.

그러나 삼킨 뒷말을 듣지 못한 대공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의사를 불러드리겠소.”

“아, 아니에요.”

나는 손을 마구 내저으며 그를 급히 말렸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혹, 병이라도 있소?”

네. 병이 있어요. 병명은 상사병.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 병은 당신을 계속 보고 있으면 싹 달아날 테니까.

혼자 속으로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던 나는, 눈앞에 걱정스레 보고 있는 대공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서둘러 감정을 추슬렀다.

“아녜요.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그런 가 봐요.”

“시장하였나 보군. 어서 식사를 하지.”

대공은 내 말을 듣자 그제야 안심하며 도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침밥을 보았다. 스프와 빵, 계란 프라이에다가 방울토마토와 파프리카, 양파를 볶아낸 간단한 샐러드가 주메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제 먹었던 말캉 버섯 튀김도 한 접시가 놓여있었다.

“오. 말캉 버섯이다.”

나는 포크를 가져다가 그것을 푹 찍어 입안에 넣었다. 역시나 쫄깃쫄깃한 식감이 살아있었다. 겉바속촉 그 자체!

그러나 난 곧이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대공이 나를 신경 써서 준비해준 음식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또 대공의 얼굴 감상시간을 놓치기는 싫었다.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바빠서 나에게 얼굴을 보여줄 틈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안은 입안에다가 버섯을 있는 대로 쑤셔 넣는 거였다. 마치 다람쥐가 볼 안에다가 도토리를 저장하듯이 말이다.

일단 입에다 넣고 혀로 하나씩 빼내서 씹어 삼키면 되겠지?

그런 단순무식한 생각에 입에 하나둘 셋 집어넣으려니 내 볼은 금세 빵빵해졌다.

대공은 나의 무한 포크 질을 보며 넋이 나가 있더니 어느 순간 “풉.”하는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살짝 떨고 있는 걸로 봐서는 웃음을 최대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모습이 그리 웃긴가?

하지만 내가 세운 작전은 마음에 쏙 들었다. 입과 눈이 동시에 즐거울 수 있으니까. 게다가 버섯은 소화도 잘 된다고!

나는 부지런히 입을 오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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