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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2화 (2/125)

2화

소설 원작에서는 턱을 붙잡힌 공녀가 “으으. 파렴치한 같으니…….” 같은 말을 내뱉으며 분노에 떨었다. 대공은 그런 공녀의 입술로 다가가다가 두 입술이 맞닿기 바로 직전에 그만두고 방을 나가버린다. 천성이 좋은 사람이기에 나쁜 짓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쁜 놈 연기가 치수가 맞지 않은 정장을 입은 듯 어색했으니까.

사실 독자들은 강제키스로라도 대리만족을 원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공의 입술이 순결을 지킨 사실을 기뻐했다. 그때에는 분명 나도 후자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순간 반드시 강제키스를 성사시켜야 좋다는 쪽으로 바꾼다. 그 이유야 당연히 최애인 레이몬드랑 키스가 하고 싶으니까.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수천 번 수만 번을 부딪쳤던 저 입술의 감촉을 실제로 느껴보고 싶으니까.

꼭 하고 싶습니다!

속으로 그리 외치며 나는 그의 얼굴이 다가오기를 고대했다.

싫은 척 연기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잠시 잠깐 스쳤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그러기를 거부했으니까. 내 입술은 이성의 컨트롤을 벗어나 슬슬 앞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닿아보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원작대로라면 훅 다가와야 할 그가 주춤거리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입술을 비쭉 내밀고 있는 내 표정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대공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한쪽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당황해하는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잠겨있는 듯했다.

에라이, 망했다 망했어. 조금만 참고 표정 좀 절제할걸.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간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든 성사시키고야 말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는 상체를 버둥거렸다. 그러자 대공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내 쪽으로 넘어온 그의 입술은 내 입술 위가 아닌 바로 옆 뺨에 닿았다.

쪽!

아, 아깝다. 조금 빗나가고 말았네.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침대가 아니라서 그나마 얻어걸린 게 어디야?

반쯤 만족한 내 표정을 보지 못한 대공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이런.”

당황한 그는 다급히 자세를 추슬렀다.

어쩐지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듯했고 두 볼은 발그스름했다.

저 모습은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

그래. 그러고 보니 에일린 코웻도 미모가 빼어난 편이었다.

비록 따로 삽화는 없었지만 작가가 공을 들여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벚꽃이 내려앉은 것 같은 분홍빛 머리칼에 숲을 연상시키는 녹안을 가진 에일린 코웻은 한 그루의 벚나무라고. 귀족적 프라이드가 높은 그녀는 입이 묵직했으며 늘 고고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마치 한 마리의 백조 같은 여인이라고도 했었다.

그렇게 온몸에 기품이 철철 넘치는 여인과 살이 닿았으니 그도 심장이 떨리는가 보다.

우리 레이몬드도 남자구나? 짜식. 귀엽기는.

나는 흐뭇한 마음이 들어 일명 엄마 미소를 지었다.

코라도 슥슥 비비고 싶었지만 이건 팔목이 묶여있어서 관두었다.

“나는 이만 가지. 하녀들을 불러서 씻게 할 테니 식사는 조금이라도 드는 편이 좋을 거야.”

나의 반응은 그의 예상을 모두 뛰어넘는 것들이었나보다. 대공은 이 당황스러움에서 벗어나려는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안 돼!”

나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외쳐버렸다.

지금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야.

이제야 내 최애를 만났는데, 간신히 만나고야 말았는데, 이대로 정녕 떨어져야 한다고?

계속 보고 또 보고 싶은데!

내 안의 덕후의 영혼이 또다시 원숭이처럼 광광 날뛰었다.

“안 된다고? 왜지?”

“대공님. 저기요….”

뒤로 돌아본 대공은 나의 공손한 부름에 가만히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밥은 어디서 먹어요?”

“방으로 가져다주지. 혼자 먹는 게 편할 테니까.”

“아니요. 전 대공님이랑 같이 먹을래요!”

“….”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 두 눈동자에 가득 담다 못해 흘러내리려는 소망을 발사하면서 말이다.

너랑 밥 먹고 싶다. 너랑 같이 먹고 싶어.

그의 눈동자는 나의 간절한 눈빛에 지진이 나듯 흔들렸지만 잠시 뒤 안정을 찾았는지 도로 차분해졌다.

“그러지. 하녀들에게 일러둘 테니 준비하고 나오도록.”

대공이 그리 말하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잠시 후 방을 나갔다.

오. 앗싸. 앗싸!!

이런 미췬! 최애랑 식사자리라니. 식사 데이트라니.

여러분. 나 성공한 덕후예요, 성덕이라고요!!

나는 목청껏 외치며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그 대신에 폭신한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해야 했다.

***

레이몬드 루슬로 대공이 나를 데려온 곳은 시골에 자리한 크지 않은 저택이었다.

아까는 대공에게 정신이 팔려있느라 미처 몰랐는데, 그가 방을 나가고 나자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방도, 복도도, 그리고 이곳 임시식당도 화려하지 않지만 고풍스럽고 정갈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달그락달그락.

포크가 접시에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식탁이 놓인 어느 작은 방.

대공은 나를 배려하여 단둘이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팔목에 묶여있던 천도 모두 풀어낸 상태였다.

어쩜 이렇게 세심한지.

나의 최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기특하지 않은 구석이 없어.

감탄은 내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게 또 얼굴에 드러났는지 대공은 당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내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식사에만 집중했다.

푸른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대신에 혼자서 실컷 그의 잘생긴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와, 커튼처럼 드리워진 저 길고 풍성한 속눈썹 좀 봐 봐.

밥을 먹는 최애를 코앞에서 바라보는 기분이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이었다.

“레이디 에일린.”

“네?”

대뜸 대공이 고개를 들면서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용어가 존칭으로 바뀌었고 말끝도 살짝 올라갔다. 적성에 안 맞는 겁박은 벌써 관두려는 걸까.

“그대는 안 드시오?”

내가 먹지는 않고 자기 얼굴만 흘끔거리고 있으니까 의아해서 물어보나 보다. 아마도 이글이글 불타는 내 뜨거운 시선을 의식한 듯했다.

“머……먹고 있어요. 이 버섯요리가 참 맛있네요.”

나는 접시 위에 놓인 작고 오동통한 버섯을 포크로 꾹 찍어 입안으로 넣었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싶어 미안했다. 오물오물 씹고 있으려니까 이번엔 대공이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버섯을 좋아하시오?”

“네. 좋아해요. 이 버섯의 이름은 뭔가요?”

“말캉 버섯이요.”

“오호. 이름처럼 말캉말캉하네요. 정말 맛있어요.”

내가 몇 개를 더 찍어서 입에 연달아 넣자, 그 모습을 본 대공이 하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버섯요리를 한 접시 더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버섯이 수북이 올려진 접시가 등장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바싹하게 튀겨서 감칠맛 나는 소스를 두른 이 버섯요리가 맛이 없을 수야 없지.

맛있게 먹고 있으려니 대공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대공님도 말캉 버섯 좋아하세요?”

“즐기는 편이오.”

“그럼 하나 더 드세요.”

나는 대공의 접시에 말캉 버섯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걸 발견하고는 포크로 쿡 찍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물론 포크는 내가 좀 전까지 쓰던 것이었다.

“….”

대공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버섯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되었소. 내가 직접 먹지.”

아깝다. 안 걸려 들어오네.

간접키스를 바란 나의 노림수가 무너지자, 실망한 나머지 눈썹 끝이 아래로 푹 처졌다.

그래. 초면부터 간접키스는 오버긴 해. 키스도 오버였지 뭐.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충분한데.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며 턱을 괸 채 대공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의 포크 질이 빨라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식사를 마친 우리는 디저트 타임을 가지기 위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잘 먹었소.”라는 인사를 끝으로 가버리려는 대공에게 “디저트는요?”라고 물으며 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진 대가였다.

이번에도 대공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예. 시간 연장 성공!!

우리는 소박한 풍경이 보이는 테라스의 탁자에 마주 앉았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시원한 게 딱 봄 날씨를 연상케 했다. 이런 날이면 밥을 먹은 후라 졸리기도 하련만 내 의식은 또렷하기만 했다.

하녀가 내어온 혀가 부서질 듯이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나 중독을 일으킬 것 같은 근사한 차향 때문이 아니었다. 날씨든 디저트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건 그저 내 눈앞에 앉은 존재, 레이몬드 루슬로 단 한 사람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대공은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그윽한지 저 푸른 바다 속에서 헤엄 한 번만 쳐봤으면 싶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레이몬드를 빤히 보고 있었기에 시선이 당장에 맞부딪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경이 쓰였는지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그대는 붙잡혀 왔는데도 침착해 보이는군.”

“대공님께서 저를 잘 돌보아주시잖아요.”

“….”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잘해주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그렇다고 영애를 괴롭히고 싶은 것도 아니고….

원작인 웹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를 읽은 나는 대공의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기에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대공은 이미 반쯤 포기한 듯했다. 원작에서처럼 말이다.

본디 악한 사람이 아닌 대공은 도도한 에일린을 감히 어찌하지 못했다. 물론, 우리의 루슬로 대공께서는 처음부터 황제를 괴롭게 하려는 의도로 에일린을 납치했을 뿐 그녀를 함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데리고만 있다가 돌려보내는 게 원래 스토리의 진행이었다.

바람이 강해지고 해가 구름 뒤로 숨으면서 날씨는 갑작스레 추워졌다. 머지않아 비라도 내릴 것처럼 스산했다.

“바람이 차군.”

그렇게 중얼거린 대공은 잠깐 안으로 들어가더니 숄을 한 장 꺼내어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내게로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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