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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화 (1/125)

1화

악역이란 뭘까? 이 단어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어릴 적 주인공이 해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나이대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TV를 한참 보다가 아리송해진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저기서 누가 나쁜 놈이에요?”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정말요?”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TV를 멀뚱멀뚱 응시했다.

선과 악이 분명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기에 엄마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 똑같은 놈들이 맞았다.

주인공은 단지 주인공이라고 지정된 자리 때문에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고 있을 뿐인 거였다.

그때부터 내게 악역이란 ‘나쁜 놈’이 아니라 ‘주인공을 거스르는 세력’이 되었다.

나는 악역을 그렇게 정의했다. 땅땅땅!

고로 이곳의 악역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을 반대하는 세력의 수장 레이몬드 루슬로는 이 웹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의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나의 최애다.

루슬로 대공은 나만이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는 비록 악역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부모님의 복수로 일생을 바치면서도 자기 사람들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손은 차갑지만 가슴이 따뜻한 남자다.

특히나 아름다운 외모가 캬아, 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의 흑발,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 당기는 신비하고 위험한 블랙홀이고

그의 벽안, 그것은 푸른 바다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듯 깊고 영롱했다.

거기에다가 185cm에 달하는 키와 태평양같이 떡 벌어진 어깨는 군사들을 지휘하는 늠름한 총사령관 그 자체. 벼랑 끝에서 전장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의 외모는 친척이자 남자주인공인 황제와 막상막하를 겨룰 만큼 치명적이었다.

루슬로 대공은 실제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삽화로도 들어갔는데, 그 화에 조회 수와 댓글 수가 폭발적이었다. 소설의 작가가 많은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따로 공지 인사까지 올릴 정도였으니까. 대공은 별 인기 없는 소설을 하드캐리한 장본인이었다.

때문에 그 후로도 삽화가 여러 장이 올라왔고, 그 삽화들로 내 방이 도배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은 웹소설도 북 트레일러라고 짤막한 홍보용 동영상을 만들어주는데 그거 내가 거짓말 안 하고 3백 번은 봤을 거야.

그렇게 나의 즐거웠던 덕질 라이프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접촉사고를 통해 현실이 되어버렸다.

SUV 차량이 신호가 바뀐 걸 모른 채 돌진하여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탄 택시 뒷좌석을 들이받았다. 정통으로 박았으니 분명 즉사였을 것이다.

내게로 비치는 헤드라이트와 돌진해오는 자동차를 인지한 그 순간, 머릿속은 등을 끈 듯 암흑으로 변했고 나는 웹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 속 등장인물이 되어있었다.

***

후욱후욱.

숨을 쉬기 답답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러나 막상 눈을 떠보니 뜨고 있든 감고 있든 보이는 건 똑같은 어둠뿐이었다.

내 얼굴에 뭔가가 씌워져 있는 것 같은데?

손을 들어 빼보려 했지만 손목이 무언가로 포박되어있었다. 한마디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가지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 설마 납치당한 건가…?!

상황파악을 위해서 가만히 오감을 집중해보았다. 우선 나는 폭신한 어떤 곳 위에 누워있었다. 엉덩이를 들썩이자 튕겨 오르는 감각으로 보아 아마도 침대 위가 아닐까 싶다.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 일어나기란 쉽지 않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새우처럼 버둥거려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건 침대가 아주 넓다는 것과 이불의 질감이 실크처럼 부들부들하다는 것, 이 두 가지였다.

여기는 어딜까. 나는 왜 잡혀 온 거지.

그러나 머리가 아프기만 할 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벅저벅.

그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쪽으로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쿵.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내 상태가 이렇다 보니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를 납치한 것이 분명한 존재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긴장이 되어 심장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다.

“깨어났나 보군.”

방에 들어온 것은 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로 보아 남자 같았는데, 이 와중에도 듣기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공격적이지도 날카롭지도 않고 안정되어있는 톤은 어쩐지 내 마음을 안심시켜주었다.

그 덕분에 상대와 대화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얼굴 전체에는 복면이 씌워져 있었지만 입은 따로 막지 않았기에, 한 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여… 여기가 어딘가요?”

두려움의 감정이 그대로 목소리에 실렸다. 그러나 그저 피식하는 웃음소리뿐 어떠한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을 심산인가. 그렇다면 다르게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저를 왜 데리고 오셨죠?”

두 번째 질문을 하고 나서야 남자가 입술을 가만가만 움직였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별 소득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다짜고짜 데려와 놓고선 이유를 알고 있다니. 남자는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그런 말로는 아무런 정보도 수집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를 어쩔 셈이에요?”

“글쎄. 나도 지금 그걸 고민하는 중인데. 대화하기 불편하니 그것부터 벗을까?”

조금 떨어져 있던 남자는 갑자기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뭐…… 뭘 벗긴다는 거야?!

순간 깜짝 놀라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다음으로 느껴진 건 머리에서 복면이 쑥 빠져나가는 감각이었다.

일순 깜깜했던 눈앞이 환해졌다.

어라?

그리고 나는 그만 천지개벽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듯한 감각. 내 눈이 세상에 둘도 없을, 처음으로 마주한 찬란함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앞에는 나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있는 얼굴이 보였다.

미남이지만 훈남이기도 한 경계선의 어디 즈음에 선 그는 그야말로 내 취향으로 범벅된 사람이었다.

세상에나….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에 고여있는 침까지 삐죽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눈앞의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또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미쳤다 미쳤어!!

내 영혼이 육체 안에서 흥분한 원숭이처럼 마구 날뛰었다.

나는 보자마자 확신하고야 말았다. 이 사람은 밤마다 보고 싶어서 이불 속에서 몸부림쳤던 나의 최애라는 걸!

“레이몬드 루슬로.”

입안에 고인 침을 츄릅, 하고 삼킨 나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내 볼은 상기된 채 발그레해졌다.

“그래 맞아. 에일린 코웻.”

루슬로 대공은 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불렀다. 그제야 나의 현실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최애가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나가서 내 처지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에일린 코웻?

나는 그 익숙한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에일린이라면 분명 웹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에 나오는 엑스트라급 조연으로, 황제 카일 루슬로의 약혼녀 이름인데… 설마 내가 그 여자한테 빙의를 한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도 이해가 간다.

루슬로 대공은 황제의 정식 약혼녀인 에일린 코웻을 납치하니까.

원작소설에 따르면 선황제 칼론 루슬로는 폭정을 했다. 왕권 강화라는 명목으로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도륙했고, 거기에는 레이몬드 루슬로의 아버지인 레윈 루슬로도 포함이었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카일은 처음에는 레이몬드와 사이가 좋았다. 폭군에게서 나올 수 없는 올바른 아이였기에 주변에서도 기대가 컸다. 그가 황제가 되는 날에는 이 프라레스 제국에 평화가 깃들 거라고. 그러나 황제가 사망하고 카일이 황제로 등극하자 그는 돌연 변해버렸다. 저잣거리에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에 레이몬드는 복수와 반란을 결심하게 되었다. 황제의 약혼녀를 납치한 것도 황제에게 흠집을 내기 위한 복수의 일환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 가슴은 다른 의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루슬로 대공은 천천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대공의 얼굴과 내 얼굴과의 거리는 이제 한 뼘 정도 되었다. 그는 손등으로 내 뺨을 쓰다듬더니 곧 턱을 붙잡아 올렸다.

“고귀하신 코웻 공녀의 입술을 함부로 훔친다면 어떨까.”

반쯤 감긴 눈으로 응시하는 대공의 눈빛은 뇌쇄적이었다. 상대를 유혹하는 푸른 눈동자는 당장 코피를 퐝 터트릴 것 같은, 내가 뛰어들고픈 바다 그 자체였다. 붉은 제복 차림은 그의 섹시함을 한층 더 가미시켰다.

세상에나 세상에, 이건 바로 그 부분이다.

대공이 황제를 괴롭힐 심산으로 에일린을 의도적으로 탐하려다가 관두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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