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이것 봐! 내가 찾았어요!”
솔란시아는 흙무더기 사이에서 파낸 조그만 상자를 들고 신이 나서 깡충거리고 뛰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세공의 틈새마다 진흙이 빡빡하게 엉겨 붙어 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로즈안나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상자를 바라보다가, 뚜껑에 덕지덕지 붙은 흙을 살짝 털어주면서 말했다.
“이건 말이죠, 황녀님의 고모님이 묻어두신 보석 상자랍니다.”
아르사크는 놀란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솔란시아는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유레나 고모님? 아버지가 얘기하시던 고모님?”
“맞아요. 유레나 님이 지금 황녀님처럼 어렸을 때 여기다 묻어두신 거예요. 저도 같이 있었는데, 여태까지 잊고 있었네요.”
“이 안에 뭐가 들었어요?”
“궁금하세요? 상자를 씻고 같이 열어볼까요?”
“열어보고 싶어! 어머니, 열어봐도 되지요? 고모님 거니까 아바마마도 괜찮다 하시겠지요?”
에리히야 솔란시아의 말이라면 쓸개라도 빼줄 태세니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로즈, 네가 가져가는 게 낫지 않겠니?”
로즈안나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찾아내신 건 솔란시아 황녀님이니 황녀님이 가지셔야죠. 유레나 님도 솔란시아 님이 갖고 싶다고 하시면 기쁘게 주셨을 겁니다.”
“그래도…….”
“어머니! 로즈안나! 우리 이거 빨리 열어보러 가요! 얼른 가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뛰지 마. 전처럼 또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까지면 네 아빠가 정원 전체에 융단을 깔아놓으려고 할지도 몰라.”
아르사크가 짐짓 한탄하듯 말하자 로즈안나가 킥 웃었다.
에리히와 아르사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솔란시아 황녀 이외에도 밑으로 아들 둘이 더 있었다. 솔란시아보다 두 살이 어린 네 살짜리 황자 막시밀리안, 그리고 이제 곧 첫 번째 생일을 맞을 막내 알프레트였다.
보통 첫아이가 딸인 경우 밑으로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계승권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한동안 보류하게 마련이지만, 솔란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첫 생일을 지나자마자 제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황태녀皇太女 솔란시아네브 드라인 클로츠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에리히는 첫아이이자 장녀인 솔란시아를 극진하게 사랑해서, 솔란시아가 두 살 무렵까지는 아예 무릎에서 떼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정무를 보면서까지 솔란시아를 안고 나타나기 일쑤여서, 황녀를 돌보는 시녀들이 아르사크에게 하소연을 하고서야 겨우 그만두게 되었다.
“막스! 이것 봐! 누나가 보석 상자를 찾았어!”
솔란시아가 흙투성이 상자를 번쩍 치켜들자 그새 말라붙은 진흙들이 황녀의 머리 위로 푸르르 떨어졌다. 부리나케 달려온 유모가 기겁을 하면서 솔란시아를 안고 욕탕으로 사라진 사이, 아르사크는 무릎에 안겨 오는 막시밀리안을 소파에 앉히고 알프레트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나무로 된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앉아 노는 알프레트는 에리히를 빼다박은 외모였고, 막시밀리안은 에리히와 아르사크를 적당히 반씩 닮았지만 갈색 눈동자만은 아르사크와 똑같았다.
“황후 마마, 폐하께서 오셨어요.”
바깥에서 달려온 시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차를 가져오라 이른 아르사크가 막시밀리안의 옷깃을 매만져주는 사이 에리히가 들어왔다. 바닥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엉금엉금 기어오는 알프레트를 에리히가 발로 슥 밀어내자 아르사크가 버럭 소리를 쳤다.
“발로 애 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요?”
그러나 에리히는 들은 척 만 척하며 알프레트를 번쩍 안아 유모에게 넘겨주며 대답했다.
“누굴 닮았는지 버릇도 없다니까. 황제의 앞길을 막아?”
“알프레트는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폐하의 아들인데요.”
“난 저렇게 버릇없지 않았어.”
어련하시겠냐는 듯이 코웃음을 친 아르사크는 유모의 품에서 버둥거리는 알프레트를 받아 안았다. 에리히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막내의 통통한 뺨을 꾹 찔렀다. 그러자 알프레트도 에리히의 손을 홱 걷어내면서 울상을 한다.
“기가 막혀, 정말. 솔란시아만 폐하의 자식인 게 아니거든요. 막시밀리안이랑 알프레트도 차별 없이 예뻐하시라고요.”
“예뻐하고 있잖아.”
“애들 생각은 좀 다를걸요.”
아르사크가 잔소리를 했지만 에리히는 영 시큰둥했다. 솔란시아 아래로 태어난 아들들에 대해서는 에리히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황자인 아들들을 지나치게 예뻐하는 기색이 보이면, 혹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무리들이 솔란시아의 자리를 위협할까 봐 그런다는 것을 아르사크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내인 알프레트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 살배기인 막시밀리안은 차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차릴 때여서, 슬슬 에리히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태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둘 수도 없었다.
“오늘은 폐하께서 막시밀리안을 데리고 주무세요.”
“뭐? 내가 왜.”
“아버지가 아들 데리고 자는 게 뭐가 어때서요? 책도 읽어주고 자장가도 불러줘요. 아시겠어요? 만약 중간에 막시밀린안이 울면서 뛰어나오기라도 하면…….”
그때였다. 유모에 의해 말끔해진 솔란시아가 에리히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뛰어오는 바람에, 아르사크는 그만 대꾸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솔란시아는 아버지의 무릎이 마치 제 자리인 양 앉아 자신이 발견한 것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제가 고모님의 보석 상자를 찾았어요!”
“고모님의 보석 상자? 그게 뭐지?”
“유레나 고모님의 보석 상자요! 로즈안나가 유레나 고모님이 어렸을 때 묻어놓은 것이라고 말해줬어요! 아바마마, 제가 고모님의 보석 상자를 가져도 되지요? 열어봐도 되지요?”
로즈안나가 흙을 털고 깨끗하게 씻어낸 상자를 가지고 오자 솔란시아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에리히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세공이 벗겨지고 빛이 조금씩 바랬지만, 귀퉁이에 장식된 보석과 상아로 된 작은 다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양으로 상자를 감싸고 있었다. 에리히는 놀란 표정으로 상자를 살짝 건드렸다가 로즈안나를 쳐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찾았지?”
“폐하께서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제가 찾은 게 아닙니다. 솔란시아 황녀님이 찾아내셨어요.”
“아바마마! 열어보고 싶어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 네?”
상자를 집어 든 에리히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가, 호기심 가득한 솔란시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미소를 띤 채 딸의 손에 상자를 쥐여주었다.
“그래, 열어보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봐도 좋다.”
솔란시아는 신바람이 나서 상자의 걸쇠를 당겼다. 빡빡해서 잘 빠지지 않자, 에리히는 솔란시아를 위해 손끝으로 걸쇠의 끄트머리를 살짝 당겨주었다.
뚜껑이 열린 순간, 로즈안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상자의 안쪽은 먼지 한 톨 쌓여있지 않았다. 반짝이는 벨벳 안감의 푸른빛도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았고, 조그만 단추와 머리핀도 그대로였다.
“아바마마! 어머니! 이것 보세요, 이게 고모님 거예요? 머리핀도 있고, 단추도 있어요! 아바마마, 이거 유레나 고모님께서 넣어두신 게 맞아요? 아바마마는 아세요?”
에리히는 잠깐 동안 말을 잃은 채 상자 속에 든 것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운 물건들이었다. 유레나가 아끼던 물건들. 오라버니도 뭔가 넣으라며 하도 조르는 통에 마침 달랑거리던 소매의 단추를 넣어준 일이 바로 얼마 전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네 고모가 넣은 게 맞구나. 가지고 싶니?”
“가지고 싶어요!”
“그럼 이제부터 이건 네 것이다. 잘 보관하렴.”
솔란시아는 신이 나서 상자를 안고 방 안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막시밀리안과 알프레트를 안은 유모들도 솔란시아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에리히는 그제야 비로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물건이야. 로즈안나, 네가 아니었으면 뭔지도 모른 채 버려졌겠구나.”
“저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어렴풋이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건 가끔 생각했지만, 어디에 묻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어요.”
“안에 든 머리핀 하나는 네 것이지? 널 처음 만났을 때 그 머리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솔란시아 황녀님의 것이죠.”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사크가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며칠 동안은 저 상자를 잘 때도 끌어안고 있을 거야. 누굴 닮았는지 고집이 말도 못 한다니까.”
“누굴 닮았냐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폐하께서 고집이 좀 세긴 하시죠.”
“나쁜 건 다 날 닮았다 이거야, 지금?”
“황녀님은 어디로 보나 아르사크 님을 많이 닮으셨어요.”
로즈안나가 한마디 거들자 에리히가 그것 보라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자, 로즈안나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폐하께서도 그래서 솔란시아 님을 제일 예뻐하시잖아요. 아르사크 님과 많이 닮으셔서.”
“솔란시아는 그냥 예쁜 거야. 황후를 닮아서 예뻐하는 게 아니고.”
에리히의 말에 로즈안나는 어련하겠냐는 표정을 짓고는 일어섰다.
“폐하, 아르사크 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르사크 님, 내일 드레스 가봉이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알겠어. 내일 봐.”
“그러면 편안히 쉬십시오.”
인사를 마친 로즈안나가 방을 나가자,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무릎에 머리를 댄 채 길게 누웠다. 찻잔을 든 채 그를 멀뚱히 내려다보던 아르사크가 말했다.
“은근슬쩍 여기서 주무실 생각 마세요. 오늘은 분명 막시밀리안이랑 같이 주무시라고 말씀드렸으니까.”
“다 같이 자면 되잖아. 내가 막시밀리안을 안고 자면 되지.”
“침대가 좁아서요.”
“진짜 이럴 거야?”
에리히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르사크의 손이 그의 이마를 꾹 눌렀다. 불만스레 실룩이는 뺨을 웃긴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코끝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그럼 애들에게 동화책만 읽어주고, 폐하께서는 소파에서 주무시든지요.”
“이 소파 내다 버리라고 할 거야.”
“바닥에서 주무시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누가 아쉽나요?”
그러자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손을 떼어낸 뒤 벌떡 일어났다. 소파 위에서 몸을 겹친 채 쓰러지자 아르사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