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도로테아는 처음에 여자아이들을 받아주는 수도원을 생각했었지만 그러기에는 로즈안나의 처지가 너무 가엾었다. 또, 수도원이라고 해서 로즈안나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황후로부터 유레나 황녀의 놀이 동무가 되어줄 만한 시녀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후, 도로테아는 황후를 설득해 로즈안나를 그 자리에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에리히와 유레나의 어머니인 황후는 천성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어서 로즈안나의 처지를 듣고는 두말할 것 없이 데리고 오라는 대답을 해주었던 것이다.
도로테아는 난동을 부리는 체첼리카 앞에서 황후의 명령임을 굳이 언급했고, 앞으로 로즈안나를 만나고 싶거든 황후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체첼리카는 로즈안나가 죽을 때까지 그 저택에서 풀어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황후 마마, 아즈나이즈 백작 부인이 알현을 청합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단다. 어서 안으로.”
황후는 도로테아의 인사를 먼저 받으며 미소를 띠었다. 로즈안나는 어쩔 줄을 몰라 겁먹은 표정으로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
오늘을 위해 도로테아가 새로 지어준 옷의 소매 밖으로 드러난 작은 손은 영양이 부족한 것을 여실히 보여주기라도 하듯 깡말라 있었다. 손등에 맺힌 채 아직 빠지지 않은 푸르죽죽한 멍 자국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황후가 말했다.
“네가 로즈안나로구나.”
“…네, 화… 황후, 마마.”
“우리 유레나랑 동갑이라지? 유레나는 오늘 네가 오기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단다. 지금 잠시 바깥에 나갔는데 곧 돌아올 거야. 사과 쿠키 좋아하니?”
로즈안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도로테아가 대답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안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말했다.
“이쪽으로 오련?”
황후가 손짓했다. 로즈안나가 주춤주춤 다가가자, 그녀는 로즈안나의 야윈 뺨을 살그머니 만져주면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영리하게 생겼구나. 차분하고, 말솜씨도 얌전하고.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니?”
로즈안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고는, 다시 약간 주눅이 든 표정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화… 황녀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황후는 자신도 역시 두 아이를 길렀으면서도, 그리고 로즈안나와 같은 나이인 유레나가 있으면서도 어린 로즈안나가 묻는 말에 예의 바르게 대답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녀는 도로테아 쪽을 바라보며 살짝 웃고는 로즈안나에게 사과 쿠키를 쥐여주며 말했다.
“그래. 유레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네가 옆에서 도와주면 된단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뭔지 알겠니?”
로즈안나는 어리둥절했다. 고모님도 황녀님의 시녀가 된다고밖에 말해주지 않았는데? 로즈안나가 고개를 젓자, 황후는 어린 로즈안나의 양손을 살짝 맞잡으면서 눈을 마주쳤다.
“재미있게 노는 거란다. 유레나에게는 오빠가 있지만, 에리히는 황태자이기 때문에 언제고 유레나와 놀아주고만 있을 수는 없거든. 게다가 유레나가 좋아하는 놀이는 시시하다고만 하니 말이야. 그러니 로즈안나, 네가 유레나와 함께 재미있게 놀면 돼. 내 말을 알겠니?”
“재… 재미있게, 놀…아요? 제가… 황녀님과요?”
“그래. 네가 유레나의 친구가 되어주렴. 유레나 곁에서 이야기도 나눠주고, 같이 간식을 먹거나 인형을 가지고 놀기도 하는 거야.”
어린 로즈안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황녀의 시녀가 되는 줄로만 알고 고모를 따라온 것이었는데, 같이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제부터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고모의 말은 진짜일까? 다정하게 웃고 있는 황후 마마는, 고모가 가버리고 나면 어머니처럼 무섭게 변해버리는 게 아닐까?
그때였다.
“어머님! 어마마마! 이것 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마치 종달새의 소리처럼 높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감히 황후의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온 소녀를 본 로즈안나는 깜짝 놀랐다.
레이스 끝으로 묶어 장식한 금빛 머리카락은 한쪽이 다 풀려 있었고, 인형처럼 예쁜 드레스의 밑단에는 흙물이 들어 얼룩덜룩했다. 조그맣고 오동통한 하얀 손에는 어설프게 만든 화관이 들려 있었다.
시녀들은 황녀의 그런 모습에 기겁을 했다. 그러나 황후가 자리에 있었기에 감히 나서지는 못하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황후는 어린 딸을 조용히 나무라려다 부드럽게 웃고는, 로즈안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유레나, 이 아이는 로즈안나란다. 오늘부터 너의 놀이 동무가 되어줄 아이야. 인사해야지?”
“이 아이가요?”
로즈안나는 유레나가 눈을 크게 뜨자 겁을 먹었다. 고모님이 애써 예쁘게 차려 입혀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 흙물 묻은 옷을 입은 황녀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레나는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요정 같았다. 당장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 포르르 날아오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로즈안나가 우물쭈물 절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유레나가 로즈안나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아!”
“반가워! 나는 유레나야! 로즈라고 불러도 되지? 어머니, 로즈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그래도 되지요?”
“그러려무나. 너무 뛰어다니진 말고. 또 넘어져서 다치면 아바마마께서 걱정하실 테니까.”
“안 그럴게요!”
유레나는 로즈안나의 손을 홱 붙잡고 밖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도로테아 앞에서 치마를 살짝 들어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허둥지둥 유레나를 따라가면서, 유레나가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은 화관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꽃이 망가질까 봐 너무 꽉 잡지도 못해 불안한데, 유레나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달음박질을 쳤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어머니께서 내 놀이 동무가 될 아이가 온다고 하신 날부터 잠이 안 오지 뭐야? 있지, 네 이름은 누가 지어줬니? 로즈안나라니, 너무 예쁜 이름이야. 내가 장미 정원을 보여줄게, 응?”
“화, 황녀님… 조금만 천천히…….”
“유레나라고 불러도 돼. 로즈안나는 내 놀이 동무니까 나랑 친구인 거잖아. 있잖아, 난 친구가 별로 없어. 그래서 매번 오라버니랑만 노는데 오라버니도 요즘은 나랑 별로 안 놀아줘. 이제 로즈안나가 있으니까 오라버니는 필요 없어.”
“누가 필요 없다고?”
등 뒤에서 불쑥 들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로즈안나는 놀라 기겁을 했지만 유레나는 깔깔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천진난만하게 휘돌았다.
“오라버니!”
“감히 내 흉을 봤겠다.”
“흉본 게 아니야! 오라버니, 인사해! 로즈안나야!”
유레나가 로즈안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로즈안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명의 소년 앞에서 기가 죽어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머리에 쓴 화관이 비스듬하게 삐뚤어지려는 것을 겨우 추스르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보니, 한쪽은 유레나와 꼭 닮았지만 다른 한쪽은 영 닮지 않은 소년이었다.
유레나와 닮은 쪽이 오빠일 테고, 그러면 다른 한쪽은 누굴까? 로즈안나가 갸웃이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갈색 머리의 소년이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테오도르 운트겔이야. 반가워.”
“아…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오라버니는 우리 오라버니의… 어… 검술 선생님이야!”
그러자 유레나의 오빠, 에리히가 여동생의 조그만 이마를 손가락으로 딱 튕겼다.
“선생님은 뭐가 선생님이야? 얘도 나랑 같이 배우고 있거든?”
“오라버니, 아프잖아! 자꾸 그렇게 못되게 굴면 나중에 결혼도 못 해!”
“쬐끄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야, 테오. 가자.”
“아, 네.”
에리히는 기가 죽은 로즈안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힐끔 바라보고는 테오도르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제야 유레나의 빨개진 이마가 눈에 들어온 로즈안나는 깜짝 놀라서 안절부절못했다.
“화, 황녀님… 아, 아프세요? 사… 사람을 부를까요?”
“응? 아니야, 괜찮아! 이 정도는 안 아파. 나중에 오라버니가 잘 때 더 세게 때려야지. 가자, 로즈안나. 너, 화관 만들 줄 알아? 내가 가르쳐 줄까? 장미꽃도 구경하고 화관도 만들러 가자. 그리고 같이 간식도 먹고. 응? 내 인형도 보여줄게.”
로즈안나는 유레나에게 끌려 얼떨결에 정원까지 나갔다. 그리고 정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넋을 잃었다.
분수대에서 솟구치는 깨끗한 물이 정원에 한가득 피어난 장미 넝쿨 위로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고?
꿈만 같았다.
“로즈안나! 이쪽으로 와봐.”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유레나가 넝쿨 사이에서 손짓을 했다. 로즈안나는 가시에 긁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유레나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유레나는 온 손이 흙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넝쿨 아래의 부드러운 흙을 파헤치더니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레나나 로즈안나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상자였다. 귀퉁이마다 보석으로 마감이 되어 있고, 끄트머리가 꼬부라진 조그만 다리가 앙증맞았다.
“이것 봐. 예전에 오라버니랑 같이 묻어놓은 거야. 내 보석상자.”
“…이 안에 뭐가… 있어요?”
“내 보물이 들어있어. 있잖아, 로즈안나도 여기에 뭔가 넣을래?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에 꺼내 보는 거야.”
“어른이 된 다음에…요? 그렇게 오랫동안… 땅속에 둬도 괜찮아요?”
“괜찮아! 여기다 묻은 건 아무도 몰라. 뭘 넣을래?”
고민하던 로즈안나는 머리 한쪽에 붙어있던 작은 핀을 떼어냈다.
유레나는 흙투성이가 된 뚜껑을 살짝 열고는 그 안에 로즈안나의 핀을 넣었다. 파란색 벨벳이 붙은 안쪽에는 로즈안나의 핀 이외에도, 유레나가 넣었을 법한 조그만 머리핀과 장신구, 예쁜 단추 따위가 있었다.
뚜껑을 덮고 다시 상자를 파묻은 유레나는 기운차게 손바닥을 털었다. 그러고는 조그만 입술 앞에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갖다 대면서 말했다.
“여기다 이걸 묻은 건 비밀이야. 알겠지? 아무한테도 말하기 없기야.”
“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난 벌써 로즈안나가 참 좋아.”
그리고 유레나는 갑자기 로즈안나를 꼭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로즈안나는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유레나의 손을 잡았다.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넝쿨 밖으로 기어 나온 아이들은 화관을 만들 꽃을 찾으러 정원의 너른 뜰을 뛰었다. 햇빛을 받은 유레나의 금빛 머리칼이 물고기의 꼬리처럼 찰랑대며 흔들렸다.
외전 7. 황녀의 보석상자 (2)
“어머니, 이쪽으로 와보세요!”
“왜, 뭔데 그래?”
“빨리요! 여기!”
낭랑한 목소리가 장미넝쿨 사이로 울린다. 로즈안나와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아르사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뭐가 있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르사크의 장녀이자 장차 황위를 이어받을 황녀 솔란시아였다.
아르사크를 꼭 닮은 캐러멜색 피부에 검은 머리칼, 그러나 눈동자만은 묘한 물빛이다. 정원을 하루 종일 뛰어다녀 옷자락도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뒤따라 왔던 로즈안나가 쪼그려 앉은 솔란시아의 머리 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녀님, 뭐가 있길래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