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렇군요. 하긴, 이 계절에 수박이라니.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 공연히 폐하께 걱정을 끼쳤네요.”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하는 에리히의 표정은 수박을 구해주지 못해 정말로 속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 그의 표정이라는 것이 비웃음 아니면 화남, 그것도 아니면 무표정, 아주 나쁠 때는 건드리기만 해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표정 정도였다면 지금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가 그의 이런 모습을 감히 상상이나 할까?
‘하긴, 내 앞에서는 훨씬 전부터 그랬지.’
아르사크가 생각했다.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황후가 된 지 이제 일 년 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 에리히는 여전히 서슬 퍼런 제왕이었고, 귀족들이 반대를 하거나 말거나 제국의 시민들을 위해 개간이며 세율 삭감 같은 사업을 차근차근 진행하는 황제였으며,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사크의 앞에서만큼은 이따금 흐트러지기도 하는 남자였다.
서로 놀리고, 꼬투리를 잡아 말싸움을 하고, 정말로 화가 나면 잡아먹을 듯이 언성을 높였다가도 같은 침대에 누워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생활이 이제는 익숙했다. 아르사크에게는 이제 반드시 책임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없었다.
“에리히.”
둘만 있을 때, 아르사크는 종종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은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왜?”
“좀 업어주세요.”
에리히의 눈썹이 삐딱하게 움직였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은 표정이다.
“갑자기 업어달라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수박을 못 먹었으니 업히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순간, 에리히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손을 뻗어 아르사크의 양 뺨을 죽 늘리듯이 꼬집었다.
“아!”
“감히 나를 속였겠다.”
“속이긴 뭘 속여요?”
“하나도 안 아팠던 거지? 대답해.”
“폐하께서 손을 안 놓으시면 아마 내일부턴 진짜로 아플지도 모르지요.”
에리히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놓아주자 입을 이리저리 실룩이며 미간을 찡그리는 아르사크는 애초부터 아팠던 기색이라고는 없는 모습이었다. 에리히는 그제야 묘하게 뒷덜미를 붙잡는 듯하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다시 한번 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폐하도 좀 즐기시는 것 같던데요, 뭘.”
“방금 뭐랬어? 누가 즐겨? 내가 이런 걸 왜 즐겨?”
“솔직히 즐거우셨잖아요? 저를 안고 수프 먹여주실 때 말이에요.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 계시던데, 그게 즐긴 게 아니면 뭔가요?”
“즐겼다는 말을 이상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언어 선생이라도 붙여줘?”
“꼬투리 잡긴. 그래서 업어줄 거예요, 말 거예요?”
“안 업어. 뭐가 예쁘다고 업어줘? 게다가, 감히 누가 황제의 등에 업혀?”
“내가.”
아르사크의 양팔이 에리히의 어깨로 불쑥 뻗쳤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매달리기 시작하자 에리히는 그녀가 침대 아래로 미끄러질까 봐서라도 황급히 둘러업는 수밖에 없었다.
엉겁결에 엉덩이를 받친 채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르사크가 고개를 젖히며 명랑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정원 산책이라도 하러 가요. 방 안에서만 업혀 있기는 너무 아쉬우니까.”
“꿈 깨고 빨리 내려와.”
“정 싫으시면 내려놓으시든지요.”
그러나 말과는 반대로 아르사크의 팔은 더욱 단단히 에리히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보통의 가냘픈 아가씨들과 그녀의 힘은 비교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단단히 팔을 감은 상태에서 아르사크를 내려놓으려면 집어던지는 수밖에는 없었다.
에리히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자, 아르사크는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며 물었다.
“어쩔 거예요? 내려놓을 거예요, 안 내려놓을 거예요?”
“그래. 이참에 아주 평생 업혀서 살아봐. 내일은 이 꼴로 정무에 나갈 거니까 각오나 단단히 해둬.”
“어머, 난 상관없지만 폐하께서는 과연 괜찮으실까요? 벌써 다리가 좀 후들거리시는 것 같은데요.”
“좋아, 계속 그렇게 나오시겠다.”
에리히는 입김을 훅 불어 앞머리를 넘기고는 갑자기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더니 발로 문을 뻥 걷어차 열었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들은 아연실색을 하며 몸을 돌렸다가, 황후를 업은 채 복도를 가로지르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고 턱이 빠질 뻔했다. 아르사크는 숨을 죽이고 웃느라 으흐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에리히의 목을 더 꽉 안았다.
“어디로 가시려는 건데요?”
“산책하러 가자며?”
“나중에 힘들다고 아무 데나 내려놓으면 안 돼요. 난 맨발이란 말이야.”
“맨발로 나무도 기어오르는 망나니가 이제 와서 얌전한 척은.”
“그 망나니한테 정신없이 빠져서 애까지 만든 건 누구지요?”
누군가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봤더라면 황제 부처가 그지없이 다정한 사이라며 감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황후가 머무는 별궁에서 정원의 산책로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입씨름을 해댔다.
둘 다 한 마디씩 주고받느라 목이 다 칼칼해졌을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조용한 정원의 외곽을 걸었다.
“이 나무는 가까이 올 때마다 좋은 향이 나는군요.”
아르사크가 거대한 나무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래 산 나무였다. 밑동은 굵직하고 껍질은 단단했지만 파르스름하고 가느다란 잎사귀에서는 신선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근처를 가만히 거닐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신기한 나무였다.
에리히도 그 나무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여러 번이다. 비록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던 일이지만, 지금도 나무를 올려다볼 때마다 그때의 기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요정들의 요람’이라는 이름이 있는 나무지.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이 나무를 솔란―네밀리스라고도 하더군.”
“그건 어느 나라의 말인가요?”
“제국어야. 다만 옛날에 쓰던 말이어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을 뿐.”
요정들이 잠드는 요람.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느다란 잎사귀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사이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을 요정들에게는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달콤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낳으면 그런 이름으로 지어요.”
“무슨 이름. 솔란―네밀리스라고 짓자고?”
“아뇨,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지요. 조금 바꿔서요. 예를 들자면… 남자아이면 솔라리스, 여자아이면 솔란시아가 어떨까 싶네요. 폐하 생각은 어떠세요?”
에리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사실 아기의 이름 같은 것은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르사크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 거대하고 고고한 나무로부터 따온 이름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태어날 아기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어디서든 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나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폐하는 아기가 기다려지세요?”
“당연한 소리를 왜 해? 하지만 나 닮은 애는 별로야.”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아버지거든요.”
“그건 그렇지만, 고집은 나보다 그대가 더 세지. 그 고집 좀 부려서 그대만 닮은 아기로 낳아봐. 그럼 무조건 그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줄 테니까.”
“폐하를 닮은 아기면 안 물려줄 거라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날 닮았으면 생각을 좀 더 해보고 물려주려고.”
그렇게 말하며 에리히는 낮은 소리로 혼자 웃었다. 사실 태어날 아이가 누구를 닮았든, 설령 에리히나 아르사크와는 별로 닮은 데가 없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카툴라 황실의 적장자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무조건 1순위의 승계자가 되는 것이다. 아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딸이라고 하더라도 에리히는 그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 싫지 않았다. 자신을 닮았다는 것은 곧 제국의 수많은 시민들과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런 아이여야만 무조건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르사크는 작게 웃으며 에리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럼 고집 좀 부려보죠. 제가 또 고집부리는 건 잘 하니까요.”
“말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잘 하지.”
소리 죽여 웃던 아르사크의 입술이 에리히의 귓가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외전 6. 황녀의 보석상자 (1)
“로즈안나, 괜찮으니 이쪽으로 오렴.”
겁먹은 표정으로 치맛말을 쥔 채 두리번거리던 로즈안나는 얼른 도로테아에게로 뛰어가 그녀의 손끝을 꼭 잡았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황궁은 너무나 넓고 낯설었다.
“이제부터 황후 마마를 뵐 거란다. 그리고 황녀님도 만나 뵙게 될 거야. 인사를 잘 할 수 있겠니?”
“…네, 도로테아 고모님.”
로즈안나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고 연약하게 들렸다. 도로테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내려다보고는 밤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 작은 몸짓에도 로즈안나는 겁을 먹은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누군가 손을 들어 올리면, 그다음에 겪게 될 일이라고는 얻어맞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테아는 체첼리카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여기가 네가 살게 될 곳이야, 로즈안나.”
로즈안나는 도로테아 고모의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가뭄에 콩 나듯 아버지를 보러 왔다가 금방 가버리곤 하던 도로테아가 저택에 들이닥친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분에 차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체첼리카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도로테아는 꿋꿋하게 로즈안나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평소 로즈안나에게 관심조차 없던 아버지는 아래층에서 그 난리법석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자신이 직접 로즈안나를 거두어 기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녀도 역시 이미 아이를 둘이나 기르고 있는 어머니였으므로 먼 친척의 아이를 또 입양하는 것이 일단 어려운 일이었고, 체첼리카 이오나와 드로스 이오나가 로즈안나의 부모로서 살아있는 이상 터무니없는 말썽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어린 로즈안나를 학대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낙인 듯한 체첼리카가 어느 날 로즈안나를 납치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에, 그녀의 손이 감히 닿지 못할 만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