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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88화 (188/191)

188화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것은 황궁의 요리장들이었다. 요리사로 일한 각자의 경력을 다 모으면 얼추 백이십 년쯤 되는 최고 요리장 다섯 명이 머리를 맞대고 한 시간이 넘도록 격론을 벌였지만 결국 ‘정말 맛있는 파이’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결론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사과 파이라니까. 사과 파이를 만들어야 해. 파이 하면 사과 파이지.”

“가을도 아닌데 묵은 사과로 만든 파이가 맛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 이런 계절에는 무화과야. 무조건 무화과 파이를 말씀하신 거라니까.”

“황후 마마께서 오신 곳에서는 무화과가 대충 굴러다니는 과일인 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게다가, 황후 마마께서 지금 어떤 상태시냐. 무려 첫 황손을 잉태하시고 계시다 그 말이야. 자고로 그런 때에는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이 가장 입에 당기기 마련이거든. 멧새 파이로 해야 해.”

“아, 선배님들 진짜 웃기지들 마십쇼. 제가 여기서 경력은 제일 달릴지 몰라도, 나이는 젊지 않습니까? 황후 마마께서도 연치가 어리신 분이지요? 그러니 황후 마마의 입맛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건 저라니까요. 제 말을 들으세요. 답은 체리예요. 체리 파이입니다.”

“야잇! 체리는 오라질 놈의 체리! 파이는 사과 파이라고!”

“아니야, 멧새 파이로 해!”

“고구마는 어때?”

대충 그런 식이었다. 각자 주장하는 바가 모두 달라서 도저히 합의를 보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한 시간여를 더 소모했다. 결국 주방을 담당하는 시녀장이 달려와 곧 만찬을 준비해야 하는데 뭣들 하고 있냐고 일갈한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좋아, 그러면 닥치는 대로 굽자고.”

“그래, 맞아. 황후 마마께서 입맛에 맞으시는 걸 드시면 되지.”

“파이 정도 굽는 거야 어렵지도 않으니까.”

그때부터 주방 안에서는 홧홧한 열기가 빠질 줄 몰랐다. 모든 주방장과 요리사들이 동원되어 만찬에 내갈 음식을 만드는 한편, 거대한 오븐에서는 끊임없이, 수많은 종류의 파이가 구워져 나왔다.

그중에는 사과도 있고, 고구마도 있고, 체리나 무화과도 있었으며 멧새, 소고기, 꿩, 양 등 고기 종류를 넣어 식사용으로 구운 것도 있었다. 개중에는 채소가 당기시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조각마다 서로 다른 소스를 끼얹은 채소찜을 넣고 구운 파이도 있었다.

만찬은 보통 식당에서 하게 되어 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황후의 방으로 모든 음식을 날라 오라는 에리히의 말에 시종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박 없이 명령을 따랐다. 아픈 척 침대에 누워 활줄이나 감고 있던 아르사크는 갑자기 은수레를 밀고 들어오는 시종들의 행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게 지금… 다 뭐지?”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오늘 저녁 식사는 폐하께서 마마의 방에서 하고자 하신다 하여 이쪽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아니, 식당을 놔두고 왜 여기서 저녁을 먹어?”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진짜 아파서 드러누웠다고 생각한 에리히의 배려인 것이다. 아르사크는 도로 나른한 시늉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애써 준비한 것은 미안하지만, 당장은 입맛이 없는데 어쩌나. 일단 차려둬. 폐하라도 식사를 하셔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연약한 황후 마마’의 모습에, 시종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조용히 테이블을 차리느라 애를 썼다. 그들이 식기까지 다 준비했을 때 마침내 에리히가 방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르사크를 보자 에리히는 곧장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겠어?”

“네, 폐하. 아무래도… 음, 열이 내려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나중에 먹겠으니 폐하께서는 먼저 식사를 하시지요.”

“파이라도 좀 먹어봐.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어떤 걸 먹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종류별로 다 구우라고 말은 했는데.”

그래서 저 많은 파이들이 있는 거구나. 아르사크는 테이블을 보면서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도대체가 이 남자는 정도를 모른다니까. 황제라서 그런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체 파이가 몇 개나 되는 건지, 눈으로는 미처 다 세기가 힘들 정도였다.

에리히가 파이 중 하나를 가지고 오라고 손짓했지만, 아르사크는 시종이 접시를 들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입맛이 당기지 않아요. 애써 만든 것을 버릴 수는 없으니, 아직 따뜻할 때 다른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나눠 주십시오.”

“그럼 뭐가 먹고 싶은데? 굶을 수는 없잖아. 굶는 건 안 돼.”

“뭐가 먹고 싶냐면…….”

아르사크는 잠시 고민하는 체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폐하께서 끓여주신 수프가 먹고 싶네요.”

에리히의 표정이 괴상하게 찌푸려졌다.

뜬금없이 수프? 아니, 수프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앞에 달린 조건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방금 뭐랬어? 내가 끓인 수프? 왜 하필?”

“그야… 폐하께서 아기의 아버지시니까요.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왠지 아버지가 끓여준 수프라는 걸 아기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오는 대로 막 둘러대면서도 아르사크는 태연했다. 여전히 약간 기운 없어 보이는 연기까지도 완벽했다. 자신이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의외로 연기에도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게 먹고 싶단 말이야? 솜씨 좋은 요리장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도?”

재차 확인하듯이 에리히가 물었다. 아르사크는 그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안 어울리는 짓까지 했음에도 에리히는 여전히 아르사크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왠지 기분이 묘하구나 싶었을 뿐이다. 아르사크가 갑자기 아픈 탓에 자신이 초조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진심으로, 폐하께서 끓인 수프가 먹고 싶습니다.”

“…알겠어. 기다려.”

에리히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르사크는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웬일이람?’

“잠깐만.”

그 순간, 몸을 홱 돌린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매가 미심쩍은 투로 가느스름해져 있었다.

“…지금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해.”

“그러신가요? 왜일까요?”

“말로 표현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이상해.”

“저는 폐하께서 왜 그런 기분을 느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앗, 또 열이… 폐하, 저는 좀 눕겠습니다.”

에리히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운 아르사크는 고개를 기울인 채 혀를 쏙 빼물었다. 당연히 에리히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리히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아르사크의 동그란 어깨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얼른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최고 요리장 두 명을 데리고 와. 제일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

외전 5. 요정의 요람 (3)

에리히는 정말로 수프를 끓였다.

물론 엉망진창이었다. 결과물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그야 요리장 두 명이 달라붙어서 식은땀을 흘려가며 속성 강의를 했으니까— 그 과정이라는 것이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요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금통과 설탕통을 헷갈려 하는 에리히를 보다 못한 요리장이 직접 만들어주겠다 나섰지만 에리히는 막무가내였다. 맛이 있든 없든 자신이 만들어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황제가 그렇다는데 감히 토를 달 수 있을 만큼 요리장들은 대담하지 못했다.

결국 매우 간단한 감자 수프가 탄생했다. 말이 감자 수프지 농도도 제대로 맞지 않고, 썰어 넣은 고기나 채소의 모양도 들쭉날쭉, 그나마 간을 맞추는 것만큼은 괜찮았다. 요리장 한 명이 목이라도 내놓을 비장한 기세로 이것만은 자신이 거들겠다고 우긴 것이 약간 먹힌 덕분이었다.

에리히는 그 수프 그릇을 직접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르사크는 최대한 천천히 일어나 앉아 그를 맞았다.

“정말로 직접 수프를 끓였어요?”

“그럼 가서 놀다 왔겠어?”

믿기지가 않아서 도무지 웃음을 참기 힘들었지만, 아르사크는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에리히는 적당히 식은 수프 그릇을 들고 아르사크의 옆에 앉았다. 먹으라고 쥐여줄 줄 알았더니, 의외로 스푼으로 직접 떠먹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몇 입 받아먹다가 말고 표정을 약간 찡그리며 고개를 물렸다.

당황한 것은 에리히였다. 곧장 그릇을 내려놓은 에리히는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아르사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맛이 이상해?”

“…아닙니다, 폐하. 마저 먹겠어요.”

“아니, 됐어. 이상하면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하지만 폐하께서 만드신 수프인데요.”

“먹지 말라면 먹지 마. 다른 게 먹고 싶지는 않나?”

이 남자 좀 보게?

속으로 악당 같은 미소를 띠면서, 아르사크는 있는 힘을 다해 아련한 표정을 지어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수박…….”

“뭐?”

“수박이 먹고 싶습니다.”

에리히는 어리둥절한 채 눈을 깜빡였다. 겨울은 다 지나갔지만 아직 봄이었다. 이 계절에 수박이 있을 리 없었다.

“아직 수박이 나올 계절이 아니야. 수박은 아무래도…….”

“사막 근처에서도 이따금 수박을 구할 수 있었어요. 모래는 뜨겁고 햇빛이 살을 태웠지만 다 같이 앉아서 수박을 잘라 먹으면 목이 마르지 않고 달콤했지요. 수박…….”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에리히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아르사크는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황궁에 있는 모든 식재 창고를 싹 뒤집어엎었지만 역시나 수박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튈브리크의 상인들과, 과일 도매업에 손을 뻗치고 있는 귀족가의 가주들까지 모조리 두들겨 깨웠으나 돌아온 대답은 하나같이 ‘이 계절에 나는 수박은 없습니다’라는 말뿐이었다. 에리히는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덜 익은 거라도 있을 것 아니야.”

“폐하, 안 됩니다. 임산부에게 덜 익은 과일은…….”

“그럼 수박 비슷한 거라도 없나 찾아봐.”

시종장은 시선을 두리번거리다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오이가 들려 있었다.

에리히는 그것을 반으로 뚝 분질러버린 뒤 서재의 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고 밖으로 나갔다.

결국 수박을 구하지 못했다는 에리히의 말을 듣는 내내 아르사크의 허벅지는 이불 밑에서 혹사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 힘껏 꼬집어야 했던 것이다.

불쌍하니 오늘은 이쯤 괴롭힐까 싶었지만, 일부러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면 두 번 다시 오늘처럼 놀아나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며칠 못 가 들키고 말 일, 이왕이면 들킬 때까지는 실컷 놀려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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