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마마, 여자들이 혼인을 한 후 가장 의기양양해지는 때가 바로 아이를 가졌을 때랍니다. 그것도 첫 아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렇지요. 게다가, 출산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온전히 어머니, 여자가 감내해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며 한편으로는 고통입니다. 남자들은 단지 초반에 약간 거들기만 했을 뿐, 배 속에 품어 기르고 낳는 것은 부인의 몫이죠.”
에셴이 아르사크를 말려줄 것이라 기대하고 희망찬 표정을 짓고 있던 로즈안나는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문득 이유도 없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죽 흘렀다. 갑자기 흥미진진해진 것 같은 아르사크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에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이 웃었다. 더없이 고상한 귀부인의 자태 그 자체였으나, 그다음에 튀어나온 말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 마마, 언제든 하실 수 있는 승마는 지금 잠시만 참으십시오. 그 대신 감히 이 나라의 황후 마마를, 열 달 동안이나 말도 마음껏 타지 못 하시도록 만든 장본인을 말 대신 부리시면 되겠습니다. 마마께서 첫 황손을 회임하셨으니 어느 누가 마마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아르사크의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뒤이어, 건강해 보이는 캐러멜빛의 뺨이 도무지 참지 못하는 즐거움으로 실룩이며 솟구쳤다.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로즈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싸쥔 채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폐하,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이 두 분을 말리는 게 역부족이네요.’
외전 4. 요정의 요람 (2)
“뭐? 황후의 몸이 좋지 않아?”
의전장관을 비롯한 귀족들과 회담을 마치고 나온 에리히는 시종장이 전한 소식에 들고 있던 서류 묶음을 바닥에 패대기칠 뻔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테오도르가 다급히 에리히의 손에 있던 서류를 가져갔지만, 에리히는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불쌍한 시종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대답할 엄두도 못 낸 채 허리를 구부렸다.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 건지 세세하게 고하라.”
에리히의 목소리는 패악을 부리던 어린아이도 질려서 입을 다물 만큼 냉랭했다. 시종장은 주체가 안 될 만큼 뻘뻘 흐르는 땀을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화, 황실의 치료사들이… 지금, 진찰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고, 곧 다시 기별이…….”
“테오도르, 내 서재에 회담 기록을 가져다 둬라. 황후를 만나보고 와서 마저 처리할 테니.”
“알겠습니다, 폐하.”
테오도르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에리히는 이미 복도를 내달리다시피 하며 멀어지는 중이었다.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모두 급한 사안들뿐이었지만, 에리히더러 차마 가지 말고 일부터 하라며 말릴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성질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다른 일도 아니고 아르사크가 아프다고 하는데 일을 하라며 붙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로즈안나였다면? 자신의 아이를 가진 로즈안나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테오도르는 당장 입궁하라는 에리히의 명령이 있어도 로즈안나부터 살피고 갈 것이었다.
시종장은 에리히가 사라진 후임에도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늘 쩔쩔매면서도 자신이 맡은 일을 저버리지 않는 충성스러운 자였다. 테오도르는 안쓰러운 마음에 시종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황후 마마께서 언제부터 편찮으셨나?”
“그… 그게,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지셨다는 것 같습니다. 황후궁으로 치료사들이 불려갔는데, 황후 마마께서 열이 오르고 손발이 차가워진다 하셨다고…….”
“이상하군, 때늦게 감기에라도 걸리신 것인가? 그럴 분이 아니신데. 잔병치레 한번 없으시던 분이 어째서…….”
“호, 호, 혹시 화, 황후 마마나 황손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말게.”
테오도르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시종장은 어깨를 퍼뜩 움츠리며 곧장 사죄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도 그의 걱정 자체를 헛소리라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임신한 여성을 가까이에서 대해본 일이 없었다. 테오도르 밑으로도 동생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렸을 때라서,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누나인 에셴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일찌감치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고 했고, 로즈안나는 아직 임신한 적이 없다. 따라서 아이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테오도르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기본적인 지식 이외에는 아는 게 전무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임산부들이 거동이나 음식에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았다. 아르사크로 말하자면 음식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동을 조심하는 일이라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혹시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테오도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리히가 달려간 복도 끄트머리를 바라보다 서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 무렵, 황후궁 앞에 도착한 에리히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해 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즈안나였다. 이제 시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시중을 들기 위해 매일 아침 황궁으로 와 저녁이 되면 운트겔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유레나의 놀이 동무로 왔던 때부터 황궁은 로즈안나의 집이기도 했으므로 불편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로즈안나는 에리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편한 표정을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궁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아르사크를 보러 가려는 에리히의 앞을 가로막은 로즈안나는, 황후께서 두통이 심하시어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간략한 말을 전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두통의 원인이 뭐라더냐?”
그나마 가로막은 사람이 로즈안나였으므로, 에리히는 최소한의 이성과 인내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로즈안나는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폐하.”
“치료사랍시고 있는 자들은 대체 뭘 하는 것들이기에 머리가 아픈 이유도 밝혀내지 못한다는 거지?”
“폐하, 어세를 낮추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황후 마마께서 짧은 오수에 드셨습니다. 그러니…….”
“잠시 잠든 얼굴만 보고 가겠다. 로즈안나, 너는 이만 돌아가거라. 테오도르가 서재에 있을 것이니, 그의 일이 끝나면 둘이 함께 돌아가도 좋다.”
“폐, 폐하.”
에리히가 막 문을 당겨 열려는 순간, 로즈안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는 에리히의 표정에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기색이 슬슬 드러나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그를 더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하긴,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는데 에리히를 더 말려 뭣 하겠는가.
‘한 번만 더 이런 일을 시키시면 그때는 정말 울어버릴 테야.’
“얘기해라. 짧게.”
“…아닙니다. 그… 아르사크 님의 기분을… 잘 살펴주십시오.”
“언제는 안 그랬다고.”
“…좀 더, 잘… 살펴드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폐하, 평안하시옵고 내일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로즈안나는 치맛자락을 펼쳐 절을 한 뒤 총총히 떠났다. 에리히는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지 못해 잠시 어리둥절했다.
언제는 자신이 황후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아르사크를 대하는 에리히의 태도가 무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로즈안나인데, 이제 와서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에리히는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아르사크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아르사크가 워낙 잔병치레도 없이 튼튼한 편인지라,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도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정말로 아픈 것 같아 보였다.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누워서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에리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에리히는 당장이라도 침대 쪽으로 달려갈 것처럼 발끝을 움찔했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갑자기 안 어울리게. 대낮부터 이불이나 쓰고 누워있다니 무슨 일이야?”
“폐하… 오셨군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 순간 에리히는 기묘한 위화감이 어깨를 콱 짓누르는 듯한 기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르사크답지 않았다.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있던 손바닥이 살짝 미끄러진 순간, 에리히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지 못하고 뛰어가 아르사크의 몸을 받치듯이 안았다. 품 안에 끌어안다시피 한 채 이마를 짚자, 정말로 이마가 따끈따끈했다. 미열이 오른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치료사들은 뭐라고 말했어?”
“아뇨, 그냥… 별일 아니라고 하더군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아? 일어나 앉는 것도 겨우 하는 주제에 여전히 입은 살았군. 약은 먹었고?”
“아기가 있어서 약을 쓸 수 없어요, 폐하. 함부로 약을 먹었다가 배 속의 황손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곧장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에리히는 여전히 납작하고, 임신의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는 아르사크의 배를 생경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아기. 그렇다. 저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이다.
아직 눈으로는 확인할 수조차 없는 아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앞으로 출산까지 아파도 약조차 제대로 쓸 수 없고,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도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걷거나 달리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에리히는 갑자기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아르사크의 발목을 족쇄로 붙들어놓은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필요한 건 없습니다. 아, 그렇지… 아뇨, 한 가지… 먹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데? 말해. 곧 가져오라고 할 테니.”
아르사크의 어깨를 쓰다듬는 에리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하게도 들렸다. 이제는 평소에도 대체로 부드러운—에리히치고는 꽤— 말투를 쓰게 되었지만, 이토록 걱정스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일은 정말이지 흔치 않았다. 아르사크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혀까지 깨물며 겨우 말했다.
“정말 맛있는… 파이가 먹고 싶습니다, 폐하.”
에리히는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맛있는 파이? 그게 어떤 파인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꿈처럼 맛있는 파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그걸 꼭 먹고 싶습니다.”
“아니, 무슨 파이인지 제대로 얘기를 해야 가져다줄 것 아니야. 사과 파이든 레몬 파이든, 아니면 메추라기 파이든.”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 폐하. 저는 머리가 아파서… 이만 좀 눕고 싶네요.”
에리히에게 기대어 있던 아르사크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에리히는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얼른 아르사크를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주며 말했다.
“쉬고 있어. 저녁때 먹을 파이를 만들라고 할 테니까.”
“정말 맛있는 파이여야 해요, 폐하.”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한 번 더 이상한 위화감이 어깨 너머를 슬그머니 지나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구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