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르사크는 티리야와 다른 부족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지우고, 무겁던 옷을 갈아입고, 향유와 꽃으로 단장한 뒤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방의 입구에는 혼례를 올릴 때 참관했던 두 노인이 계피를 우려낸 물과 소금이 든 그릇을 각각 들고 서 있었다.
아르사크는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새끼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 입술 위에 살짝 바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들은 위쪽으로 둘둘 말아놓았던 세 장의 휘장을 발처럼 늘어뜨려 입구를 막은 뒤 바깥으로 물러났다.
에리히는 등을 돌린 채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유르트의 양쪽 벽을 따라 켜진 네 개의 양초가 아르사크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린다. 두꺼운 천 위에 드리운 그림자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에리히가 고개를 돌려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비단으로 된 흰 자리옷만을 입은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혼례복 차림보다 그 옷이 더 잘 어울리시네요, 폐하.”
“잠옷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요.”
“아까는 안 어울렸다 이건가?”
“좀 웃기긴 했죠.”
아르사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문득 장미 향기가 났다. 그 순간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아르사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쓰러지듯이 에리히의 품으로 뛰어든 아르사크는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에리히의 뺨을 스쳤다. 맞닿은 몸이 한꺼번에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진 입술 사이로 오가는 호흡과, 서로 맞닿은 채로도 쉼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똑같았다. 아르사크의 호리낭창한 허리를 감싸듯이 안은 에리히가 말했다.
“또 팔씨름이나 하자고 덤빌 거면 지금 말해.”
“왜요, 하고 싶으세요?”
“웃기지 마.”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밑에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올려 아르사크의 입술을 콕 깨물었다. 겹쳐진 몸이 들썩이듯이 움직이고, 살갗에 천이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윽고 다른 소리로 바뀌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리던 불꽃이 한순간 환하게 타오른다. 에리히의 어깨를 끌어안은 아르사크가 뭐라고 속삭이자, 한순간 에리히는 입술을 움츠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몸을 기울여 아르사크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러게, 내가 두고 보자고 말할 때 믿었어야지.”
외전 3. 요정의 요람 (1)
“아르사크 님, 제발.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말씀을 거두어주세요.”
그것은 희귀한 광경이었다. 건너편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시녀들조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도 잊고 황후가 있는 방 근처를 서성거리며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 물론 그 기웃거림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너희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썩 자기 일들이나 하러 가지 못해?”
젊은 나이의 시녀장이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윽박지르자 시녀들은 작은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흩어졌다. 그러나 개중에는 호기심이 위기감을 능가하는 맹랑한 아이들이 꼭 하나둘 있게 마련이었다.
“마티타 시녀장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로즈안나 님의 목소리가 맞지요?”
아직 콧잔등의 주근깨도 다 가시지 않은 어린 시녀가, 썩 일하러 가라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질문을 해오자 마티타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어렸을 때 저랬거니 하는 생각을 하니 다른 시녀장들처럼 매섭게 혼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기강을 흩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황후 마마께서 선물로 받은 원석을 깨트리고 곧 쫓겨날 것이라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때, 아랫사람의 명백한 부주의에도 불구하고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던 황후 마마를 이제는 시녀장으로서 모시는 마티타였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두 번 다시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로라 빈. 네 이름을 내가 알고 있지. 네가 정원의 고양이처럼 호기심이 많다는 것도 말이야. 하지만 잘 들으렴. 마음껏 호기심을 발휘해도 좋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어. 황후 마마의 처소는 당연히 후자야. 내 말 알아듣겠니?”
아직 소녀에 불과한 로라는 시녀장인 마티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후다닥 고개를 숙이며 들고 있던 화병을 껴안고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마티타는 한숨을 쉬면서 방 안의 동태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그녀 역시도 궁금했던 것이다. 이제는 황궁 시녀의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인물인 로즈안나 님이 대체 무슨 이유로 아르사크에게 저렇게까지 애걸복걸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티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마티타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등 뒤에서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돌린 마티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랜크버 백작 부인 오셨습니까.”
“시녀장이라면 밑의 아이들을 통솔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에셴도 마티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 시녀장이 아닐 무렵, 아르사크의 시중을 들던 아이들 중 가장 웃음이 많고 발랄하던 소녀였다. 황궁 시녀라기에는 너무 경박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모시는 상관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사크였으므로 그 정도의 활발함이 딱 적당했다. 매사 밝고 긍정적인 면도 좋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에셴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데에 가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에셴은 마티타처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일러주려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마티타도 이제 더 이상은 철없이 활달하기만 한 시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가 잠시 본분을 잊고 무례하였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백작 부인.”
“우리 황후 마마께서 오늘은 또 무엇으로 우리 올케의 가녀린 신경 줄을 괴롭히시는지 어디 구경 한번 해볼까?”
농담하듯 중얼거린 에셴은 시종들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문을 밀어 벌컥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왠지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사크와, 그 옆에서 아르사크의 무릎을 붙든 채 통사정을 하고 있는 로즈안나의 모습이 보였다.
로즈안나는 갑자기 열린 문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더니, 들어온 사람이 에셴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에셴은 가벼이 절을 하고 로즈안나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르사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지만,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마뜩잖은 기색은 남아있었다.
에셴은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분위기나 표정을 보면, 그 표정 뒤에 숨은 뜻도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족 사회에 깊숙이 발을 들이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눈치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윗사람을 대할 때는 더더욱이나. 상대가 자신의 기분을 알고 짚어주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적당히 모르는 체하며 다른 재치 있는 말로 상황을 바꾸어주기를 바라는지 재빨리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이었다.
‘비록 황후 마마 앞에서는 쓸 일이 없는 능력이었지만.’
아르사크는 기분 표현에 솔직했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다른 귀족들과도 곧잘 독대를 하거나 다과를 함께하게 되었으면서도, 궁정이나 귀족 가문의 살롱에서 으레 그러듯 교묘하게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셴은 아무런 부담도 없이, 마치 친구에게 안부를 묻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아르사크를 보며 말했다.
“마마, 어째서 언짢은 표정을 짓고 계시는지요?”
“로즈안나가 말을 타러 가면 안 된다고 난리법석이야.”
아르사크가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던 에셴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사이 로즈안나는 또 한 번 바닥에 엎드려 울기라도 할 기세로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절대로 안 됩니다. 아르사크 님, 제발 몸을 생각하세요. 홀몸도 아니신 데다가 아직 안정기로 접어들지도 않았는데 승마라니요! 그러다 황손께서 어찌 되기라도 하시면 그걸……!”
“글쎄 잘못되지 않는다니까? 우리 어머니도 나를 가지셨을 때 말을 타셨을 거야. 토르갈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한다고.”
“아르사크 님께서는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 다니기만 하시지 않잖아요! 마구 달리시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어휴, 잔소리꾼! 백작 부인, 그대의 올케 좀 말려봐요.”
아르사크가 이마를 짚는 시늉을 하며 손짓을 하자 로즈안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반응은 마치 홀드빅 남작을 대할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아르사크에게는 첫 아이였다. 또한 그 아이는 황실의 자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태평하게 말이나 타러 가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지 로즈안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건강한 몸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면서 처음 아이를 가져본 것인데 어쩌면 이렇게 태연하실 수 있는 걸까?
로즈안나는 제발 좀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짓을 에셴에게로 보냈다. 에셴도 로즈안나가 아르사크와 태아의 건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 역시 승마는 반대였다.
많은 귀부인들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극도로 조심하며 생활과 활동의 반경을 좁히기에 급급했다. 몸이 약하거나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아예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조심하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주의는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황후와 황손이 아닌가.
“황후 마마, 저도 로즈안나의 생각에 동감입니다.”
에셴의 말에 로즈안나와 아르사크의 표정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아르사크는 ‘어떻게 너마저…….’라는 표정이었고, 로즈안나는 ‘과연 믿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서로 상반되는 두 여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에셴은 시녀가 새로 가져온 찻잔을 우아한 태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는 지금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계십니다.”
아르사크는 의아한 눈으로 에셴을 바라보았다. 말도 마음대로 타지 못하는 판에 절호의 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란 건 언제든지 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그러하신지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든… 탈 수는 있지.”
“하오나 마마, 첫 아이를 임신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르사크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회임이라는 것을 안 것이 불과 한 달여 전이었는데, 알기 전이나 알고 난 후로나 여전히 몸에는 별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첫 아이는 원래 배가 늦게 부르는 법이라고도 했지만, 원래 아르사크의 몸 자체가 잔근육도 많고 병약하게 가는 편이 아니어서 아이를 가지고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남들이 옆에서 끝도 없이 ‘황손’, ‘황손’하고 떠들어대지만 않았던들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조차도 깜빡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백작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