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말을 마친 아르사크는 신부 의상의 풍성한 소매 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끈으로 된 입구를 풀어 열자 그 안에서 대대로 족장에게 물려 내려오는 반지와 목걸이가 나왔다.
양의 뼈와 붉은 돌, 은으로 된 장식이 달린 아주 오래된 물건이다. 대대로 족장이었던 하르슈 집안의 가보였다. 아르사크가 반지를 끼워주려 하자, 티리야는 기겁한 표정으로 손을 쑥 잡아 뺐다.
“아르사크, 난… 난 못해요. 난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 넌 할 수 있어. 너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래도 이런 일은 다들 동의해야…….”
“이미 동의했어.”
아르사크의 대답에 티리야는 아까보다도 더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손을 멈췄다. 아르사크는 티리야의 오른손 엄지에 반지를 끼워준 뒤, 이윽고 몸을 기울여 목걸이도 걸어주었다. 얼떨떨한 채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는 티리야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앞으로는 네가 토르갈을 지키는 거야. 족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족민의 안전과 번영이 최우선이어야 해. 알고 있지?”
“…아르사크, 난…….”
“넌 충분히 자격이 있어. 너만큼 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 없으니까.”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티리야를 돌본 아르사크였다. 티리야에게 족장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부족민들의 의사를 묻기 위해 찾아다닐 때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가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사크의 생각대로, 그녀의 뒤를 이어 티리야가 족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했다.
아직도 글썽거리는 눈물을 그대로 눈꼬리에 매단 채 훌쩍이는 소리를 내던 티리야가 말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황제가 그렇게 좋아요?”
그러자 아르사크는 짓궂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좋아해. 하지만 비밀로 해줘. 알게 되면 우쭐거릴 테니까.”
아르사크의 표정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티리야는 더 이상의 원망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언니였고, 어머니였고,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아르사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만족은 없었다.
눈물을 닦은 티리야는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화장 도구를 가져다 아르사크와 자신의 사이에 놓았다. 티리야가 가느다란 붓끝에 먹을 묻히자, 아르사크는 웃는 얼굴인 채 눈을 감았다.
외전 2. 족장과 신부 (2)
“카른! 얼른 와요! 얼른!”
“루이제… 조심해요! 미끄러지겠습니다!”
“아이참, 괜찮다니까요. 얼른요! 앞에 앉고 싶단 말이에요!”
앞에 앉으나 뒤쪽에 앉으나 어차피 비슷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던 카른은 한숨처럼 웃으며 순순히 걸음을 빨리했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랐는지 아버지의 옷깃을 꽉 붙잡고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루이제를 닮은 금발이 보드랍게 덥수룩한 남자아이였다.
“에이벨, 신기하니? 여기가 자치구라는 곳이란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는 곳이지.”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옹알이하듯 서툰 말을 하는 아들을, 카르반테는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루이제는 넓은 융단이 깔려 있는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카른! 이쪽이에요!”
융단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음식이 하나 가득 차려져 있었다. 손님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면서 데운 양젖으로 끓인 차를 권하거나, 어색해하는 사람들에게 먹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꼭 피크닉 같지 않아요?”
루이제가 들떠서 말했다. 아들인 에이벨이 벌써 두 살이 되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발랄한 소녀처럼 해맑은 데가 있었다. 카르반테는 자꾸만 품에서 내려가려는 아들을 무릎에 앉힌 채 음료에 적신 과자나 과일 같은 것들을 집어주었다.
“랜크버 백작 부부께서도 초대장을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루이제도 알고 있었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사실 마마께서 초대장을 보내실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요. 뭐, 난 당연히 초대를 받을 거라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마마랑… 꺅!”
“너는 마마랑 뭐?”
루이제는 놀란 눈을 깜빡이다가 화들짝 일어났다. 신부 의상을 입고 있는 아르사크를 순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화려한 자수와 붉은 천, 그리고 낯선 화장이 아르사크를 무척 아름답고 박력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마… 마마!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신부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어요?”
“그야 내 마음이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요, 메르로 경.”
카르반테도 루이제를 따라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는 황후에게 하듯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에이벨, 황후 마마께 인사를 드리렴.”
에이벨은 조그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배 위에 어설프게 모으고는 허리와 무릎을 동시에 굽히면서 엉덩이는 뒤로 쭉 빼고 인사를 했다. 아르사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이벨과 루이제를 번갈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맙소사, 루이제. 정말로 네가 낳은 아들이니?”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제가 낳았지요!”
“말도 안 돼, 세상에나. 두 살짜리가 어떻게 엄마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지?”
“마마!”
루이제가 부아가 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르사크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에이벨을 안아 들었다. 낯선 사람에게 안겨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빠와 엄마를 돌아보다가, 아르사크의 목에 달린 장식 구슬들이 궁금한지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구슬…….”
“갖고 싶니?”
“에이벨, 구슬…….”
에이벨이 서툴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발그레하게 홍조가 떠오른 통통한 뺨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만지작거리고는 카르반테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멀리까지 오느라고 어린애가 힘들었겠는걸.”
“에이벨은 카른을 닮아서 튼튼하니까 괜찮아요.”
“널 안 닮기 천만다행이지 뭐니.”
“마마! 저도 닮았어요! 제가 엄마라고요!”
아르사크가 씩씩대는 루이제를 실컷 놀려주고 있을 때, 다른 마차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의상을 차린 귀족들은 생전 처음 보는 결혼식 풍경에 놀라고, 2년 만에 보는 아르사크의 모습에는 더 놀란 것 같았다.
초대를 받은 귀족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들 중에서 신관인 듀터스의 모습을 찾아낸 루이제는 깜짝 놀라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마마, 최고 신관이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초대를 받았으니 왔겠지?”
“마마의 결혼을 축하하러 왔다고요? 저 무서운 분이?”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마, 마음에 안 들다뇨! 그게 아니라 너무 뜻밖이니까 그렇죠.”
“내가 친구가 좀 많아.”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걸려드는 루이제는 또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종알거렸다. 아르사크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에이벨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로즈안나는 식이 진행되는 유르트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느라 운 것인지, 아니면 도착해서 운 것인지 눈 아래의 화장이 약간 번져 있었다.
자치구로 온 이후 로즈안나는 몇 번이나 아르사크를 만나러 왔었지만, 정말로 에리히와 다시 결혼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아르사크에게 있어 부족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로즈안나였기 때문이다.
“로즈.”
“아르사크 님!”
루이제가 그랬던 것처럼, 로즈안나도 밖에 나와 있는 아르사크를 보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다음의 반응도 비슷했다. 잠시 낯선 사람을 보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즈안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저도 모르게 아르사크의 양손을 맞잡았다.
“아르사크 님…….”
“왜 울고 그래.”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눈가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잠깐 동안 그녀를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테오도르는? 폐하와 같이 있는 거야?”
로즈안나는 얼른 얼굴을 손끝으로 두드려 눈물 자국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오실 거예요. 부족의 다른 분들이랑 같이요. 아르사크 님, 정말로 돌아오시는 거지요?”
“그래, 돌아가. 네가 여기 올 때마다 그 얘길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모른 척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아르사크 님께…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고 있어요. 만약 폐하의 청혼을 거절하셨더라도 저는 이해했을 거예요. 아르사크 님이 돌아오신다는 소식에 기뻐서 잠을 못 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요.”
“이제부터는 티리야가 부족을 이끌 거야. 내가 없어도 잘 해내겠지.”
“티리야가요? 정말 잘됐네요.”
로즈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바깥에서 신랑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아르사크를 잡아끌었다. 행렬이 이미 오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르사크는 유르트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난 여기 있을래.”
사람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행렬의 선두가 이미 하객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토르갈 부족민과 제국의 귀족들이 여기저기 섞인 채로 함께 서서 말 위에 앉은 에리히를 향해 놀림 섞인 환호를 보내고 박수를 쳤다.
아르사크는 혼례를 치르는 유르트 앞에 선 채 말을 타고 오는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신랑을 데려온 사람들도 아르사크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 않은 것은 에리히 하나뿐이었다. 손목을 묶은 천이 풀리자, 에리히는 말에서 내려 아르사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에리히가 말했다.
“대체 누가 신부야?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설레어서 얌전히 기다릴 수가 있어야죠.”
“왠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인데.”
“잔말 말고 빨리 날 들어 안아요. 그러지 못하면 남자 구실도 못하는 취급을 받을걸요?”
“아니라고 대놓고 증명할 길이 없어 유감이군.”
그렇게 말한 에리히는 아르사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둘이서 뭐라고 속닥거리는지 들을 수 없어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환호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에리히의 목을 안고 있던 아르사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려놔도 되거든요.”
“남자 구실은 한다고 증명 중이라서.”
“여기서 힘 다 빼고 정작 증명해야 될 땐 못하는 게 아니고요?”
“나중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지.”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더라.”
혼례가 치러지는 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한 남녀 두 사람이 참관하는 자리에서,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예식을 치르고 유르트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축하하는 한편 웃으며 먹고 떠들고,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느라 왁자지껄했다.
밤이 되었지만 몇몇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돌아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본래 결혼을 하게 되면 신랑이 사흘 동안 신부의 집에서 머무는 것이 원칙이어서, 에리히도 사흘은 자치구에 머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