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84화 (184/191)

184화

외전 1. 족장과 신부 (1)

토르갈 자치구에서는 결코 거슬러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여자가 있다.

먼저 토르갈 부족의 족장인 아르사크 하르슈가 첫 번째 인물이다. 분쟁이 생기면 말로 길게 협상을 하는 것보다 실력 행사가 훨씬 더 빠르고 간편하다고 생각하며, 성격이 불같아서 토르갈을 얕보거나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고, 더불어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무르지 않는 단호함 때문에 부족민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따르는 한편 두려워했다.

그다음으로 거슬러선 안 되는 인물은 아르사크와 무척 가까운 관계에 있는 티리야라는 소녀다. 아르사크보다 나이도 어린 데다 하르슈 집안과 혈연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어린 티리야를 아르사크가 친동생처럼 보살펴주기 시작하면서 명실공히 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티리야 역시 성격은 아르사크에 버금갈 정도로 불같고, 고집도 세며, 타협을 몰랐다. 심지어 족장인 아르사크마저도 티리야와는 별로 다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하는 말이라면 말에 양털이 돋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아르사크를 잘 따르는 티리야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아르사크의 행동들이 몇 가지는 있었다.

아르사크가 카툴라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치구로 돌아오게 되면서 일단락되는 것 같았으나 지금, 바로 이 순간, 티리야는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해 결국에는 칼을 들고 말았다.

“야, 티리야! 너 그거 조심해야 해! 내가 한다니까!”

“조심은 너나 해, 알린.”

“인마!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거든!”

“아, 그러세요?”

높이 치켜들었던 칼이 휙!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그와 동시에 두툼한 양의 뒷다리가 철썩 떨어져 나왔다. 티리야는 짜증스런 한숨을 몰아쉬며 구부렸던 허리를 펴 온통 피칠갑인 뜰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양을 잡느라 바닥에 놓아둔 대야마다 살코기와 내장, 뼈 같은 것들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티리야, 너 양 잡아? 세상에, 이쪽에 와서 우리랑 다른 거 하자!”

“그래! 만두 빚자!”

“됐어, 난 이게 더 나아.”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반죽한 밀가루와 소를 들고 지나가다가 칼을 휘두르는 티리야의 모습에 움찔하고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티리야는 제 몸보다 더 커다란 양 한 마리를 단도 한 자루만으로 능숙하게 해체하고, 고기를 담아놓은 무거운 대야를 들고 뒤뜰로 돌아갔다.

노인들과 젊은 어머니들, 티리야보다 좀 더 어린 소녀들까지 주로 여자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곡식을 찧고, 만두를 빚느라 바빴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화덕에 무쇠솥을 걸어놓고 남자들 몇 명이 모여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삶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정착 후 2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하며 조용하고 도란도란 지내오던 토르갈 자치구가 삽시간에 떠들썩해진 것은 에리히 때문이었다.

‘뭐라고요, 청혼을 해?’

‘황제가 진짜… 족장님한테 다시 청혼하려고 그 바보 같은 꼴을 하고 왔던 거란 말이에요?’

누군가는 아르사크가 이미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족장으로 돌아왔는데 또 청혼을 하러 오는 것이 뻔뻔하다고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황제씩이나 되는 자가 이번에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청혼을 했으니 기특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어느 쪽 의견을 지지하든, 마을에서 쫓겨난 죄인 같은 꼴로 손목을 묶은 채 터덜터덜 오는 모양이 향후 십 년은 없을 우스운 구경거리였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티리야,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주렴.”

대야를 내려놓은 티리야는 얼른 잔타르 할머니 쪽으로 뛰어갔다. 잔타르는 부족 안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드는 사람인지라 평소에는 대체로 실내에만 있었는데, 아르사크의 혼례 잔치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새벽같이 달려 나와 힘든 기색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었다.

“잔타르 할머니, 들어가서 좀 쉬세요. 허리도 아프시다면서.”

내장이 뽀얗게 되도록 씻어놓은 물을 배수로에 가져다 버리고 돌아온 티리야가 말했다. 그러나 잔타르는 합죽한 입을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족장님의 혼사인데 내가 당연히 거들어야지. 젊은 애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영 믿음이 안 간다니까.”

“…어차피 이렇게 준비해 봐야 이 나라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않을걸요, 뭘.”

“어떤 손님이 오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바로 잔치 준비란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티리야는 겨우 참아 눌렀던 심술이 다시 가시처럼 돋치는 기분에 입술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중 몇몇은 어쨌든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는 반응이었지만, 티리야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르사크가 자치구로 돌아온 이후, 티리야는 그녀가 두 번 다시 부족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아르사크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아무튼 티리야는 아르사크가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당장 그날부터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다시 한번 혼례를 치르고 싶다는 것은 에리히의 의견이었다. 처음에는 굳이 그럴 필요야 있겠냐는 반응이던 아르사크도 무슨 계기로 마음을 바꿨는지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 외따로 떨어진 호젓한 지역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던 자치구가 한순간에 시장통처럼 떠들썩해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혼례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손님 맞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부터 보통 큰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부족민 전체가 동원되어 몇 날 며칠에 걸쳐 준비를 하고, 혼례 당일에는 새벽같이 양을 잡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애초에 초대한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오늘은 오히려 다들 느긋한 편이었다. 진짜 바빴던 것은 요 한 달 사이였다.

‘혼수를 다시 준비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요, 족장님! 혼례복은 지어야죠!’

마을에서 바느질을 좀 한다 싶은 사람들은 온종일 혼례복을 짓는 일에 매달렸다. 아르사크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결코 타협하지 않을 자세로 버티는 바람에, 결국 아르사크가 한발 물러나고야 말았다.

“티리야, 곧 손님들이 올 텐데 아르사크 님은 괜찮으신지 네가 좀 가봐.”

해체한 양을 짊어지고 온 알린의 말에, 티리야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온통 북적거리고 흥얼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도 슬슬 속이 꼬였던 참에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아르사크.”

아르사크는 유르트 안에 있었다. 화려한 자수가 가득 놓인 붉은 혼례복을 입은 아르사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티리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티리야?”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르사크, 신부 화장은요?”

“나중에 하지, 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원래 신부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아니에요? 아주 어렸을 때 구경한 결혼식에선 그랬는데.”

“답답해서. 이쪽으로 좀 오렴.”

티리야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발끝을 움츠렸지만 다가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등 뒤로 걸린 장식용 융단의 울긋불긋한 화려함도 지금은 별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르사크는 티리야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반드시 이곳에 머물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사크가 스스로 자치구로 돌아왔을 때부터 티리야뿐만이 아니라 부족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르사크가 아닌 누군가 새롭게 족장이 된다는 것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티리야는 복잡한 얼굴로 아르사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와, 티리야.”

티리야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아르사크에게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신부 의상의 옷깃 속에 숨겨놓은 향낭에서 풍기는 쌉싸래한 단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르사크는 강아지에게 으레 그러듯이 한쪽 손을 펼치며 손을 내밀어보라는 눈짓을 했다. 티리야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살짝 올리자, 아르사크는 미소를 띠면서 티리야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결혼해 버려서 화난 거야?”

대답이 없다. 그러나 정곡을 찔렸다는 것은 티리야의 표정만 봐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아르사크는 티리야를 탓하지 않았다. 그 대신 빙긋이 웃으면서 손을 꼭 잡기만 했다. 신부 의상의 장신구들이 잘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티리야.”

“꼭 결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울먹임 같은 소리가 퉁명스럽게 툭 튀어나왔다. 아르사크의 손을 뿌리치지도, 맞잡지도 못한 채 티리야는 열이 오른 이마와 눈살을 마구잡이로 찡그렸다.

“아르사크가… 아르사크가 계속 혼자 살기만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난… 아르사크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기쁨이 기다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행복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걸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티리야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커다란 구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티리야는 차마 그것을 닦지도 못했다.

슬픈 것인지, 서운한 것인지, 화가 나고 분한 것인지,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어떻다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르사크가 왜 이 결혼을 선택했는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닌, 아르사크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티리야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카툴라 제국이, 황제가, 저 에리히라는 남자가 아르사크를 억지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마음껏 화를 낼 수 있을 테니까. 티리야는 아무리 해도 아르사크를 미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들어봐, 티리야.”

아르사크는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티리야의 손을 꽉 잡았다.

“여기서 내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건 틀린 생각이야. 난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게 무엇보다도 뿌듯하고 행복해. 티리야, 나는… 너희들을 떠나는 게 아니야. 부족을 잊어버리는 일도, 버리는 일도 없어. 누군가 억지로 등을 떠밀어서 이 결혼을 선택한 것도 아냐. 나는 이곳에 온 이후로 행복할 수 있는 선택만 했어. 너희들 모두와 함께.”

“그렇지만 아르사크가 없으면… 아르사크가 없으면 이제 토르갈을 이끌고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네가 있잖아.”

티리야는 놀란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농담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빙그레 웃고 있는 아르사크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르사크,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내 뒤를 이어서 네가 족장이 되는 거야. 이제부터는 네가 부족을 지키고 이끌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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