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이거 말인데.”
에리히가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목에는 수개월 전에 아르사크가 매어주었던 실팔찌가 아직도 그대로 감겨 있었다.
“돌려줄까?”
느닷없고, 조금은 어린애 같은 질문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아르사크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에리히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강물이 이쪽으로 자꾸만, 빠르게 흘러오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 가지세요.”
“잃어버리면 나라 하나 팔아도 못 살 만큼 비싸다면서?”
“그러니 가지시라는 거지요. 그 정도의 선물은 남겨드리고 싶으니까.”
“가져가는 건 적고, 남기는 건 너무 크군.”
에리히는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에 탄 아르사크는 정말로 아무런 짐도 없이, 아무것도 가져가는 것 없이, 오로지 혼수로 받은 세 가지만을 가지고 황궁을 나섰다.
그녀가 부탁했던 대로 아무도 배웅을 하러 나온 사람은 없었다. 왔을 때와 달리, 아르사크가 떠나는 길은 조용했다. 숲으로부터 산길을 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길로 그녀는 천천히 멀어졌다.
에리히는 별궁의 맨 꼭대기에서 아르사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창의 아래에 한두 개씩 덧대어진 색유리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바닥 위로 아름다운 무늬를 새긴다. 아르사크의 옷깃 앞섶에 놓여 있던 자수처럼, 알록달록한 색깔들이었다.
떠나는 아르사크의 머리 위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오래된 예언처럼 빛을 받으며, 한때 카툴라의 황후였던 아르사크는 자신을 그토록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 * *
―2년 후, 토르갈 자치구.
“야, 우르딘! 너 자꾸 게으름 부릴 거야? 가만 안 둬!”
“좀 봐줘, 티리야 누나! 오전 내내 일했다니까. 정말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침에 해 뜨자마자 거기 누워서 하루 종일 피리나 분 주제에 뭐가 어째? 빨리 일어나지 못해!”
“으악! 알린 형, 알린 형! 티리야 누나가 날 죽이려고 해!”
호들갑을 떨며 달아난 소년의 뒷모습을 보던 티리야는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불었다. 잔뜩 익어서 곧 떨어지게 생긴 과일이 아직도 많은데, 우르딘 녀석이 뺀질거리며 자꾸 빠져나가려고 꾀를 쓰는 통에 티리야만 혼자 허리가 다 나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돌아오기만 하면 엉덩이를 걷어차야지. 씨근거리면서도, 티리야는 씩씩하게 나뭇가지에 달린 과일을 하나씩 거두었다.
토르갈 부족민이 자치구에 정착한 지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첫 겨울을 맞았을 때까지만 해도 과연 낯선 땅에 다시 적응해 잘 살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날씨가 풀리고 봄이 되어 밭을 갈고 과일나무를 옮겨 심자마자 사람들은 마치 일에 원한이라도 맺힌 사람들처럼 매일같이 농사에 매달렸다.
튈브리크에서 물건이나 팔며 사는 것이 편하다고들 말은 했지만, 다시 가축을 치기 시작하고 손에 덜 익은 농사까지 짓게 되니 확실히 몸을 쓰며 일하는 쪽이 더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 편을 들어달라며 알린에게 뛰어갔다가 되레 꿀밤이나 한 대 얻어맞은 우르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밭둑을 걷다가 길쭉한 강아지풀을 하나 뽑았다. 나이가 좀 더 많은 형들이 그러는 것처럼 잇새로 줄기를 물고 느긋하게 걸으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비록 티리야는 벌써부터 게으름뱅이 티란 티는 다 내고 다닌다며 을러댔지만 우르딘은 결단코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몇 년 더 지나 성인이 되면 튈브리크 쪽으로 나가 다시 장사를 하고 싶었다. 이전에는 너무 어려서 아무도 자신을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지만—그리고 장사를 가르칠 만큼 수완이 좋은 사람도 없었고— 어른이 되면 뭐든 자신의 뜻으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 문제없을 것이다.
‘두고 보라니까. 한 이삼 년만 열심히 일하면 조그만 자리라도 세를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러면 거기서 또 한 삼 년 정도만 열심히 물건을 팔고, 내 가게를 가지고… 좀 더 큰 가게를 사고……. 그러다 보면 나는 부자야! 티리야 누나도 그때쯤 되면 나한테 반하게 될걸!’
순전히 상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우르딘은 벌써부터 어른이 된 자신이 멋들어진 혼수를 왕창 장만해 티리야에게 청혼을 하는 결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실현될 꿈인 것처럼 행복감에 취해 있느라, 자신이 사과 언덕의 중턱까지 올라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 뭐야. 언제 여기로 온 거야? 에이, 참. 여기서 미끄러져서 옷 찢어먹으면 또 잔소리 들을 텐데.”
사과 언덕이라는 이름은 아르사크가 붙인 이름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야생 사과나무 하나가 언덕배기 중턱에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벽이 있었더라면 이 언덕에도 보초를 세울 수 있도록 높다란 망루라도 올렸겠지만, 자치구는 입구를 표시하는 팻말만 달랑 있을 뿐 따로 벽을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무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사막이나 초원에서는 아무도 성벽을 쌓고 생활하지 않으니 이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응?”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가려던 우르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마께에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는가 했는데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움직임이 이상한 것 같았다.
“으으음……?”
말 한 필, 그리고 그 위에 사람이 한 명 타고 있었다. 말의 뒤쪽에는 깃발이 한 대 꽂혀 있었는데, 우르딘은 그 문양을 금방 알아보았다.
“아르사크! 아르사크!”
다급하게 언덕을 내려오느라 엉덩이며 무릎께가 너덜너덜하게 해진 우르딘을 본 아르사크는 말의 갈기를 빗질하다 말고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아무리 타이르고 혼을 내도, 이놈의 말썽꾸러기는 도무지 말을 들어먹는 법이 없다.
“우르딘, 내가 뭐랬어? 마구간에 들어올 때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들이 놀란다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아르사크! 빨리 좀 와봐!”
우르딘이 발을 동동거리며 외쳤다. 아르사크는 들고 있던 말빗으로 우르딘의 정수리를 딱, 아프게 쳤다.
“아야!”
“그리고 족장님이라고 하라고 했지. 정말 이제는 내 입이 다 아프…….”
“알았어, 알았다니까. 족장님. 저기, 족장님, 제국에서 누가 왔어.”
“너 바보니? 여기도 제국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그게 아니라! 아, 정말! 그게 아니라니까! 빨리 아무튼 좀 나와봐!”
우르딘은 마구잡이로 아르사크를 끌어당겨 마구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고는 사과 언덕 가까이, 자치구로 들어오는 오르막까지 아르사크의 등을 마구 밀어댔다.
“우르딘! 그만 좀 해! 알겠다니까!”
“저기! 저기 봐! 저기!”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야? 기껏해야…….”
여행자 아니면 떠돌이겠지.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아르사크의 입은 어쩐 일인지 굳게 다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우르딘은 아르사크의 표정을 보자마자 갑자기 히죽거리면서 어디론가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그럴 리가 없지는 않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이미 언덕이 시작되는 길목까지 나가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가을 햇빛에 익은 밀밭처럼, 결코 잊지 못할 눈부신 금발이 바람에 가볍게 날린다.
발굽을 다그닥거리며 천천히 걸어오는 말의 등 위에 앉은 그는 금방이라도 투덜거릴 것처럼 표정이 뚱했고, 심지어 손은 등 뒤로 묶여 있는 채였다.
‘토르갈에서는 혼인을 할 때, 신랑이 아주 멀리서부터 손이 묶인 채 말을 타고 오죠.’
‘그건 포로를 데려갈 때나 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이제부터 신랑의 팔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쓰일 것이라는 뜻이라거나…….’
아르사크는 갑자기 허리를 꺾으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소리로 웃었는지, 근처에 있던 부족민들까지 너도나도 몰려나왔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르사크를 보다가, 드디어 길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에리히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한 사람, 두 사람씩 얼굴을 가리거나 입을 틀어막으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 모두들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인 동시에, 이 진기한 구경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만 좀 웃어.”
에리히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그가 가까이까지 왔을 때, 아르사크는 거의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새 자치구 안에도 에리히가 왔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에리히는 죽어가는 아르사크를 뚱하니 내려다보며 툴툴거렸다.
“그만 웃고 이것 좀 풀지? 테오도르, 이 자식. 너무 세게 묶어서 피가 안 통할 지경이라고.”
“왜…….”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로 아르사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발끈한 에리히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게 혼례 풍습이라며?”
“그건 그런데… 왜… 뒤로 묶었냐고요……. 그건, 그건 죄를 지었을 때나, 하는… 신랑은, 으흣, 신랑의 손은… 앞쪽으로 살짝… 묶는 시늉만 해도 되는데…….”
혹시나 싶어 에리히의 등 뒤로 돌아간 아르사크는 겨우 멈췄던 웃음이 또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붉은색 천으로 살짝만 매듭을 지어놓는 것인데, 에리히의 손은 밧줄로 동여져 있어 영락없는 죄인 꼴이었던 것이다.
“아, 웃다가 숨 막혀 죽겠어… 바보들인가 봐…….”
정말로 눈물까지 찔끔 흘린 아르사크는 웃느라 푸들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누르면서 단검으로 밧줄을 잘라 풀어주었다. 진짜 피가 통하지 않아서 벌겋게 얼룩덜룩해진 손을 매만지며 에리히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대체 뭐 이런 해괴한 풍습이 다 있어?”
“그러게 왜 그런 꼴을 하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에리히의 입가가 실룩였다. 그의 등 뒤쪽에서 비치는 햇빛 한 줄기가 아르사크에게도 닿았다. 마치 수면이 반짝이듯,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빛들이 아르사크의 머리칼 위에서 찰랑거렸다.
아르사크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집어던진 순간, 에리히는 말에서 뛰어내려 아르사크를 품 안에 꽉 밀어 넣듯 끌어안았다.
그리워서 밤잠조차 잘 수 없었던 향기가 온 가슴을, 몸속을, 폐와 심장까지를 전부 다 채운다.
“내가 왜 그랬겠어?”
“아직도 날 사랑하니까요?”
입술 끝에 웃음이 걸린다. 에리히는 유쾌한 듯이 짧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아르사크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 사랑해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