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하세요.”
짧은 대답이다. 에리히는 소리 없이 미소를 띠었다가, 뭔가 망설여지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 쪽으로 좀 더 몸을 붙이며 다가앉았다. 맞닿은 체온은 따뜻하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무슨 얘긴데요? 말해봐요.”
“개간 작업이 끝났다.”
아르사크의 눈이 두 번, 가만히 깜빡였다. 그러다가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가볍게 흔들렸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뒤쪽으로 살짝 넘겨주면서 한숨을 쉬듯 말했다.
“겨울쯤에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빨랐군. 이 정도면 오차 범위 안이기는 하지.”
아르사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폐하, 지금… 그 말씀은…….”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리는지 아르사크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에리히는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됐어. 약속대로 그대와 그대의 부족민을 자치구로 보내주겠다. 토르갈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누구보다 공을 세운 사람들이니,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겠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처음 약속을 할 때는 결코 끝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2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같은 계절이 두 번씩 돌아가는 것. 그만큼을 버틸 수 있을까, 아르사크 자신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끝은 왔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이토록 빨리.
에리히는 수많은 말을 삼키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에리히가 말했다.
“그대는, 너는… 이제 자유야. 그대를 놓아주겠어.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144장 최종장 (3)
토르갈 부족민들에게 자치구를 내린다는 결정은 귀족들 사이에서 소소한 반향을 불러왔지만, 에리히의 예상대로 크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위든의 반란을 진압할 때 그들의 역할이 컸던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
만약 그때, 시기적절하게 아르사크가 부족민들을 이끌고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에리히는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죽지 않았더라도,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했을 것이었다.
아르사크를 폐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족민들의 이주가 모두 끝난 이후 조용히 치러지는 것으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 공식적으로도 폐위라기보다는, 황후 스스로의 의지로 부족을 위해 돌아가고자 했다는 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에셴의 의견도 있었기에 에리히는 숙고 끝에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첫 번째로 아르사크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만약 이제 그녀가 더는 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공표된다면, 아르사크와 토르갈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 해코지를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자치구 주변의 경계를 강화할 예정이었지만 굳이 위험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데에 에리히와 아르사크 두 사람이 모두 합의했다.
* * *
늦여름이 되었지만 아침부터 날씨가 퍽 선선한 편이었다. 마치 실수로 일찍 온 가을이 당황한 채 머무는 것처럼, 아직 여름의 생기를 끌어안고 짙푸른 녹음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만이 이상하게 쾌청했다.
황후를 모시던 시녀들은 그날 아침부터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간밤에 너무 운 나머지 아침까지 가라앉히지 못한 것이다. 옷과 구두, 장신구, 황후가 사용하던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챙기고 있을 때 아르사크가 나타났다.
깊은 호수처럼 푸른 빛깔의 옷은 계절과 잘 어울렸지만, 아르사크가 어제까지 입고 있던 하늘하늘한 드레스와는 달랐다. 얇은 비단과 가죽, 자수로 장식한 옷과 통풍이 잘 되도록 비단으로 지은 신발 차림, 가늘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아무런 장식도 달지 않은 아르사크는 편안해 보였다.
“짐은 챙길 필요 없어.”
아르사크의 말에 시녀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코를 훌쩍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누군가는 또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눈썹을 늘어뜨린 채 미소를 짓고,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아이들의 뺨을 하나, 하나 쓰다듬어주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 나 찾으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돼.”
“마마… 가지 마세요. 저희가… 흑, 마마께서 매일 어디로 숨으셔도 괜찮으니까……. 가지 마세요. 네?”
“휴가를 얻거든 자치구에도 놀러 오렴. 나를 보러 와준다면 기쁠 거야.”
아르사크는 훌쩍거리고 서 있는 시녀들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로즈안나조차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그럼… 아르사크 님, 어떤 걸 가져가실 생각이신가요? 지금… 아이들에게 일러서 따로 챙겨두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가져갈 거니까.”
직접 가져가다니? 얼핏 아르사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즈안나는 잠시 후에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로즈안나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아르사크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지 않겠다고 해놓고 왜 또 울어, 로즈.”
“…아르사크 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아르사크 님이 아니셨더라면 제가 울 일도 없었을 거예요.”
“너도 루이제를 닮아가는 거니? 엊그제 울고불고하더니만 토라져서 오지도 않는 것 좀 봐. 아기 낳으면 그 성질머리는 제발 닮지 말아야 할 텐데.”
“왜 제가 따라가겠다고 하는데도 막으시는 거예요?”
“로즈.”
아르사크는 다정한 표정으로 로즈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에겐 이제 테오도르가 있어. 그와 사랑하며 잘 지내.”
“저는…….”
“울지 마. 너를 너무 울려서 네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테오도르가 눈이 벌게져서 밤마다 날 저주할 것 같아.”
“테오도르 님이 그런 짓을 하시면 제가 혼낼게요.”
“어쩜, 우리 로즈는 야무지기도 하지.”
웃으며 말한 아르사크는 방의 한쪽 벽에 장식처럼 보란 듯이 걸어두었던 활을 내렸다. 아직도 매듭이 단단한 활줄을 한 번 쓰다듬은 아르사크는 아교가 녹지 않았는지 확인한 다음 어깨에 활을 걸쳤다.
“가자, 소르흐를 데리러 가야지.”
로즈안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려 애쓰면서 조용히 아르사크의 뒤를 따라갔다.
아르사크는 모든 것을 두고 가는 대신, 에리히로부터 혼수로 받은 활과 말, 그리고 소르흐만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 역시 황후로서 받은 것이긴 했지만, 에리히가 처음으로, 유일하게 아르사크만을 위해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며칠 내내 밤낮으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느라 아르사크는 사실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 루이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귀부인들이 손수건을 흠뻑 적셔가며 우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울지 않은 사람은 에셴뿐이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단지 이렇게 말했다.
“마마와 같은 분을 성심을 다해 모시게 된 것이 저의 영광입니다. 앞으로 마마께서 저를 두 번 다시는 찾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저는 죽을 때까지 마마를 잊지 못하겠지요.”
그것은 아르사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기쁜 말이었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에셴에게 아르사크도 할 수 있는 예의를 갖추었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르면서도 어딘가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에셴 같은 사람이 성심성의껏 아르사크를 도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자, 소르흐.”
소르흐는 익숙한 몸짓으로 아르사크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이제는 완전히 자라 체구는 단단해지고, 눈빛 역시 위풍당당했다.
야생으로 돌아가 사냥을 연습하도록 새로이 길을 들이면, 소르흐는 한두 해쯤 지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의 등에 오른 자’라는 이름처럼, 사막까지 불어가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갈 것이었다.
마구간 앞에 다다른 아르사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생각에 잠겼다. 마구간 청소라도 하라는 에리히의 말에 진짜로 마구간을 치웠던 생각이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
그때는 기회만 있으면, 정말로 서로를 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미워했던 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마구간 치우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나?”
아르사크가 말을 끌고 나오려는 순간, 에리히의 목소리가 귓전을 가볍게 때렸다. 고개를 들자, 모퉁이를 돌아 가버리는 로즈안나의 다급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지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후로는 청소를 깨끗하게 하던걸요. 마구간지기들이 일을 잘 하게 됐으니 다행이로군요.”
“황후보다 실력이 못해서야 어디 써먹겠느냐고 했더니 밤을 새워 청소를 하던데. 마구간지기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던 게 아닌가?”
“보나마나 청소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둔다느니 뭐라느니 하셨겠지요.”
“가둔다고는 안 했다. 봉급을 삭감한다고 했지.”
어느새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그렇게 다가오는 줄도 모를 만큼,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얼굴만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때 이른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 몇 번이고 입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얼굴. 강물처럼 푸른 눈동자.
이걸 잊을 수 있을까.
에리히의 손끝이 아르사크의 어깨에 닿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알 수 있기 때문에 둘 다 말을 아꼈다.
“배웅은 안 해.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저의 일방적인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시어 감사합니다, 폐하.”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이 가볍게 움츠러들더니 선선히 떨어졌다. 에리히가 아르사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아르사크의 몸이 말 위로 훌쩍 올라갔다. 말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은지 경쾌하게 푸르륵거리는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