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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81화 (181/191)

181화

에리히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아르사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거의 깔리다시피 한 아르사크는 혹시나 그를 걷어차기라도 할까 봐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숨을 씨근거리다가 말했다.

“놔, 못생긴 게.”

그러자 에리히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군. 내 얼굴에 반했으면서.”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황제니까 다들 솔직하게 말을 못 했다고는 생각 못 하는 건가요?”

“남의 안목이 무슨 상관이야? 거울만 봐도 알 수 있어.”

“진짜 중병이야. 혹시 머리를 다쳤는데 내가 몰랐나요?”

“왜 화를 내? 그럼 안 울었어? 울었잖아.”

“당신이 자는 척하는 걸 알았다면 안 울었어!”

“아, 진짜 울었군. 진작에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아르사크의 눈이 무시무시하게 커졌다. 그의 농간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자, 아르사크는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에리히는 악동처럼 키득거리고 웃다가 아르사크의 코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얼굴 좀 펴, 못생겼어.”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확 내가 황제나 돼버릴걸. 그랬으면 이 무엄한 놈을 당장 잡아다 탑에 가두라 했을 텐데.”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줄 수 있는데. 줘?”

에리히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아르사크는 움켜쥔 주먹을 차마 휘두르지도 못한 채 파르르 떨고만 있다가 꽥 소리쳤다.

“필요 없어요! 누가 그딴 것 되고 싶대!”

143장 최종장 (2)

에리히가 체력을 회복하는 속도는 치료사들의 예상보다 좀 더 빨랐다. 그러나 누워있는 동안에 확실히 움직임은 좀 둔해져서, 한동안은 방 안을 서성거리며 걸어 다니거나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회복해야 했다.

마침내 에리히가 예전의 체력과 움직임을 되찾았을 때, 황궁과 수도를 포함한 제국 전체에서 이레 동안의 축제가 열렸다. 승전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황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시민들은 그제야 지루하던 전쟁이 끝난 것처럼 환호를 올리며 기쁨에 겨웠다.

반역자인 위든이 남긴 토지와 재산 대부분은 황궁의 소유가 되었지만, 그중 상당한 양은 병사들에게 골고루 분배가 되었다.

에리히가 잠든 사이 아르사크와 테오도르가 임의로 새롭게 편성해 놓은 병사들의 조직은 황제의 주도 아래 더욱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훈련의 내용이나 기사단의 조직도 역시 개편되어, 카툴라의 제국군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첫발을 다시 내디딘 셈이 되었다.

카르반테는 남쪽 경계 지역으로 출전하여 해적들 중 규모가 큰 무리의 대장을 벤 공로를 인정받아 루이제와 같이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자신의 성씨로 붙여 카르반테 메르로 남작이 되었다.

전쟁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충격은 상당했다. 재산의 피해액 또한 컸다. 에리히는 왕을 잃은 로크로몬서에 경고성 사신을 보냈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배상을 하고, 아니면 제국의 휘하에 들어와 충성을 맹세하라는 조건이 걸렸다.

혼란에 빠진 로크로몬서의 대신들은 당황했다. 제국에서 요구하는 배상액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마련할 방도가 없었으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고르쿰의 방계 친척 중 한 명을 데려다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지만, 전제 군주의 죽음으로 불이 붙은 정쟁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가장 마음을 쓴 것은 유레나의 장례식이었다. 비록 빈 관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유레나가 잠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슬퍼했다. 생전의 유레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공표는 없었는데 그것은 로즈안나의 의견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유레나 황녀님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어댈지도 모릅니다. 황녀님이 돌아가신 것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하다못해 죽은 후에 황녀님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비밀로 해주십시오.”

에리히는 로즈안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사실 유레나 황녀의 장례식에서 실제로 상주의 역할을 한 사람은 로즈안나였다. 유레나가 좋아하던 제비꽃 설탕절임과 자두나무의 꽃가지, 사탕과 과자들이 관 안에 들어갔다. 과거에도, 지금도, 너무나 작은 관이었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루이제는 요즘 매일같이 황궁으로 놀러 오는 것이 일이었는데, 드레스 밑으로 살짝 부푼 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쓰다듬으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시럽을 끼얹은 빙수를 야금야금 먹고 있는 루이제를 강아지를 보듯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쪽으로 괸 머리를 좀 더 기울이면서 말했다.

“아기도 있는데 찬 것만 너무 먹으면 몸에 나쁘다, 너.”

“마마, 그치만 너무 덥잖아요. 너무 더워도 아기에게 해롭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녁에는 카른이 항상 따뜻한 차를 마시게 하니까 괜찮아요.”

“아, 예. 그러신가요.”

“어제 말이에요, 마마. 아이참, 그렇게 귀찮은 표정 짓지 마시고 좀 들어보세요! 어제 카른이 아기 이름을 뭘로 짓고 싶냐고 물었는데 제가 대답을 못 했지 뭐예요? 글쎄 이름들이 다 너무 예쁜데, 예쁘고 마음에 드는데…….”

조잘조잘 떠들던 루이제는 아르사크가 대놓고 조는 시늉을 하자 스푼을 팩 내려놓으면 소리를 쳤다.

“마마!”

“아, 놀래라. 어. 뭐? 이름이 어쨌다고?”

옆에 서 있던 로즈안나와 시녀들은 붉으락푸르락하는 루이제의 조그만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루이제가 골난 표정으로 뾰로통하게 입술을 실룩이자 아르사크는 키들거리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미안, 장난 안 칠 테니까 말해봐. 이름이 마음에 드는데, 그런데 뭐?”

“그게요, 다 마음에 드는데 지금 정하라니까 정할 수가 없지 뭐예요.”

“왜?”

“그야 딸일지, 아들일지 아직 모르는걸요.”

“그럼 딸 이름 하나, 아들 이름 하나, 그렇게 정해놓으면 되잖아?”

아르사크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루이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루이제는 갑자기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그런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는 얼굴을 한 채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마마, 현명하시어요.”

네가 바보라서 그런 건 아니냐는 말을 겨우 삼킨 아르사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즈안나를 돌아보았다.

“그것 좀.”

루이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곧 돌아온 로즈안나는 기름 먹인 종이에 싼 꾸러미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르사크는 루이제를 한 번 바라보고는 꾸러미를 턱짓했다.

“열어보렴.”

루이제는 빙수가 든 그릇을 옆으로 밀어놓은 채 조심스럽게 꾸러미의 포장을 풀었다. 천진하고 커다란 눈동자가 몇 번 깜빡거린다.

꾸러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자수를 놓은 작은 아기 옷이었다. 요람에 넣을 때 아기를 감쌀 수 있는 포대기와 모자도 있었다. 마치 인형 옷처럼 작은 그것을 하나하나 들추어보던 루이제는 갑자기 뺨을 붉히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루이제? 너 왜 우니?”

로즈안나는 황급히 루이제에게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루이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드문드문 울음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저, 저 이런… 이런 선물 처음… 받아봤어요……. 으흑, 마마… 제가, 처음… 만났을 때, 흑, 못되게 굴어서 죄송… 흐윽, 죄송해요…….”

그렇게 말한 루이제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순간, 아르사크는 자신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이 깍쟁이의 토라진 투정을 들어줘야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즈안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시녀들 역시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아르사크의 눈치를 보고는 모조리 방을 나갔다.

“울지 마, 루이제. 난 그런 건 기억도 안 나.”

“어떻게 기억이 안 나실 수가 있어요! 저처럼 예쁜 애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당연히 기억이 나시겠지요! 저를 생각해 주시느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절 혼내주세요!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아, 혼내는 건 어렵지 않아.”

“꺄악! 마마! 전 아기가 있단 말이에요!”

아르사크가 일어서는 시늉을 하자 루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느다랗게 짝이 없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양쪽의 옆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르사크마저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하자 루이제는 하얀 뺨을 통통하게 부풀리고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선물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감사합니다, 마마. 아기는 마마 덕분에 건강하게 자랄 거예요.”

“네 덕분에 행복하게 자라는 거지. 그리고 카른 덕분에 용감하게 자랄 테고. 아기가 태어나거든 딸인지 아들인지 꼭 알려줘.”

“네, 당연하지요! 매일 데리고 마마께 인사드리러 올게요!”

“아니, 매일은 됐어…….”

한참 앉아서 수다를 떨던 루이제는 카르반테가 데리러 왔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쪼르르 달려나갔다. 한숨을 쉰 아르사크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푹 늘어졌다.

“왜 내가 이 나이에 말 많은 딸 가진 엄마 같은 게 돼야 해? 기가 막혀.”

“그러게 자꾸 받아주지 말라고 했잖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데 누군가 말꼬리를 잡는다. 아니, ‘누군가’는 아니었다. 아르사크의 혼잣말에 저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이 황궁에 두 명 있을 리 없었다.

아르사크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에리히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추슬러 어깨 앞으로 넘겨준 에리히가 말했다.

“귀찮으면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리지 그래.”

“그랬다가는 황궁 앞에 퍼질러 앉아서 사흘 밤낮 우는 꼴을 볼걸요.”

“버릇 한번 단단히 잘못 들여놨어.”

“애초에 저런 애를 황후 후보로 뽑았던 게 누군데 그래요?”

“내가 안 뽑았거든.”

“루이제가 황후가 되도록 밀어줄걸 그랬어, 정말. 그랬으면 내가 이런 꼴을 볼 일도 없었는데.”

“꿈도 크군.”

에리히의 팔이 아르사크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자연스럽게 붙어 앉은 둘의 모습은 어디로 보나 잘 어울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 뒤로 입술이 마주 닿는 것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입맞춤뿐이다. 둘 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아르사크가 에리히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이자 혀끝이 가볍게 눌렸다. 에리히는 시선을 내린 채 아르사크의 허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가, 앞으로 살짝 도드라진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몸을 물렸다. 잠시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으로, 시선만으로,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차마 바깥으로 내보일 수 없는 불꽃을 마음속으로 갈무리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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