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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80화 (180/191)

180화

“…유레나 황녀의 장례를 다시 치를까 해요. 당신이… 그때 말했잖아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할 생각이에요. 난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지만, 마음이 아파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러면 로즈안나가 여태 짊어진 마음의 짐도 조금은 덜어지겠죠.”

아직은 테오도르, 그리고 에셴과만 논의한 내용이었지만 둘 다 반대할 리 없었으므로 곧 실행에 옮겨질 계획이었다. 황녀의 지위에 맞게 성대하고 엄숙하게 치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유레나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알 필요는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유레나가 아직까지 존중받는 황녀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또한 아르사크가 말한 것처럼, 로즈안나가 지금까지 놓지 못하는 유레나에 대한 슬픔을 덜 기회도 되어줄 것이었다.

“이제 당신만…….”

아르사크의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선을 내린 채 에리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사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당신만 깨어나면 돼요. 그래야만 전부 다 끝나는 거니까.”

에리히의 창백한 얼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끊어지지 않는 숨소리만이 그가 아직 여기에 있음을 안타까울 정도로 약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원해서 오게 된 곳은 아니다. 황후가 되길 바랐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무익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포로가 되는 심정을 떠안고 후녀가 되는 길을 택했고, 자신조차 어쩔 수 없었던 사고 같은 일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그랬던가?

그 질문에 대해 아르사크는 정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빈 배가 강물의 흐름에 떠내려가듯, 움직이는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으로부터 에리히에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강이 흘러 서로가 이어진 것처럼.

그 위에 떠내려 보낸 것들은 무엇이 있었나? 꽃과 입맞춤, 반짝이는 시선과 숨기고 싶었던 애정들.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강물을 따라 그에게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막고 싶었더라면 그때 했어야 했다. 아직 물살이 빠르지도 거세지도 않았을 때, 막 흐르기 시작했을 때.

하지만 아르사크는 그러지 않았다. 그 감정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경험해 본 적 없는, 툭 쳐서 흘려보내면 다시 돌아오는 나뭇잎 배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행복했다.

“무슨 재밌는 꿈을 꾸길래 이렇게 오래 자는 건지 말이라도 좀 해봐요.”

에리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아르사크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던 것이다.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답을 하라고 다그치다니. 앞으로 영영 듣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툭 흘러 떨어졌다.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에리히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치료사들도 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언제일까. 희망을 놓아야 하는 때가 언제일까? 오늘? 내일? 한 달 후? 일 년 후?

그렇게 오래는 안 돼. 아르사크는 생각했다. 자신은 영원히 에리히 옆에 머물 수가 없었다.

토르갈의 부족민들은 전쟁이 끝나자 잠시 돌아왔지만 영영 제국에 발붙이고 살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를 대신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깨어난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정당히 보내줄 수 있도록 잠깐 기다려줄 뿐이다. 예전에 그랬듯, 지금도 역시 아르사크는 그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나는 당신도 떠날 수가 없어…….”

아르사크가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 에리히의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아르사크는 마치 기도라도 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 안이 부어오른 것처럼 아팠다. 목에 걸린 울음이 조약돌처럼 달그락거리며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흐느끼던 아르사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단호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눈물을 훔친 뒤 숨을 몰아쉬었다.

에리히는 아직 죽지 않았다. 죽는다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지금 울어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깨어날 것이고, 깨어나야만 했다.

“일어나기만 해봐라.”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조차 뜨지 못한 에리히를 향해 을러대는 소리를 한 아르사크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채로 몸을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에리히의 얼굴에 닿았다. 잘그랑거리는 황금빛 머리 장식도 가볍게 떨린다.

아르사크의 입술이 에리히의 입술 위에 천천히 포개어졌다. 입술 사이로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이 흘러 들어가고, 아주 약하게 흐트러진 호흡이 마지막 인사처럼 천천히 뒤엉켰다.

섬세하게 내리깔린 에리히의 눈매가 희미하게,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흠칫거린 것은 그때였다. 아르사크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에리히로부터 입술을 뗀 뒤 몸을 일으켰다. 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은 아르사크가 침대를 벗어나려 했을 때였다.

에리히의 숨소리가 약간 달라진 것이 그제야 아르사크의 귀에도 들렸다. 마치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이 사라진 것처럼, 깊은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다가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긴 숨소리였다.

“…에리히?”

아르사크의 입에서 조그만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서 마치 속삭임처럼 들렸다.

에리히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사크가 몸을 돌린 순간, 침대 위에 인형처럼 놓여 있던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눈꺼풀 아래가 천천히 들썩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천천히, 천천히 열렸다.

파란 눈동자가 움직이자마자 가장 먼저 바라본 것은 아르사크였다.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는 아르사크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리히의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물기 한 점 없이 말라버린 식물처럼, 건조하게 쉰 목소리였다.

“…지, …마.”

“뭐…라고요? 뭐라고 했어요?”

아르사크가 와락 달려들었다. 침대가 흔들리자 미간을 찡그린 에리히는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당황했는지 시선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아르사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에리히의 뺨을 만져보았다. 따뜻했다.

“뭐라고… 말했어요? 나한테 한 말이에요? 천천히 말해봐요. 다시 한번…….”

아르사크가 물었다. 그러자 에리히는 마른침을 삼키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목울대를 울린 뒤 다시 입술을 벌렸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잠시 이어지다가, 뒤이어 아르사크가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주 느릿느릿한 속도로 흘러나왔다. 이런 말이었다.

“자는… 사람, 함부로 덮치지… 말라고.”

이걸 한 대 때리면 도로 정신을 잃어버릴까? 아르사크는 이를 꽉 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정말로 에리히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대로 그의 파리한 뺨을 와락 감싸며 한 번 더 입맞춤을 했다.

에리히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드넓은 황궁 안을 재빨리 한 바퀴 돌고, 잠들어 있던 운트겔 저택의 사람들마저도 흔들어 깨웠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너무 다급하게 뛰쳐나오느라 반쯤은 잠옷 바람이었다.

“폐하!”

“에리히 님!”

방으로 뛰어 들어온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가만히 돌아보는 에리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새벽잠을 자던 당직 치료사는 아르사크의 무시무시한 시선 아래 에리히의 몸 상태를 꼼꼼하게 진찰한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신을 잃으신 사이 체력과 기력이 떨어져 허약해지신 것을 제외하면 폐하께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마마.”

“정말인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예. 상처는 순조롭게 아물었고… 어디 보자, 폐하. 손발을 움직여 보십시오.”

에리히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근육이 조금 뻣뻣해진 느낌도 들었지만 어쨌든 쉽사리 움직일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아예 팔뚝에 이마를 묻은 채 숨도 못 쉬고 울고 있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 그만 좀… 울어라. 네가 먼저 죽겠다.”

“제가 왜 죽습니까! 에리히 님 때문에 걱정돼서 죽을 뻔했지만 이제 안 죽습니다!”

“저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아르사크 님, 폐하께서 깨어나셨으니 아르사크 님께서도 좀 주무세요. 이러다 아르사크 님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전부 헛일입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빙긋이 웃었다.

“여기서 잘 테니까 잠자리는 네가 봐주지 않아도 돼. 너희들도 이만 돌아가. 폐하께서도 좀 쉬셔야지.”

“열흘 넘게 쉬었는데 뭘 또 쉬라는 거야?”

“그럼 지금 나가서 정원이라도 한 바퀴 뛰고 오시든가요.”

아르사크의 말에 치료사는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에리히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두를 방에서 내보낸 뒤 높게 돋운 베개에 등을 기대었다.

“이쪽으로 와.”

“싫어요.”

“여기서 잔다며?”

“누가 폐하 옆에서 잔다고 했습니까? 소파 좋아 보이네요.”

“셋 셀 때까지 와. 하나, 둘…….”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안 가면 네가 어쩔 테냐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에리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날 위해 울 때는 기특하더니만.”

순간, 아르사크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 자식, 설마 다 듣고 있었나?

“설마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거예요?”

에리히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르사크는 헛웃음을 치고는 입술을 깍 깨물며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에리히의 팔이 아르사크의 허리를 와락 감았다. 열흘 넘게 죽 한 그릇 못 먹은 주제에 도대체 이런 힘이 어디서 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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