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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9화 (179/191)

179화

“으아악!”

기함을 지르며 휘두른 검이 아르사크의 오른쪽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아르사크는 말의 배를 걷어차 갑자기 달려나가게 한 다음 안장 위에서 몸을 반대로 돌려 그의 등을 베었다.

거구의 덩치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순간, 저편에서부터 말을 달려 다가온 누군가가 아르사크를 향해 검을 세 번 휘둘렀다. 속도가 무척 빨랐기에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대로 어깨나 목을 내어줄 뻔했다.

아르사크는 곧바로 반격했다. 아르사크는 잠깐의 경합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허투루 휘둘렀다가는 틀림없이 죽는다. 여유를 부리며 가늠할 상대가 아니었다. 찔러 들어가고, 비스듬히 베어내는 모든 공격은 모두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리고 있었다.

흥분한 말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아르사크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에리히의 존재도, 부족민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그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아르사크의 움직임은 귀신같이 정확하게 파악했다. 어쩌면 시야 같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르사크는 아래에서 쳐올리는 검을 받아 흘려버리면서 순간적으로 안장을 디디고 일어섰다.

날뛰는 말 위에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대방도 생각조차 못 한 것 같았다. 아르사크가 몸을 일으킨 한순간, 그 찰나에 빈틈이 생겼다. 쉼 없이 휘두르던 검의 흐름이 끊긴 것이다.

아르사크는 숨조차 쉴 겨를이 없었다. 한쪽 발로 단단한 안장을 걷어차듯 밀어내면서 말 위에 앉아 있던 그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컥!”

발등에 뭔가 단단한 것이 닿는 느낌이 왔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칼이 위쪽으로 뻗쳐왔다. 떨어진 순간에 휘두른 것이다. 발목이 잘릴 뻔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아르사크는 검의 끝을 아래로 향한 채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푹, 하는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뭔가 단단한 것이 부러지는 감각도 함께였다. 아르사크는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에서 칼을 빼낸 뒤 상황을 살펴볼 여유도 없이 뒤쪽에서 달려드는 이들을 처리했다. 곁눈으로 얼핏 보니 에리히 역시 쓰러지지 않고 적들을 베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는 위든을 찾았다. 그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베어내며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틈을 보아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닥치는 대로 적을 베어버리면서 담장을 따라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불자 주인을 잃고 혼란스레 고개를 흔들고 있던 아르사크의 말이 재빨리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아르사크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아채는 동시에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탄 뒤, 등 뒤로 돌려 메고 있던 활을 붙잡고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떨린다. 아르사크는 있는 힘껏 등자를 디딘 채 몸을 일으켰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미처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화살이 날았다.

“아악!”

위든의 검은 화살을 막지 못했다. 외마디 비명을 올린 그가 화살이 꽂힌 팔을 내려다본 순간, 아르사크는 지체하지 않고 고삐를 잡아챘다.

위든이 팔 깊숙이 박힌 화살을 뚝 부러뜨린 뒤 식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르사크를 향했다.

“…너를 진작에 죽였어야 했다.”

아르사크는 웃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얼굴로 칼에 묻은 피를 휙 털어냈다.

“그래요. 당신은 저를 오판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안타깝지만 네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모래밭을 돌아다니며 짐승이나 몰고 다니는… 놈들 중에, 너 같은 것이 있는 줄을 진작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두지 않았을 거야.”

“그것이 당신의 패인입니다, 공작 전하.”

위든이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팔뚝에 박힌 화살촉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는지 반대쪽 손으로 검을 쥐었다. 아르사크 역시 달려드는 그를 피하지 않고 곧장 마주 달렸다. 검을 치켜든 위든이 악에 받친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비의 원수라도 갚고 싶다는 거냐? 무능한 족장이었던 네 아비를 탓해야지!”

아니. 아르사크는 속으로 뇌까렸다. 정확히는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천만에, 당신은 나를 얕봤어. 내게 싸움을 걸어왔으니 내 손에 죽는 것일 뿐이야.”

아르사크가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달려드는 말발굽 소리에 파묻혀 위든에게까지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위든의 검이 먼저 둥그렇게 허공을 갈랐다. 아르사크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진로를 약간 비틀었다. 그런 다음 망설이지 않고 검을 가로로 그었다.

피가 튀어 오르는 순간 아르사크는 검을 안쪽으로 빼내며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위든의 눈은 곧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커진 채 아르사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전하!”

그의 몸이 땅바닥에 고꾸라지자 아직 목숨이 붙어있던 사병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적들이 주춤거린다고 해서 잠깐 쉬어가며 기다려줄 토르갈 전사는 없었다.

시위에 매여진 화살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번득이는 검이 사정없이 휘둘러졌다. 담을 타넘어 도망가려는 자들의 등에도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윽!”

마침내 마지막 한 사람의 숨이 끊어졌을 때, 아르사크는 그제야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름답던 정원에는 피로 된 강이 생긴 것 같았다.

“에리히 님!”

그때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멍하던 아르사크의 정신을 번쩍 흔들어 놓았다. 말에서 뛰어내린 아르사크는 쓰러진 에리히를 향해 다급하게 달려갔다.

“에리히!”

에리히의 머리를 감싸 안으려던 아르사크는 그의 어깨와 가슴 부분이 피로 흥건히 젖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멈추었다. 에리히의 호흡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곧 끊어질 것처럼 불안정하고 손끝과 입술이 파리했다.

* * *

반란을 꾀한 위든의 사병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로크로몬서의 궁전에도 빠르게 날아들었다. 고르쿰은 욕을 짓씹으며 북서쪽의 군대를 물리라 명령했다.

어차피 해적들이야 왕국과 상관없는 자들이니 저희끼리 싸우다 죽든 말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의미가 사라진 전쟁에 군사의 수를 더 희생시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에리히가 의식불명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던 고르쿰은 힐데트로스를 죽여 카툴라로 시체를 보내라고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위든과 힐데트로스가 서로 계획을 짜 고르쿰을 이용했으며, 로크로몬서와 카툴라의 사이를 이간하고자 했다는 서신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고르쿰은 불쾌함을 떨치기 위해 술을 진탕 마신 후 고분고분한 후궁 중 한 명을 골라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이 깊었을 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검은 옷을 입은 힐데트로스는 퍼질러진 채 잠든 고르쿰의 단단한 목줄기에 독을 묻힌 송곳을 꽂았다. 잠에서 깬 후궁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그녀도 역시 죽였다.

그러고는 독이 다 씻겨나간 송곳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슴 아래에 깊숙이 꽂은 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고요한 석조 궁전은 세 사람의 피를 마시면서도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쓰러진 동안 테오도르와 함께 엉망진창이 된 황궁을 정리했다. 사병들의 시체는 민가가 없는 곳으로 싣고 나가 모두 불태웠지만, 반역자인 위든의 시체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시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사흘 동안 중앙 귀족들이 지나다니는 광장에 내걸렸다. 악취가 나기 시작할 무렵, 귀족들은 감히 황궁 앞을 지날 때 고개조차 함부로 들지 못했다. 비밀리에 위든과 접선하고 있었던 귀족들은 스스로 작위를 내놓거나 대저택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지방으로 도주해 종적을 감추었다.

봄이 가고 있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전쟁이 끝난 지 열닷새가 지나도록 에리히는 깨어나지 못했다. 숨은 붙어 있었고 상처도 조금씩 아물었지만 도저히 눈을 뜨지 않았던 것이다. 치료사들조차 원인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 대신 황궁과 수도의 혼란을 정리하고 승전하고 돌아온 병사들을 치하했다. 그러나 황제가 의식불명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조용히 치러졌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으레 그러하듯 요란한 축하 연회도 없었다. 고생한 기사단과 병사들에게는 황후가 따로 술과 음식, 그리고 위로를 위한 포상을 내렸을 뿐이었다.

“마마, 오셨군요.”

아르사크는 에셴과 테오도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폐하께서는?”

테오도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셴이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물어본 것은, 에리히가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잠들어 있기 때문일까?

“둘 다 그만 나가도 좋아. 여긴 내가 있겠다.”

“마마, 너무 무리하고 계십니다. 요즘 계속 제대로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래, 로즈가? 호들갑이라니까. 난 괜찮아. 잠도 잘 자고 있어.”

“하지만, 마마…….”

“괜찮으니까 나가 봐.”

그쯤 되자 테오도르도, 에셴도, 더 이상 남아있겠다고 우기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르사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에리히가 누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142장 최종장 (1)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아무래도 결혼을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가 황후 같은 건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결국 나만 고생시키고 있네.”

몸을 기울여 길게 엎드린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머리맡에서 투덜거리듯 작게 속삭였다. 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시종은 에리히의 옆에 누워있는 아르사크를 발견하고는 움찔하면서 문을 닫고 물러났다.

“잠이 와요? 일어나면 허리가 굳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아니야? 통풍 온 노인네처럼 가마에 실려 다니고 싶지 않으면 눈 좀 떠봐요. 벌써 허리가 좀 딱딱해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변하지 않는다.

“오늘은 말이에요……. 견습 병사들의 진급식이 있었어요. 뭐, 나야 이 나라 군대가 돌아가는 방식을 모르니 테오도르가 알아서 했죠. 장군 티가 나던데요. 꽤 그럴듯했어요. 아직 꼬마들이던데, 당신이 없는 것을 보고는 울더군요. 귀엽기는.”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머리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촉촉하고,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났다. 시종들이 매일같이 시트를 갈고, 그의 몸을 닦고, 언제라도 황제의 모습일 수 있도록 돌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에리히는 더욱 의식불명인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꼭 편안한 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얌전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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