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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8화 (178/191)

178화

“뭘 잊으셨습니까. 두고 간 조카의 목이라도 생각나시던가요?”

말은 투레질을 하며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자칫하다가는 고삐를 놓칠 것 같아, 에리히는 덜덜 떨리는 손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안장 위에서 버텼다.

“너무 솔직한 군주는 사랑받지 못하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건만, 제 충고는 전혀 듣지 않으셨군요.”

“숙부님의 충고 같은 것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어차피 제왕이 되지 못할 자가 가르치는 제왕학 같은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위든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에리히는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주의가 흐트러진 순간, 단 한 순간의 찰나면 충분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줍기만 하면,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든 하나만은 기필코 죽일 각오가 되어있었다.

뭔가, 그의 신경을 잠깐이라도 딴 데로 돌려놓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에리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침묵이 내려앉는다. 잠깐의 사이를 둔 에리히는 푸르게 번득이는 눈으로 위든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숙부께서 유레나를 죽였습니까?”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멎은 것 같았다. 불어오던 바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위든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순간, 에리히는 미간을 좁히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때, 위든의 입에서 돌아버린 것 같은 광소가 터져 나왔다.

“아, 하핫……! 하, 이제야… 이제야 거기까지 도달했느냐? 참으로 오래 걸렸구나, 조카야. 하하……! 이제야! 유레나가 죽어 이미 뼈까지 삭아버렸을 지금에야 알게 되어 후련하더냐?”

테오도르는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르도, 에리히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은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유레나가 차라리 병으로 죽은 것이기를.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죽음이었기를.

도대체 그 애가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왜……?”

에리히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혀와 입술을 너무 꽉 깨문 탓에, 입가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에리히의 얼굴을 바라보는 위든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유쾌함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대체 유레나를 왜! 그 애를 죽여서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었단 말인가!”

“물론 없었지.”

위든의 목소리는 이제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에리히는 까마득한 절벽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에리히를 바라보는 위든의 시선에는 모순적이게도 딱하다는 듯한, 희미한 동정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의 에리히를 위한 감정이 아니었다.

“왜 그 과자를 네가 먹지 않았느냐?”

“…뭐라고?”

“일전에 너와 내가 함께 마주 앉아 먹었던 과자 말이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오래전에 너는, 수업을 받기 전에 간식으로 나왔던 과자를 유레나에게 주었지 않았느냐? 그것을 네가 먹었더라면, 어린 동생이 비명에 죽어가는 일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네가 죽었을 테니.”

위든의 말에 에리히는 난데없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시뻘겋게 달군 쇠로 등과 가슴을 동시에 지지는 것 같은 참혹한 아픔이었다. 에리히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이라고?”

“유레나를 죽인 것이 나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전혀 의심이 들지 않더냐? 내가 정말로, 천진난만한 열 살짜리 계집애를 그토록 번거로운 방법으로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내가 왜 그러겠느냐?”

머릿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유레나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르사크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어쩌면 어머니인 것 같기도 했다. 위든이 뒤이어 말했다.

“유레나가 죽었을 때 나는 몹시 슬펐다. 나는 그 아이가 내게 화관을 만들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 이제 두 번 다시 그 아이가 만들어주는 화관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죽은 것이 네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눈물이 나더구나.”

잔인한 말이다. 칼날처럼, 칼날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혓바닥이 에리히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위든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유레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이 끔찍했다.

과자를 달라고 조를 때 안 된다고 한 마디만 했었던들.

차라리 너에게 주지 않고 버렸더라면 너는 죽지 않았을 텐데.

“너는 네 손으로 여동생을 죽인 것이다, 조카여. 유레나는 그토록 사랑하며 따르던 오라비 손에 참혹하게 죽었다. 어찌 눈을 감겠느냐? 땅속에서도 괴로워 관을 긁으며 울었으리라. 그것을 사죄하고 싶다면 너도 이 자리에서 죽거라. 죽어서 유레나 앞에 엎드려 빌면 되겠구나.”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테오도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에리히는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위든의 사병들이 달려들어 에리히를 말에서 끌어 내렸다.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 에리히는 혀를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억지로 무릎이 꿇려진 에리히의 목을 향해 검과 창이 드리워졌다.

“한 사람이 안 보이는군.”

위든이 말했다. 에리히는 그가 아르사크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어디로 빼돌린 것이냐? 네가 데려온 그 아이는.”

“황후는 이미 여기에 없다.”

“헛소리. 나는 그 토르갈 부족을 잘 안다. 그 작자들은… 쓸데없이 의리니 뭐니 앞세우며 남의 일에 끼어들기도 잘 하지. 그자들이 아니었다면 나도 꽤 오래전에 황제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네 아비이자, 나의 형님이었던 자. 선황의 목이 떨어진 후에.”

에리히는 등 뒤로 손을 붙들린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설마 당신이 그때의 반란을 주도했나?”

“몇 마디 쏘삭여주니 다들 잘도 움직이더군. 네 아비는 그런 멍청이들 하나 제 손으로 상대하지 못해서, 수치도 모르고 사막의 야만족들에게 달려갔다. 그런 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내 심정을 네가 알겠느냐?”

“그래서 토르갈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거절했다는 말인가? 단순히 사적인 원한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는가!”

“그까짓 놈들이 죽는 것이 대관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손을 움직일 수만 있었더라도 저자의 얼굴을 후려쳤을 것이다. 그다음에 목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야 말았으리라. 에리히는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씨근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측근을 돌아본 위든이 말했다.

“황후를 찾아내라.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빠져나간 자가 없다고 네가 보고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찾아내도록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희 둘을 나란히 죽인 다음 그 목을 내 대관식장에 매달아 놓아야 하겠구나. 저 거추장스러운 운트겔의 자식도 말이야.”

테오도르 역시 사병들에게 붙들린 채였다. 그는 아직 검을 쥐고 있었기에 아예 일어설 수조차 없도록 위에서 짓누르고 있었다. 에리히는 흙과 먼지, 그리고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때였다.

멀리서 땅이 울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위든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냐? 제국군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냐?”

그럴 리가 없다. 로크로몬서의 군대와 해적들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거리만 따져보아도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는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에리히의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든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에리히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위든이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린 에리히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더럽게 말 안 듣는 부인을 얻었다니까.”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지?”

위든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굴하지 않았다. 마치 칠 테면 쳐보라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관은 짜놓고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숙부님.”

141장 반역 (5)

위든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얼른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깨닫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당황하자 에리히를 붙잡고 있던 사병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결박하고 있던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에리히는 숨 한번 돌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여태까지 쉴 새 없이 싸워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들에게서 벗어나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 들었다. 에리히가 검을 내리치자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둘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악!”

“뭣들 하는 것이냐! 이 멍청한 놈들 같으니! 당장 황제를 죽여라!”

위든이 외쳤다. 그러나 그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뒤쪽에서부터 쏜살같이 날아든 화살이 순식간에 수십의 가슴과 머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저기 있다, 황후다!”

“토르갈이다!”

위든을 위시하여 둥글게 진을 치고 있던 사병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후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말을 몰고 달려오는 토르갈의 기세가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황궁의 드넓은 길을 내달려 곧장 적진 한복판까지 도달해 있었다. 에리히마저도 한순간 꿈인가 싶은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비해 토르갈 부족민들의 수는 턱없이 적었다. 위든은 순간적으로 안심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병들은 그들을 둥글게 에워싸고도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슬금슬금 주춤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벌써 수십이 죽어 넘어졌으니 그들로서는 긴장이 될 만도 한 일이었다.

아르사크와 위든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로 높이 묶은 아르사크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아르사크는 위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부족민들을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한 놈도 빼놓지 말고 전부 목을 베어 내 앞에 쌓아라.”

그 말과 함께 왼쪽의 진영에서 먼저 괴성이 터졌다. 티리야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둘의 목을 베고, 칼날이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다른 손으로 화살통의 화살을 빼내어 반대쪽에 있던 자의 목을 꿰뚫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말 위에서 고삐조차 잡지 않고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토르갈 전사들의 모습은 이미 한 번 기에 눌린 사병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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