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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7화 (177/191)

177화

에리히는 검을 뽑았다. 검집은 멀찌감치 던져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서 있는 그대들은 들으라.”

에리히의 목소리는 요란하게 들려오는 함성에도 결코 묻히지 않았다. 기사와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쥔 손을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의 수는 적고, 적은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이 누구였든, 어떤 자리에 있었든,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제국의 가장 훌륭한 정예이다.”

함성은 이제 가까이에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모두의 발밑을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리히도, 테오도르도, 몇백에 지나지 않는 병사들도 두려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황실을 짓밟고자 적들과 손을 잡고 제국을 어지럽힌 자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 그대들과 내가 여기서 저들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우리가 가족과 벗들은 적들의 발 아래에 엎드려 굴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은 목숨을 걸어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을 믿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쾅!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와 함께 정문이 쩍 갈라졌다. 에리히는 검을 들고 기단 아래로 내려가 말에 올랐다. 병사들은 말을 타고 있는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기마대의 병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가자, 테오.”

에리히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말을 탄 병사들과 테오도르가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힘겹게 버티던 문이 박살 난 순간, 드넓은 공간을 에워싸고 있던 성벽의 앞부분도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새카맣게 몰려드는 적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에리히는 팔목에 감긴 실팔찌를 한번 내려다본 뒤 고삐를 거세게 내리쳤다.

* * *

튈브리크에 도착한 아르사크와 로즈안나는 마차를 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알린을 통해 미리 소식을 들은 부족민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후였다. 아르사크는 잔뜩 겁을 먹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데르가를 찾았다. 그는 짐을 짊어진 채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아르사크, 여기는 준비가 다 되었다.”

“잘 되었네요. 알린은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그런가요… 곧 오겠지요. 아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부터 마차에 태우세요. 그리고…….”

아르사크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뒤쪽에서 있던 로즈안나의 손목을 잡아끌어 앞으로 데리고 나왔다.

“로즈안나를 부탁드려요, 데르가 아저씨.”

로즈안나는 잠시 상황 판단이 안 된다는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알린이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티리야와 몇몇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등에 활을 메고, 여러 필의 말을 끌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달아나기 위한 차림은 아니었다.

“아르사크 님… 아르사크 님, 잠깐만요. 안 돼요. 아르사크 님!”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은 로즈안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르사크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토르갈 부족민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고작 수십 명. 이 인원으로는 결코 승산이 없었다. 로즈안나는 발버둥을 쳤지만, 데르가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르사크 님! 안 돼요, 안 됩니다! 가시면 안 돼요!”

“아가씨, 그만두고 어서 마차에 타시게! 족장님이 결정하신 일이야. 모두가 찬성했고 이제는 무를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전부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제발 말려주세요. 어서 아르사크 님을 말려요!”

그러나 마차의 문은 닫혔다. 안에서 쾅, 하는 소리와 더불어 흐느낌이 새어 나왔지만 점차 멀어졌다. 아르사크는 몇 대의 마차가 산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티리야와 눈이 마주친 아르사크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하구나, 티리야.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사과하지 마세요, 아르사크. 아르사크가 싸우러 간다면 저는 언제 어느 때고 옆을 지킬 거니까.”

아르사크는 빙긋이 웃으며 티리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전사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아르사크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제국의 황제를 지키고자 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황궁을 공격하고 있는 위든이라는 자는 이 나라의 공작으로, 십 년 전 우리가 가족과 친구를 고통 속에 잃어갈 때 우리를 철저히 외면했던 자다.”

아르사크의 말을 듣고 서 있던 부족민들의 표정에 당황과 분노의 빛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들 모두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가족이나 친척을 그 시기에 잃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위든이 그 원흉이었다는 것을 안 이상, 그들에게는 이 전쟁을 마다할 다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적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원을 기대하기는 아마 힘들다고 봐야 할 거야. 너희들도 알겠지만 제국은 지금 전쟁 중에 있고, 경계 지역을 막기 위해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외부로 출전한 상태다. 황궁에 남은 병사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간다고 해도 모래에 물 한 방울 떨어트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언제든, 어떤 싸움이든, 포기하지 않았어.”

“족장님께서도 여태까지 우리를 포기한 적 없습니다.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맞아요! 족장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 웃기는 옷을 입고 황후까지 되셨는데!”

“비싸 보이긴 했지만! 양을 열 마리는 팔아야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소박한 자식일세. 고작 양 열 마리가 뭐냐? 양 백 마리는 돼야 족장님 체면이 서지.”

낄낄거리는 웃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아르사크는 입술을 깨물며 웃고는 말에 올라탔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가자. 말과 활이 있으니, 이제는 그 무엇이 와도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140장 반역 (4)

에리히는 들썩이는 호흡을 가다듬는 동시에 머리 위에서부터 비스듬히 검을 내리그었다. 다음에 움직일 방향을 생각할 겨를 같은 것은 없었다.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들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무조건 벤다. 그것 이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맨 앞에서 밀고 들어왔던 자들은 그럭저럭 상대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시간과 피로였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수의 사병을 어떻게, 이토록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애시당초 그들이 평범한 도적들이 아닐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만큼의 규모일 줄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머릿수가 많아지면 돌발 행동을 하는 자도 생기기 마련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 정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충성도가 높은 귀족들이 중간에서 관리를 도맡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에리히는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에리히의 곁에서 그를 호위했지만 창병대가 밀고 들어온 이후부터는 계속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었다. 원래 수가 적었던 병사들은 창병대 돌입 이후 그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에리히는 호흡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가다, 곧추선 창대를 검으로 밀어내면서 고삐를 내리쳤다. 말이 펄쩍 뛰어올랐다 착지함과 동시에 발길질을 하자 거친 신음과 함께 몇 명이 나가떨어졌다.

뒤쪽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위든은 에리히와 병사들의 의외로 오래 버티자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디몰트로 돌아가겠다던 그는 중간에 마차를 갈아타고 이 반란을 시작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로크로몬서의 군대가 북서쪽 첫 번째 경계를 뚫었다는 보고를 들은 순간, 그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한발 이르게 황궁으로 사병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전하, 나머지 사병들을 투입하셔서 한꺼번에 밀어붙이십시오.”

측근이 말했다. 그러나 위든은 좀 더 두고 보자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안쪽에 진을 친 에리히와 병사들은 드세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곧 수가 부족해질 것이다. 마지막 저항마저도 불가능해질 때가 머지않았다고 위든은 판단하고 있었다.

연달아 다섯 명을 베어낸 에리히는 번득이는 창날에 공격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위협을 느낀 말이 푸르륵거리며 머리를 흔들자 고삐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에리히는 이를 악물며 피가 뚝뚝 흘러 떨어지는 검을 오른쪽으로 치켜들었다.

에리히의 눈동자에서 파르레한 불이 튀었다. 창과 검을 앞세운 난폭한 사병들마저도 순간적으로 기세에 눌렸을 정도였다.

기싸움에 눌리면 그 순간 끝장이다. 열 명도 넘는 적을 상대로 살기등등한 에리히에게 당황한 사병들은 순간적으로 그 사실을 잊었다.

그들이 주춤거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에리히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어깨와 목, 가슴을 가리지 않고 검날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오른쪽 어깨는 이제 슬슬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런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흐름을 놓치면 그 길로 죽는다는 생각만이 계산 없이 정확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을 신속하게 처리한 에리히는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뒤쪽으로 다시 달렸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라던 소년 병사의 등 뒤로 적이 창을 휘두르려는 것이 보였다.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그에게 던졌다. 검날이 목을 관통하면서 그는 쓰러졌지만 에리히는 빈손이 되었다.

“에리히 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곧장 에리히에게로 달려오려 했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검을 던져버린 에리히는 순식간에 사병들에게 둘러싸였다. 호흡이 폐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그대로 목을 돌아 빠져나가는 기분에, 그의 어깨는 괴롭게 요동쳤다.

“멈춰라.”

에리히의 몸이 저절로 아래로 처졌다. 그와 동시에 긴 호흡이 흘러나왔다. 그대로 눈을 감으면 쓰러져 잠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아득한 피로가 연기처럼 온몸을 감싼 듯했다.

“폐하.”

위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히는 웃으려 했지만 너무 지쳐서 입꼬리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영지를 보살피러 가신다더니, 돌아오셨군요… 숙부님.”

에리히가 말했다. 위든은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간 일이 생각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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