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못 돌려받을지도 모르는데?”
“아뇨, 틀림없이 돌려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도록 해요. 비싼 물건이니까.”
마지막 말은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한 농담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에리히는 픽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을 들어 올려 팔찌를 이리저리 살폈다.
“무척 비싸 보이는군.”
“잃어버리면 나라 하나 팔아도 못 살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할 거예요.”
“무서워 죽겠네.”
몸을 일으킨 에리히가 고개를 약간 숙여 아르사크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속에서 어지럽게 뒤엉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에리히뿐만이 아니라 아르사크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중 하나라도 입 밖으로 내뱉어버리면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영영 작별하게 될 것 같았다.
첫 만남부터가 강렬한 기억이었다. 에리히는 엉망진창이 된 채 당당하게 말을 타고 들어오던 아르사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보았던 어린 시절의 모습도.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관계를 맺어왔지만, 에리히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아르사크가 유일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결코 용서받지 못했을 일도 아르사크에게만은 허용되었다. 그녀가 황후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에리히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아르사크의 자유로움을 사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유로움 그 자체가 아르사크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에리히는 있는 그대로의 아르사크가 좋았다.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
“폐하야말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지금 하시지요.”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지? 이쯤 되니 기괴할 정도야.”
“그래서 날 사랑하잖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좀 솔직해지세요.”
에리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손끝이 아르사크의 뺨을 가볍게 스쳤다.
“방금 든 생각인데, 꼭 대답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왜죠?”
고개를 숙인 에리히가 아르사크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잠깐의 온기가 닿았다 멀어진 후, 에리히가 말했다.
“몸 달으라고.”
그날 오후, 노을이 막 사라질 무렵에 한 대의 마차가 황궁의 뒤쪽을 빠져나갔다. 뒤따르는 병사들도 없고, 마차의 크기도 작았다. 마부석에 앉은 두 사람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마차는 사냥터와 이어진 숲을 빠르게 지나쳐 외곽으로 돌았다. 수도의 길거리로 접어들자, 거리의 다른 마차들과 뒤섞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북서쪽 경계 중 하나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황궁으로 날아든 것은 마차가 빠져나간 직후였다. 이제 두 개의 경계가 무너지면 적군이 수도에 다다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에리히는 황궁에 남아 있던 기마대의 정예병들을 모두 북서쪽으로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제 황궁에 남아 있는 병사는 몇백이 채 되지 않았다. 장군으로 임명된 수석 기사도 테오도르를 포함해 단둘뿐이었다.
황궁에 머물던 귀족들은 이상한 낌새를 챘기 때문인지, 아니면 코앞까지 닥치지도 않은 전쟁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모두 다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의전장관만은 머뭇거리면서도 궁 안에 남아있었지만, 에리히가 돌아가라고 하자 망설이지 않았다.
에리히는 텅 빈 홀을 내려다보며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비가 올 것처럼 바깥의 날씨가 을씨년스럽게 쌀쌀해지고 있었다.
“테오도르.”
“네, 에리히 님.”
“이 상황에 누군가 황궁으로 쳐들어온다면 내 목을 치는 것 정도는 어린애 손목을 꺾는 것만큼이나 쉽겠지. 안 그러냐?”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에리히의 목소리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위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테오도르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에리히 님. 제가 있으니까요.”
에리히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하긴, 그렇지. 너 하나를 꺾으려면 애를 좀 먹을 것이다. 네 평소 모습만 봐서는 알기 힘들지만, 운트겔은 옛날부터 결코 쉬운 벽이 아니었지.”
멀리, 바깥쪽을 향해 열린 홀의 정문으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에 꽂힌 깃발로, 황궁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지키던 병사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시는군.”
“벗어나길 바라셨습니까?”
테오도르의 질문에 에리히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레나의 목숨값을 받아내야지.”
139장 반역 (3)
얼굴이 희게 질린 채 달려온 병사는 아직 앳된 소년이었다. 아마 새로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에리히는 그가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병사가 말했다. 아직 변성기도 미처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에서는 탁한 쇳소리가 났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건 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 본론부터 얘기해라.”
“고, 공작… 전하께서, 엄청난 수의 사병들을 이끌고… 화, 황궁으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폐… 폐하, 서, 설마… 아니겠지요? 공작께서… 병사들을 데리고 오시는 이유가 설마.”
“설마, 뭐. 반란은 아닐 거라 믿고 싶으냐? 안타깝지만 네 생각이 맞을 것이다.”
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지만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차마 황제를 눈앞에 두고 달아날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에리히가 말했다.
“황궁에 남은 병사들을 모두 안쪽으로 모이게 해라. 조금씩 나눠서 싸워봐야 어차피 승산이 없으니 열심히 싸우는 게 최선이겠지.”
“폐, 폐하… 그렇다고는 해도, 수가…….”
“나도 알아. 말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열 명씩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야 백 명이 한꺼번에 맞붙어보는 게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지 않겠나? 어서 가서 알려라. 그리고…….”
병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눈을 굴리더니 에리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발은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부산하게 동동거리고 있었다.
“몇 살이지?”
“제, 제 나이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저… 저는… 여, 열다섯 살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였다. 열다섯 살이면 본격적으로 입대한 것조차 아닌, 기사들의 심부름이나 하고 있을 나이였다. 앞으로 이 년은 더 지나야 견습 딱지를 뗀 일반 병사로서 취급받게 될 것이다. 급박한 시기다 보니 이런 견습 병사들이 실전에 투입돼 남게 된 모양이었다.
“네 또래의 병사들이 몇 명이나 있지?”
병사는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펼쳐 수를 세려다 대답했다.
“여섯 명이 있습니다. 모두…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좋아. 나머지 병사들을 전부 모이게 한 다음, 너희 여섯 명은 서쪽의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라.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공격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이해했느냐?”
소년 병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어차피 그들이 빠진다고 해도 여섯 명. 제대로 검조차 쥐어보지 않았을 아이들을 희생시켜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테오도르.”
“말씀하십시오, 에리히 님.”
잠시 옛 생각에 잠겼던 에리히는 금세 그것을 떨쳐냈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패배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아르사크의 말대로 지레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에리히의 성미에도 역시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검을 가져와라.”
테오도르는 안쪽으로 들어가 황제의 검을 가지고 나왔다. 카툴라의 황족, 그중에서도 황위 계승자에게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검이다. 전쟁이 흔한 시절에는 이 검이 황제의 허리에서 떠날 날이 없었지만, 에리히가 실제로 이 검을 쥐어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미 삼아 검술 대련을 할 때도 이 검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만큼 중요하고 역사가 깊었다.
“로즈안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라. 우리 중 제일 강한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에리히가 농담하듯 말하자 테오도르는 숨죽여 웃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튈브리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요. 무사히 떠났을 것입니다. 에리히 님께서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 망나니를 염려해?”
“사실은 마마를 보내고 싶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아닌 척은 그만하십시오.”
“입 놀리는 게 좀 자유로워진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하냐?”
“그렇다고 지금 저를 죽이실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에리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할 말이 궁했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살아나면 두고 보자.”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벌을 내리시든 기쁘게 받겠습니다.”
황궁의 가장 안쪽,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정원에 병사들이 모였다. 에리히는 홀에서 정원으로 이어진 기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넉넉히 잡아도 사백 명이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위든이 거느린 사병의 수는 아무리 적어도 이 병사들의 배는 될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 병사들은 오로지 황궁과, 황제인 자신만을 지키기 위한 병사들이었다. 양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황제 한 사람만을 위해 병사들을 거느린다면 전쟁터로 내몰리는 것은 결국 일반 백성들의 몫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그것만은 할 짓이 못되었다.
병사들 중에는 아까의 그 소년 병사와, 엇비슷한 나이대의 소년들이 섞여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우레 같은 함성 소리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이제는 달아나게 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약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른 저녁의 별자리를 뒤덮은 먹구름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