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예상과 달리 에리히는 그리 놀라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그도 역시 아르사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확실한 증거를, 그가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는 증거가 부족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유레나를 죽인 것이 위든임이 확실해진 이상, 그가 반역을 일으키든 일으키지 않든 에리히에게는 그를 잡아들여 추궁할 이유가 한 가지는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위든도 알게 된다면 결코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열 살짜리 조카를 죽인 것을 실수라고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유레나의 죽음으로 인해 선황후는 물론이거니와 선황까지도 병이 나지 않았던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대체 왜 유레나였을까?
“그대의 말대로 숙부님은 분명 황위를 찬탈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전쟁 역시도 그걸 위해 꾸며진 일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북서쪽과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출병했으니, 황궁에는 이제 쓸 만한 병력이 별로 없으니까요.”
“만약 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숙부님의 병사들이 들이닥치겠군. 역시나… 토벌대를 아무리 꾸려도 도적떼에 대한 보고가 사라지지 않을 때 좀 더 확실히 파보았어야 했는데. 어제까진 산길에서나 날뛰던 도적놈들이 오늘은 공작의 사병이라. 용케도 여태까지 감춰뒀어.”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에리히는 이내 의자 아래로 다리를 쭉 뻗으며 고개를 젖혔다.
천장의 무늬들이 춤을 추듯 빙빙 돈다. 마치 처음으로 술을 마셨던 날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급박한 상황에, 실없이 웃음까지 났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군. 유레나는… 숙부님을 마치 아버지처럼 따랐어.”
“아이들의 순진함을 지저분하게 이용하는 어른들은 수도 없이 많지요.”
“알아,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가 안 돼. 유레나가 죽었다고 한들… 숙부님이 얻은 것이 뭐였을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깊이 상심하셨지만, 그분들이 꼭 돌아가실 거라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었어. 게다가 나는 그때 이미 황태자였고. 단지 몇 년 동안의 대리청정…… 그 무의미한 시간을 위해 유레나를 죽이셨다는 건 말이 안 돼.”
“어쩌면 기회를 보아 폐하께도 손을 쓰려 했을지 모르지요.”
“…그랬을까? 그랬겠지. 내가 여태까지 살아있는 것이 눈엣가시였겠군.”
에리히는 허탈한 소리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타고난 성격상, 아무리 가깝고 유일한 친척이라고 해도 유레나처럼 온 마음을 다 내맡기며 그를 따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유일한 혈연이었다. 숙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희미하게나마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러다 보면 늘 그의 곁에 있던 어머니의 얼굴도 생각났다.
선황이 반란을 겪었을 때도 가만히 있었던 그가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니,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형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조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걸까?
쓸데없는 질문이다. 에리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공격해 오는 자를 얌전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에리히의 시선이 아르사크에게로 향했다. 위든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확신이 든 지금, 아르사크를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도 좋아.”
아르사크는 에리히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자치구를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다. 내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폐하, 지금… 그 말씀은, 부족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아. 그대는 이 길로 황궁을 나가도록 해. 부족들을 이끌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 로크로몬서의 군대는 아직 여기까지 오지 못했고, 온다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 안전하게 머물 만한 곳을 찾을 수 있겠지. 필요한 것은 최대한 마련해 주겠다. 그러니 돌아가.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돼.”
138장 반역 (2)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에리히를 쳐다보다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자 정말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자치구를 준다는 약속은 지키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아르사크의 표정을 본 에리히는 마치 쓴 것을 깨문 사람처럼 눈썹을 찡그린 채 짧게 웃으며 말했다.
“꼭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군.”
“정확히 잘 표현하셨네요. 폐하께선 방금 절 모욕하셨습니다.”
“관계도 없는 나라의 사정에 휘말려 죽는 게 소원이었나? 그런 줄은 미처 몰랐는데.”
“관계도 없는 나라?”
아르사크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탕,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에리히는 여전히 조금 전 지었던 표정 그대로 아르사크를 올려다볼 뿐, 놀라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남을 보듯 무심했다. 정말로 아르사크가 이 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처럼.
“왜 그러지? 설마 이제 와서 황후로서 자리를 지키며 명예롭게 죽고 싶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말 다 했어요? 죽다니, 누가? 난 죽지 않을 겁니다.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나요? 그렇게 약해빠진 황제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에리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아르사크가 빈정거렸다. 뒤이어 에리히가 말했다.
“패배할지 승리할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이상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나?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심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면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겠지. 그러니 떠나라는 거다. 불확실한 승리에 목숨을 거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거야.”
“처음부터 제멋대로더니, 끝까지 이렇게 제멋대로 굴 줄은 몰랐습니다. 감상에 빠지는 건 자유지만, 날 비겁자로 만들지는 말아요.”
둘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쏘아보며 대치하듯 말이 없었다. 에리히는 답답했고 아르사크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곳이 남의 나라든 아니든, 급박한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자신만 꽁무니를 빼는 것은 아르사크의 성미에 결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에리히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르사크를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위든은 반드시 만만찮은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에리히가 아무리 아르사크를 지켜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일촉즉발인 상황에서는 누가 죽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르사크가 죽는 모습 같은 것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이 죽는 모습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반란을 평정하지 못한 황제가 죽게 되었을 때,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황후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에리히는 다시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는 기세로 버티고 있었는지, 그는 갑자기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사람 같았다. 에리히가 말했다.
“제발 부탁이야.”
그의 입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사크는 목 안이 차차 얼얼하게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숙부님은… 아니, 위든, 그자는… 그대를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대는 물론이고 그대의 부족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버리겠지.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야. 단호하고 냉정하지. 여태까지 그가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 애써 믿어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됐으니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겠군.”
“그자가 어떤 자인지는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 겁니다. 왜 그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에리히만큼은 아니지만 아르사크도 그간 위든의 표면적인 온화함에 주체적으로 속아온 셈이었다.
보기와 달리 음험하리만치 머리가 좋은 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자가 토르갈의 도움을 모른 척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 그를 추궁하는 것보다 에리히의 부탁대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렇게 모든 것이 까발려진 지금, 그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빠른 길이 과연 있을까?
“그러니까 부탁한다는 거다. 그대가 그에게 받을 빚이 아직 남아있다면 지금은 떠나도록 해. 차라리 훗날을 도모하는 편이 훨씬 더 승산이 있을 것이다.”
“폐하!”
“가능하다면… 로즈안나를 부탁한다. 테오도르는 죽는 한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지.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도 테오도르는 필요한 존재야. 로즈안나는… 운트겔이나 랜크버 백작도, 만약 위든이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그대에게 부탁하지. 로즈안나를 데리고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
아르사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뒷걸음질을 쳤다. 테이블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면서도 눈은 여전히 크게 벌어진 채 에리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란. 그제야 반란이라는 말이 무서울 정도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위든이 성공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질서는 통째로, 뿌리부터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에리히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지냈거나, 그에게 충성했던 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거나 유폐될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가문은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축출될 대상이었다.
“…이길 자신이 있나요?”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리히를 깨웠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반쯤.”
“나머지 반은?”
“지겠지.”
아르사크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따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와 싸워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나? 정말로?
잠시 시선을 내린 채 가만히 서 있던 아르사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팔목에 묶여 있던 팔찌 하나를 풀어냈다. 여러 가지 색의 실을 교차로 엮고, 중간에 은으로 된 납작한 장식을 끼운 실팔찌였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재미 삼아 만든 것으로, 유목민들이 나쁜 일을 막기 위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러 가지 장신구 중 하나였다.
아르사크는 의자의 팔걸이에 걸쳐진 에리히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매듭을 짓자 약간 빠듯하기는 해도 잘 감겼다. 에리히는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팔찌의 매듭을 매만지던 손을 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빌려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