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4화 (174/191)

174화

“누가 샀는지도 적혀 있어?”

“예? 아니… 아니요. 그, 그건 적혀 있지 않은데… 아니, 그런데 이상한걸…….”

“뭐가?”

샤바넬은 아르사크의 눈앞에 장부를 펼쳐 보여주었다. 숫자와, 알아보기 힘든 기호들이 빼곡하게 적힌 페이지를 보던 아르사크가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설명해.”

“아니, 여기를 좀 보세요. 그때 이 독을 구매한 사람이, 그러니까… 어음을 지불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 무, 물론 황후 마마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수도에서 어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예.”

“어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카툴라에서는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어음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르사크는 잘 알지 못했다. 어음을 발행해 본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샤바넬이 말했다.

“튈브리크에서 어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공작 정도의 작위를 가졌거나… 그, 그게 아니면 황족 정도라서요. 아니면 그… 그런 분들의 보증을 받은 사람이거나…….”

아르사크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샤바넬은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한껏 움츠러들었지만, 아르사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안색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공작 아니면 황족만 사용할 수 있는 어음을 이런 가게에서, 하필이면 자색전갈의 독을 구매하는 데에 썼다.

굳이 무엇 때문에?

“왜 어음을 썼을까?”

아르사크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을 한 것이었지만, 샤바넬은 자신에게 묻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 저기… 어음에는… 무, 문양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요?”

“문양이라니?”

“그러니까… 어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아, 아마도… 비밀을 지키라는 뜻으로… 어음을 내놓지 않았을지.”

“그 어음은 지금 없겠지?”

“그것까지는 잘… 호,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 찾아볼까요?”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바넬은 허둥거리면서 먼지 쌓인 책더미 아래에서 궤짝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그런 와중에도 단도의 끄트머리가 자신의 뒤통수에 닿아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커다란 자물쇠를 열자 끽, 하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궤짝이 열렸다. 안에 금화 몇 개가 들어있는 것이 보였지만, 대부분 낡은 종잇조각들이었다. 샤바넬은 그중에서 한 무더기의 어음을 찾아내었다. 대부분 사용 기한이 없는 것들이거나, 금액이 꽤 큰 것들이었다.

아르사크는 어음에 찍힌 문양들을 유심히 살폈다. 귀족 가문의 문양을 다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 볼핀 후작가의 문양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후작가가 사라졌으니 휴지 조각이리라.

“잠깐, 방금!”

“어, 예? 방금요? 이… 이것 말씀이신가요?”

귀퉁이에 보풀이 일어난 어음 한 장이 샤바넬의 손에 의해 끌려나왔다. 아르사크는 허탈한 한숨을 쉬며 단도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 어음을 집어 들었다.

어음에 찍힌 것은 틀림없이 카툴라 황실의 문장이었다. 어음이 발행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4월이었다.

137장 반역 (1)

“아르사크, 도대체 무슨 일인데? 설명 좀 해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샤바넬의 가게를 나서자 알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샤바넬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던 아르사크는 한참이 지나서야 뭔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알린이 묻는 말에도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르사크!”

“알린, 내 말 잘 들어. 중요한 일이야.”

아르사크는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 앞으로 들어 올렸다. 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사크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아르사크가 말을 마친 순간, 알린은 눈에 띄게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아니지, 설마 전쟁이 일어난 것도…….”

중얼거리던 알린은 할 말을 잊었다는 듯이 아르사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르사크에게서 들은 말은 그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르사크는 단호한 표정으로 알린의 손을 잡았다.

“알겠지? 반드시 준비하고 있어야 해.”

“그래… 알겠어. 그렇지만, 여기서 무슨 수로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겠어?”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신호를 보낼 거야.”

“잠깐만, 아르사크. 신호라니…….”

“부탁해, 알린.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너에게 맡긴다. 난 빨리 돌아가 봐야 해.”

그렇게 말한 아르사크는 알린이 붙잡기도 전에 재빨리 뒷골목을 벗어났다. 그들을 샤바넬의 가게로 안내한 허슨은 계단을 다 올라오자마자 부리나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던 알린은 입속으로 토르갈식 욕을 중얼거리며 마을을 향해 뛰었다.

“아르사크 님!”

황궁으로 돌아온 아르사크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로즈안나였다. 나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르사크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거의 신경쇠약 직전까지 몰렸던 것이다.

다행히 아르사크는 무사했다. 로즈안나는 속으로 감사 기도를 읊조리고는 얼른 아르사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아르사크 님을 모시다가 제가…….”

“로즈, 지금 당장 폐하를 여기로 모셔와.”

“네? 폐하를요? 일단 아르사크 님의 옷부터…….”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어서 가. 빨리. 급한 일이라고 해.”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로즈안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로즈안나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옷장에서 꺼낸 드레스를 내려놓은 뒤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르사크는 굳은 표정으로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샤바넬의 장부를 펼쳤다. 전갈의 독을 판매한 기록이 적힌 페이지에는 예의 그 어음도 끼워져 있었다.

‘황실의 문양이 찍혀 있다는 건 황족이 발행했다는 거야. 십 년 전 4월이면… 황녀가 죽은 것이 언제지? 만약 날짜가 맞다면 이건 분명… 하지만 도대체 누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르사크는 유레나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에리히의 동생이라는 것과 여자아이였다는 것, 로즈안나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는 것, 열 살에 죽었다는 것.

고작 열 살에 불과한 아이를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까? 정치적인 이유로도 말이 안 되고, 사적인 이유라면 더더욱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에리히가 들어왔다. 여전히 기마대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아르사크를 본 에리히가 표정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옷은 대체 뭐지? 대체 어디서 그 옷을…….”

“여동생이 죽은 게 언제죠?”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에리히는 물론, 뒤에서 듣고 있던 로즈안나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수상쩍은 공책이 에리히의 눈에 띄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언제 죽었죠? 십 년 전, 정확히 언제? 날짜를 기억하고 있나요?”

“내 질문이 우선이야. 그건 도대체 왜…….”

“4월 16일입니다, 마마.”

뒤쪽에 서 있던 로즈안나가 앞으로 나섰다. 동그랗게 커진 로즈안나의 눈은 두려움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기대로 떨리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유레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16일, 유레나의 기일. 로즈안나가 십 년 내내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던 날짜였다.

“아팠던 건 언제지? 로즈안나, 말해봐.”

“아프기 시작하셨던 건… 돌아가시기 열흘 전쯤이었습니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르사크는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쯤 되자 에리히도 더는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르사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에 놓인 공책을 집어 들어 펼쳤다. 그러자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어음이 낙엽처럼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황실에서 발행한 어음이 아닌가.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거기 적힌 내용을 읽어보십시오, 폐하.”

에리히는 홀린 사람처럼 공책에 적힌 글씨들을 눈으로 훑었다. 판매 기록, 매입 기록, 대금 처리 기록. 어디로 보나 평범한 장부 같았지만, 거래된 물건의 내용은 결코 심상치 않았다. 에리히의 시선이 한 군데에서 멈췄다. 십 년 전 4월의 기록이었다.

“이건, 도대체…….”

“십 년 전에 그 어음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었습니까? 황실의 어음을 다른 사람에게 임의로 발행하거나, 보증을 붙여 사용하기도 하나요?”

에리히의 고개가 가로로 느리게 흔들렸다. 보통 고위 귀족이 발행하는 어음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돌고 돌기도 한다. 그러나 황실에서 발행하는 어음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어음을 발행할 자격이 있는 본인이 아니면 사용조차 금지된다.

그 말인즉, 십 년 전에 샤바넬의 가게에서 자색전갈의 독을 구입한 인물은 황족 중 한 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때 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 황족은 단 세 명뿐이었다.

“폐하.”

“…숙부님이다.”

로즈안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새하얗게 된 채 입을 틀어막고 있던 로즈안나는 갑자기 욱, 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르사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과 의혹을 가지는 것은 충격의 차원이 달랐다.

“공작 전하가 어째서……? 어째서 황녀를 죽였다는 말인가요? 그럴 필요가…….”

“없지. 이유를 알고 싶다면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든은 이미 이틀 전에 황궁을 떠났다. 지금쯤이면 붙잡으려고 해도 한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낡은 어음은 에리히의 손바닥 안에서 힘없이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르사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튈브리크에 그 전갈의 독을 파는 상점이 한 곳 있더군요. 주인을 찾아가 추궁했지만 그 정도 이외에는 구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습니다. 십 년 전에 그 장부를 기록했다는 그의 아버지는 한참 전에 죽어버렸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최근,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색전갈의 독을 두 병 더 사간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독을 네페에서 사용했겠군.”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은 에리히의 몸이 잠시 휘청거리자, 아르사크는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정신 차리세요, 폐하.”

“…정신은 아직 말짱해.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겠군.”

아르사크는 의자를 가져다 에리히를 앉게 한 뒤 자신은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로 켜켜이 내려앉아 쌓인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르사크 쪽이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

“공작은 머잖아 곧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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