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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3화 (173/191)

173화

“튈브리크에서 그 독을 취급하는 가게는 여기밖에 없다고 해. 하지만… 아르사크, 네가 말한 그자가 꼭 여기서 독을 구했다고 장담할 순 없진 않겠어?”

“없지. 하지만 저 샤바넬이라는 자가 그걸 직접 구한 게 아닌 이상 누군가 여기에 주기적으로 독을 팔러 온다는 말이야. 누가 그 독을 대는지만 알아도…….”

“기다렸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샤바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사크는 그의 손에 들린 조그만 가죽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했다. 샤바넬이 주머니의 입구를 풀자 어른의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유리병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투명한 물 같은 것이 반쯤 들어차 찰랑거리고 있었다.

“자, 이게 바로 그 무시무시한 전갈의 독이라고. 어때? 실물은 처음 보지? 이게 뭔지 모르는 놈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홀라당 마셔버리고 말 것처럼 생기지 않았어? 이 정도 양이면 사람 한두 명은 우습지. 마침 이 반병이 마지막이야. 운이 아주 좋은 거라고.”

136장 뜻밖의 그림자 (6)

아르사크는 기묘하게 들뜬 샤바넬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이 독이 필요해서 온 것도 아닌 데다가, 자색전갈의 독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샤바넬은 아르사크의 그런 기색을 깨닫지 못하고 한참을 신이 나서 더 떠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샤바넬의 시선이 아르사크와 알린, 그리고 허슨까지를 재빠르게 훑었다. 말꼬리가 수상하게 길어지는 것을 눈치챈 아르사크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킨 채 샤바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렸다. 아르사크는 샤바넬을 응시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샤바넬이 말했다.

“이게 워낙 귀한 것이다 보니 값이 좀 비싸. 아, 물론 내 친구 허슨의 소개로 온 것이기도 하고…….”

‘내 친구’라는 말을 할 때 샤바넬의 목소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허슨은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샤바넬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듯했다.

“…심지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구하는 거니 내가 특별히 싸게 쳐주지. 어디 보자… 금화 서른 개 정도면 되겠군. 내 쪽이 살짝 밑지겠지만 나도 장사를 하는 입장이니 그 정도는 단골 삼는 밑천이라고 생각할게.”

듣고 있던 알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금화 서른 개는 결코 만만한 값이 아니다. 그가 나서서 한마디 하려는 순간, 아르사크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샤바넬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밑지고 되팔아도 금화 마흔 개는 받겠지.”

아르사크가 내놓은 것은 어린애 주먹만 한 보석이었다. 샤바넬뿐만 아니라 허슨까지도 후드 밑에 가려져 있던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교활하게 생긴 입가를 움찔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려 애쓰던 샤바넬은 독이 든 병을 슬그머니 밀어놓고 아르사크가 내놓은 보석을 살폈다.

“아… 하, 허… 이거 뜻밖으로 통이 큰 아가씨였군. 내가 몰라봤어. 음… 몰라봤고말고. 하지만 말이야, 계산을 빨리하자면 이런 것보다는 돈을 주는 게 훨씬 좋아. 하지만 이번엔 특별히, 일단 확인부터…….”

“이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빠져나온 단도가 나무로 된 매대 위에 거꾸로 꽂혔다. 샤바넬은 순간적으로 보석과 독이 든 병을 양손에 움켜쥔 채 물러서려 했지만, 그가 움직이는 것보다 아르사크의 손이 한발 더 빨랐다. 샤바넬의 멱살을 낚아챈 아르사크는 그의 고개가 뒤쪽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경고하듯 말했다.

“안에 누가 있든, 뭐가 있든, 불러내는 순간 당신을 포함해서 전부 죽은 목숨일 줄 알아.”

“이, 흐, 힉…….”

“난 지금 아주 바쁘고 심기가 불편해서 같잖은 사설을 들어줄 마음이 별로 없어. 샤바넬이라고 했나? 나는 아르사크 하르슈다. 네가 아무리 이런 컴컴한 곳에 처박혀 산다고 해도 내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겠지?”

“아, 아르, 아르사크라면, 화, 황……!”

멱살을 거머쥔 아르사크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샤바넬은 컥,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알겠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펼쳤다.

뒤에 서 있던 허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다 내빼려 했지만 알린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젓자 슬그머니 구석진 자리로 물러났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하도록 해.”

“아, 알, 알겠… 컥! 알겠으니 이것 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이 독을 최근에 다른 사람에게도 판 적이 있나? 말해!”

“이, 이것 좀 놓고……. 수,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고…….”

반은 엄살인 듯했지만 실제로 샤바넬의 안색은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그를 훑어보다가 매대 위로 그를 패대기치듯 놓았다. 쾅, 하는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찧은 샤바넬이 고개를 들기 전에, 아르사크는 거꾸로 꽂았던 단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여기를 봐라.”

샤바넬의 시선이 단도의 날을 향했다가, 손잡이를 쥔 아르사크의 손을 향했다. 아르사크가 다시 말했다.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싶어지거든, 이 단도가 어떻게 움직일지 잘 생각해 봐. 이제 질문에 대답해라. 자색전갈의 독을 다른 사람에게 판 적이 있어, 없어?”

“이, 이, 있어. 아, 아니, 있어요. 있습니다. 두, 두 병을.”

“그게 언제지? 어떤 사람이 샀는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나?”

“저기… 그러니까… 어, 얼굴은 기억이 잘… 그… 저, 허슨처럼 후, 후드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얼굴은 못 봤습니다. 정말로요. 진짭니다.”

그의 말은 진짜인 듯했다. 아르사크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시 물었다.

“예전에는? 판 적이 있나?”

“예… 예전이라면 언제요? 이… 독은 그, 그렇게 자주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드, 들어오기만 하면… 어, 어디서든 소문을 듣고 차… 찾아오는 놈들이 있는데.”

“여기서 장사를 한 지 얼마나 됐지? 십 년이 넘었나?”

샤바넬이 잠시 대답을 어물거리는 사이, 구석에 서 있던 허슨이 참견하듯이 끼어들었다.

“이, 이 가, 가게는 사, 삼대…째, 하, 하고 이, 있는 가게…입니다. 화, 화, 황후, 마마.”

“허슨, 쓸데없는 소리… 윽! 마, 맞습니다. 허슨의 말이 맞아요. 하, 할아버지 대부터… 나… 나는 여기의 주인이 된 지 이제 겨우 오 년쯤… 정말이에요!”

오 년이라면 유레나가 죽고 난 뒤 시간이 한참 지나서다. 아르사크는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샤바넬의 뒷덜미를 놓았다.

“그럼 그 전의 일들은 전혀 모른다는 건가?”

아르사크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샤바넬은 호들갑스럽게 숨을 헐떡거렸다. 매대 위에 짓눌렸던 뺨에는 거친 나뭇결에 눌린 흔적이 역력했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탓인지, 아니면 아르사크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샤바넬은 뜬금없는 소리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아… 아버지가 남긴 장부가 있습니다. 그 장부에… 무슨 독을 언제 팔았는지 기록돼 있어요. 얼마에 팔았는지도요. 무, 물론 누가 사 갔는지는… 써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호, 혹시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요.”

“안내해.”

“예? 아니요, 그게, 저 안에 있어서… 헤, 헷.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귀한 분이신데…….”

“안내하라고 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샤바넬이 매대를 돌아 나오자마자, 아르사크는 쏜살같이 그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옆구리에 단도의 끄트머리를 대고 눌렀다.

“힉……!”

“안에 몇 명이 있지?”

“아, 안에요? 아… 아무도 없는데요?”

“널 죽이고 내가 직접 장부를 찾을까?”

“세, 세 명입니다.”

세 명. 샤바넬을 포함한다고 해도 네 명 정도라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아르사크는 단도를 쥔 손에 단단히 힘을 주며 말했다.

“좋아. 샤바넬.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똑똑히 듣도록 해. 들어가자마자 네 친구들 세 명에게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말하는 거야.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넌 두 번 다시 가게 문을 열 필요가 없게 될 거야. 이 지하실 전체가 네 관이자 무덤이 될 테니까. 내 말 이해했어?”

도저히 이 상황은, 샤바넬 같은 자의 머리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던 일이었다. 설마 단도 하나를 쥔 여자에게 붙들려서 이런 험악한 협박을 듣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샤바넬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국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 돌을 던지듯 내놓은 보석, 그리고 아르사크라는 이름까지. 이 여자는 정말로 그 무시무시하다는 황후임이 틀림없었다. 샤바넬 같은 뒷골목 장사꾼 따위야 죽이든 매달든,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르사크가 샤바넬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테이블에서 노름을 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아르사크보다 머리 한 개씩은 더 컸고 덩치도 다부졌다.

그들의 허리에는 환도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눈속임용으로 차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몸을 일으킨 순간, 샤바넬은 옆구리에 닿은 칼끝이 보다 힘 있게 눌려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앉아! 아, 아니, 가만히들 있어! 이, 이분은 내 귀한 소, 손님이니까. 가, 가만히 있어. 절대로 움직이지 마!”

세 명의 남자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실룩였지만 샤바넬이 그렇게 말한 이상 도리가 없었다. 아르사크는 자신을 쏘아보는 세 쌍의 험상궂은 시선을 뒤로한 채 샤바넬과 함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이게 그 장부입니다.”

“십 년 전쯤 자색전갈의 독이 판매된 기록이 있는지 찾아.”

“십 년… 전이요? 그… 그때는 저기, 사막 쪽에서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아서 아마도 없을…….”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내가 직접 찾을 거야.”

아르사크 자신이 직접 찾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샤바넬이 아니었다. 그는 얼른 장부를 펼쳐 날짜를 뒤지기 시작했다.

장부는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었고, 귀퉁이가 해졌을 뿐 보관 상태도 그럭저럭 훌륭해서 조그만 글씨까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판매한 기록만이 아니라, 언제 무슨 독을 매입했는지도 전부 기록돼 있었다.

“아! 이, 있습니다. 딱 십 년 전에… 한 병. 그 이후로는 한 이 년 동안 자색전갈의 독을 구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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