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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2화 (172/191)

172화

135장 뜻밖의 그림자 (5)

튈브리크로 가는 길의 풍경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에 없이 행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모두 남쪽 방향을 사수하러 가는 병사들이었다.

광장에서 알린을 만난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티리야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알린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달리 없었다.

아르사크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텅 빈 길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도와준다던 사람은?”

말에서 내리며 아르사크가 묻자, 알린은 그녀를 대신해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골목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광장에서 만날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넌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게 된 거야? 혹시 뭐 위험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아르사크, 너 지금 우리 어머니랑 똑같은 투로 말하고 있다는 것 알기는 하냐?”

“네 어머니는 현명한 분이셨잖아, 알린.”

“나는 어머니만 못하단 말이로군, 잘 알았어.”

둘은 키득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르사크와 알린은 동갑내기였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티격태격하기를 잘했다.

그 현명하던 알린의 어머니도 십 년 전 전염병에 남편과 딸을 동시에 잃고 다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처럼, 아르사크 또래의 아이들은 고아가 많았다.

“오는 길에 병사들을 많이 봤는데, 오히려 경비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네.”

아르사크의 말에 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터지자 다들 소집되어 나갔어. 총독 휘하의 소수 병사들만이 남아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지. 일반인들도 언제 징집될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분위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로선 사정 돌아가는 걸 알 수가 없었어.”

“어떻게 된 일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로크로몬서라는 나라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전쟁을 일으킨 거고, 거기에 대응하느라 황궁도 야단법석이야.”

“로크로몬서라면 북쪽 근방의 작은 왕국이지? 우리하고는 영 상관없는 곳이어서 이름만 들어봤는데.”

둘은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뒷골목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다다랐다. 말을 끌고 다니기에는 힘든 곳이었으므로 알린이 알고 지내던 상점의 주인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맡겼다.

날씨가 우중충했다. 건물의 지붕에 달린 풍향계나 조그만 깃발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작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북적거리던 거리도 오늘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값비싼 향수나 장신구를 파는 상점들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말을 맡긴 아르사크와 알린은 상점가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복잡한 튈브리크 안에서도 더욱 복잡한 곳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좁은 길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정신없이 엮여 있어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경쟁적으로 지어진 건물의 지붕들이 좁다란 길 위로 그늘을 드리워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아르사크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은 주정뱅이나 노숙자, 죽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자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긴장한 어깨를 한번 추슬렀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알린?”

“이제 거의 다 왔어. 이쪽이야.”

알린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틈으로 앞장서서 들어갔다. 이런 곳이 정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는가 의심스러웠지만 자세히 보니 곧 허물어질 것처럼 이끼가 가득 낀 돌벽에 작은 문들이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상점들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는 방식으로 입구를 꾸며놓은 반면, 이곳의 입구들은 조금이라도 덜 눈에 띄게 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골목의 중간쯤 접어들었을 때, 으슥한 모퉁이에서 키 작은 누군가가 알린과 아르사크 앞으로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긴장해 있던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허리띠 안쪽에 매단 단검을 뽑으려 했지만, 알린이 먼저 손을 들어 아르사크를 제지시켰다.

“저 사람이야, 내가 말한 사람. 이봐요, 허슨. 나예요.”

허슨이라는 자는 낡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사방이 다 보이는 좁은 골목에서도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며 무척 초조한 기색이었다.

다 해진 망토 밖으로 드러난 손끝은 갈퀴처럼 갈라져 있었는데, 손가락 끄트머리를 쉴 새 없이 부비고 있어 마치 겁먹은 생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어, 아, 알린. 그, 그… 그래. 기, 기다… 기다리고 이… 있었어.”

“나랑 약속한 것 잊지 않았죠? 여기 이 사람은 내 친구예요. 기마대의 병사죠. 그러니까 우릴 속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 무, 물론, 이, 이야. 내… 내가 아, 알린은, 다, 다시는 소, 소, 속이지 않…는다고 야, 약속했잖아. 약속했어. 으음… 그, 그런, 그런데 마, 말이야…….”

허슨은 말을 심하게 더듬는 사람이었다.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말을 더듬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말을 놓치기 십상일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미간을 찡그린 채 허슨을 내려다보다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하시오.”

아르사크는 원래 목소리가 그리 가늘고 높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어조를 낮추면 젊은 남자 목소리와 엇비슷하게 들렸다. 허슨은 좁은 어깨를 움찔하더니 후드 너머로 고개를 살짝 들었는데, 검게 드리운 후드의 그늘 밑에 가린 윤곽이 이상하게 울룩불룩해 보였다.

“헤, 헷, 아… 아, 알린의 치, 친구라서 그런… 그런가? 이… 이쪽 치, 친, 친구도 꽤… 서, 성격이 부, 부, 불같은 것 가… 같은데, 내, 내가 말하…려는 거, 것도 바로 이… 이런 거야. 샤…바넬도, 성질이 아, 아주 급… 급하거든. 그러니까, 무, 문제가… 생기지 아, 않도록 서, 서로 조심…하자, 이, 이 말이야.”

샤바넬이라는 자가 아마도 상점의 주인인 듯싶었다. 아르사크와 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슨은 주춤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오른쪽 구석의 조그만 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 문은 뒷골목의 어떤 문보다도 눈에 띄지 않게, 매우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여… 여기야. 드, 들어오라구. 계, 계단이니까, 구… 굴러 떨어지지 아, 않게 조, 조, 조심해.”

문은 터무니없이 작아서 허슨조차도 몸을 약간 굽혀야 했다. 축축한 벽에 매달린 기름 램프의 불빛은 너무나 어두워서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또 하나의 문이 나왔다.

허슨은 손톱이 비죽이 자란 손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다. 일반적인 노크와는 달리 이상한 리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암호일 것이다.

“가, 가자고.”

허슨이 말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지하 특유의 습기와 더불어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풍겼다. 알린과 아르사크가 동시에 미간을 찡그리는데, 지저분한 선반 뒤쪽에서 주인인 성싶은 남자가 음험한 웃음을 띤 채 걸어 나왔다.

“이게 누구야. 말더듬이 허슨이잖아? 나한테 진 빚을 드디어 갚으러 온 모양이지?”

“그, 그건 조… 조금만 더, 기… 기다려주게. 샤바넬. 우, 우린 오, 오래 알아온 사, 사이…….”

쾅!

커다란 소리가 났다. 샤바넬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아르사크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샤바넬이라는 자만 있는 것 같지만, 가게 안이 하도 복잡하고 어두워서 확신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묵은 빚은 나중에 둘이 알아서 청산하든가 해요. 우린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까.”

알린이 앞으로 나섰다. 샤바넬은 이건 또 뭐냐는 듯한 눈으로 알린과 아르사크를 훑어보다가, 기분 나쁜 웃음을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얼굴은, 보아하니 토르갈인가 뭣인가 하는 자들이로군? 근데 뒤쪽의 저 곱상한 놈은 어째 기분 나쁜 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봐, 당신, 군인이야?”

“군인인지 아닌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우린 꼭 필요한 게 있어요. 허슨에게 이 가게를 소개받기까지도 굉장히 힘들었다고요.”

“아, 핫. 그래, 뭐. 이런 가게가 광장에 여봐란 듯 나와 있으면 골치 아픈 일이 많거든. 좋아, 좋고말고. 손님이라는데 물론… 그래, 어떤 걸 찾지? 여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거든. 아주 흉악한 놈부터 얌전한 놈까지 취향대로 골라보셔.”

샤바넬이 말했다. 음흉스러우면서도 약삭빠른, 타고난 사기꾼 재질이다. 아르사크가 앞으로 나서자, 그는 노골적인 눈으로 아르사크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놓고 기마대 복장을 하고 왔으니 되레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자색전갈의 독. 그걸 찾는다.”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낮게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샤바넬은 뱀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이상한 각도로 기울였다.

“뭐야? 설마 여자인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자색전갈의 독, 팔아? 안 팔아?”

“햐, 젊은 아가씨가 좋은 건 기가 막히게 아는군. 팔지, 팔고말고. 그런데 그게 좀… 보아하니 아가씨도 저자와 같은 동네 출신인 것 같은데, 그럼 그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놈인지 알겠지? 이 동네에서 그걸 손에 넣고 싶으면 그러니까…….”

샤바넬은 말을 하다 말고 가볍게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려 살살 움직였다. 돈주머니를 쥐고 흔드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면서 가로대 위로 팔을 짚으며 몸을 숙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있으면 내놓기나 해.”

서 있기에도 으스스한 이런 가게에서,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거친 태도로 나오는 아르사크의 모습에 샤바넬도 약간 이상한 낌새를 차린 것 같았다. 보통 여자는 더더욱 아니고, 기마대도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누구지?

“아, 좋아. 아가씨가 아주 호쾌하시군.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샤바넬은 능글맞은 태도로 웃으며 선반을 지나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허슨은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여차하면 뛰쳐나가려는 것처럼 연신 문만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알린이 말했다.

“허슨,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저 기분 나쁜 사람한테 무슨 빚을 졌어요?”

“아… 그, 그러, 그러니까, 어, 으음, 새, 생, 생계에 피, 필요해, 해서… 조, 조, 조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세 살배기도 알아볼 일이다. 알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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