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에리히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위든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에리히가 말했다.
“숙부님께 개인적으로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위든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폐하.”
“세버니트라는 광물에 대해 아십니까?”
“세버니트…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네페에서 많이 생산되는 값비싼 보석이었지요. 수도나 황실에서 무척 인기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것이 궁금하십니까?”
“과연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네페의 폐광에서 세버니트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만약 위든이 네페에 무슨 일인가를 저질렀다면 모른다고 잡아뗄 것이다. 혹시 세버니트에 대한 것을 알고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네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는 이상 순순히 대답할 리 없었다.
위든이 발뺌한다면, 에리히는 세버니트와 네페의 비극을 빌미 삼아 그를 포함한 모든 중앙 귀족 가문을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리히의 예상은 빗나갔다. 위든은 침착한 태도로 그를 물끄러미 쏘아보다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디몰트에도 광산은 여럿 존재합니다. 물론 네페의 광산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갱도의 혼잡함은 네페의 북쪽 광산과 맞먹을 것입니다. 이번에 광산의 갱도를 좀 더 확장하고자 하는데, 아무래도 지반이 불안한 듯하여 보다 안전한 방법이 없는가 고심하던 도중 네페의 비터 자작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갱도 확장에 관한 자료를 전해주면서, 북쪽 광산의 더 깊은 곳에서 소량의 세버니트를 더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왜 황궁에 보고하지 않았지요?”
“지난해 가을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폐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지, 그 진의를 짐작할 수가 없군요. 비터 자작이 말하기로, 그때 발견된 세버니트는 극소량이어서 채굴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위든이 세버니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 이상, 이제 에리히는 자신의 의심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는 그를 더 추궁할 빌미가 없었다.
지난해 가을이라는 점도 황당했다. 그토록 오래전에 처음 발견되었다고?
게다가 네페의 수로에 흔치 않은 독이 퍼져 영지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위든이 범인이든 아니든, 그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네페에 일어난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폐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생각을 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이 일에만 매달려도 진위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마당에, 난데없이 로크로몬서와의 전쟁이라니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다.
에리히는 두통이 도지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위든이 말했다.
“폐하, 만약 제가 계속 황궁에 머물러야만 한다면…….”
“숙부께서 그토록 원하신다면 일단 디몰트로 돌아가십시오.”
에리히가 대답했다. 위든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느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에리히가 속으로 무슨 계산을 두드리고 있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굳이 자신이 황궁 밖으로 이동할 필요도 사실은 없었지만, 발이 묶여 있는 것보다는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수월하리라.
위든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 몸을 가볍게 숙이며 절을 했다. 고개를 조아리자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네가 황제로서 받는 마지막 절이 될 것이다, 나의 조카여.’
“폐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디몰트로 돌아가시는 길까지 호위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병사 한 명이 귀한 때에 그럴 수는 없지요. 저의 시종들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검술을 익히기도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저에 대한 염려는 마시옵고 황실과 백성을 수호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시지요.”
에리히는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위든이 황실을 벗어나는 순간, 그가 수도 주변의 곳곳에 포진시켜 놓은 사병들이 일시에 황궁으로 밀어닥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승을 부렸지만 좀처럼 덜미를 잡기 힘들었던 도적떼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적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체계적이고, 심지어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그들이 사실은 위든의 사병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적었다.
“그러면 폐하, 저는 디몰트의 영주로 돌아가 폐하의 승전을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무사히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기다리지요, 숙부님.”
그날 오후, 디몰트의 공작이 탄 마차가 황궁을 벗어났다. 뒤따르는 호위병은 없었으며, 오로지 그가 데리고 온 시종들만이 그대로 동행했다.
위든은 수도의 외곽 지역에 다다랐을 즈음 마차를 바꾸어 탔다. 화려한 장식으로 마감한 공작의 마차를 타고 간 것은 짐을 나르던 시종 중 한 명이었다. 위든은 뒤따르던 짐마차 중에서 비어 있는 하나에 올라탔다. 짐마차들은 디몰트로 가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브 쓴 남자를 향해 위든이 말했다.
“오래 걸려도 나흘 후에는 로크로몬서의 군대가 북서쪽의 마지막 후방 경계를 뚫을 것이다. 고르쿰이 보낸 사자가 전갈을 가지고 오는 즉시 황궁으로 진격할 수 있도록 모든 사병들에게 연락을 취해놓아라. 후방 경계가 뚫리면 그때부터 수도까지는 금방이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황궁의 병사들이 대부분 이동했을 때, 우리는 황위를 도모할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전하.”
위든은 다소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도 개의치 않고 느긋한 태도로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그 호칭으로 불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 * *
“절대 안 됩니다,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는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이미 옷을 다 갈아입고 출발할 준비를 마친 후였다.
기마대의 병사에게서 빌려오기라도 했는지, 가죽으로 마감한 가벼운 갑주를 걸치고 승마용 부츠까지 신었다.
거기에다가 긴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은 뒤 갑옷 안으로 몽땅 집어넣어, 얼핏 봐서는 체격이 호리호리한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꼴을 보니 더더욱 로즈안나는 아르사크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세요?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이런 시기에 병사로 변장하고 튈브리크까지 혼자 가시겠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
“로즈,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하니? 내가 널 왜 죽이겠어?”
“절대로 못 나가신다는 말이에요! 루이제 님! 보고만 계시지 말고 아르사크 님 좀 말리십시오!”
로즈안나가 벌컥 소리치자, 소파의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루이제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아르사크는 한숨을 쉬면서 한쪽 허리를 짚은 채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루이제, 너 또 울 생각이거들랑 다른 방에 가서 울어.”
“마마께서는 어쩌면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카른이… 카른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으흑!”
“전쟁에 나가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거야. 오히려 거기서 도망쳐 나오거나 전쟁을 피해 달아난다면 그게 무슨 꼴사나운 짓이야? 네 남편은 옳은 선택을 했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그만 좀 울어.”
“마마께서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흑, 로크로몬서의 병사들은 잔혹하고 야만적이기 짝이 없다고 했어요. 포로로 잡은 자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 자기들 군마의 장식으로 쓴다고 했단 말이에요!”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주워듣고 오는 거야? 나 원.”
아르사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간단한 짐을 챙겼다. 어차피 튈브리크까지는 멀지 않은 길이고, 마차가 아니라 혼자 말을 달려서 간다면 몇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로즈안나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아예 아르사크 앞에 드러누울 기세로 나왔다.
“안 됩니다, 절대로!”
“로즈, 비켜.”
“이 시기에 왜 튈브리크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아르사크 님, 부족민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을 거예요. 제발 부탁이니 가지 마세요. 아르사크 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이신가요?”
“로즈, 난 부족민들이 무서워서 떨고 있을까 봐 달래주러 가는 게 아니야.”
아르사크의 대답에 로즈안나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말이 없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잘 들어, 로즈.”
아르사크가 루이제 쪽을 흘긋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행히 루이제는 시녀들이 연신 가져다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기 바빠서 아르사크 쪽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튈브리크 근처에서 비밀리에 독을 취급하는 자를 찾아냈다는 연락을 받았어. 이 일은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은밀히 수소문한 거야. 어쩌면 유레나 황녀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하고 저 울보나 잘 달래고 있도록 해.”
“네? 아르사크 님, 그게 도대체 무슨……. 어, 언제 그런 걸 조사하셨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전혀…….”
“너조차도 모르게 해야 했어. 네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건의 전말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범인이 눈치를 채고 내뺄 가능성이 높으니까. 폐하께서는 직접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지. 내가 튈브리크로 가면 다들 부족민들이 걱정되어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입 꽉 다물고 있어야 해. 알겠니?”
“하지만, 아르사크 님. 폐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아르사크 님께 이런 위험한 일을 맡기셨단 말씀이세요?”
아르사크는 잠시 침묵했다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빙긋이 웃었다. 로즈안나는 그제야 이 일이 에리히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르사크 님,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어요.”
“농담이겠지? 어떤 놈들이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너를 어떻게 보내겠어? 폐하께서 날 찾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염려하지 마. 너무 바빠서 날 찾을 시간도 없겠지만 말이야.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