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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0화 (170/191)

170화

힐데트로스는 왕비가 된 첫날, 석조 궁전 앞뜰의 드높은 기단 위에서 후궁들의 절을 받았다.

로크로몬서의 예복은 제국의 것과 달라 소매가 땅에 끌릴 만큼 길었으며 치맛단은 뻣뻣한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걷기에 불편할 정도로 다리에 휘감기는 종류였다. 공기는 건조하면서도 갑갑하고, 쾌청한 하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힐데트로스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후궁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는 마치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는 것처럼, 일평생 로크로몬서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것처럼 위풍당당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후궁들은 오랫동안 고르쿰의 험악한 기세에 눌려 산 탓에 타국에서 온 두 번째 왕비에게 텃세를 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은 힐데트로스가 누구보다도 고르쿰과 잘 어울리는 왕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전하, 해로를 통해 진격한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보고입니다.”

왕국군을 총괄하는 장군의 보고였다. 고르쿰은 안으로 쑥 꺼져 음험해 보이는 눈을 껌뻑이면서 차가운 왕좌에 몸을 기대었다.

연합군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그들은 로크로몬서를 중심으로 한 인근 해역 일대의 해적들이었다.

고르쿰은 그들의 약탈 행위를 어느 정도 묵인하는 대신 매년 상당한 양의 공물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계획에도 그들을 끌어들였다. 해적들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해군의 간섭을 줄이고, 심지어 활동할 수 있는 범위까지 넓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전하, 만약 그들이 빠른 시일 내에 항구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북서쪽으로 진격한 왕국군의 진로를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군이 말했다.

로크로몬서는 호전적이긴 하지만 원래는 해전에 더 강한 나라다. 수도까지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북서쪽 경계를 노린 것은 해적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항구 쪽을 점령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육지로 진격한 군사들은 험한 산을 넘어서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흥, 카툴라는… 땅덩이만 넓었지. 전쟁에 대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일 것이다. 그 새파란 황제는 검이나 제대로 잡을 줄 알겠느냐? 문제는 없으리라.”

고르쿰이 말했다. 장군은 카툴라가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왕과 마찬가지로 로크로몬서의 군대와 해적들의 연합이 쉽사리 깨질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제국군의 규모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로크로몬서에서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바였다. 아무리 위든과의 협상이 그럴싸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승산이 없는 싸움에 무턱대고 뛰어들 만큼 고르쿰은 어리석지 않았다.

“왕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고르쿰은 야비한 미소를 희미하게 띤 채 옆에 앉은 힐데트로스를 돌아보았다. 힐데트로스는 차갑게 굳은 표정을 한 채 말이 없었으나, 고르쿰도 그녀에게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고르쿰이 말했다.

“만약 카툴라의 황제가 예상외로 오래 살아남아 로크로몬서를 압박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을 해야겠지. 왕비는 카툴라의 대귀족 출신이니, 황제를 잘 설득해 주리라 믿소.”

힐데트로스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얻게 되겠지만 만에 하나 고르쿰과 위든, 둘 중 하나라도 에리히에게 패배한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고르쿰은 제국의 사정을 잘 아는 힐데트로스를 방패로 삼으려 할 것이고, 에리히가 로크로몬서와의 긴 전면전을 결심하지 않는 이상 왕비인 힐데트로스의 목을 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설득이란 곧 힐데트로스의 죽음을 의미했다. 고르쿰에게 있어서는 힐데트로스 역시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왕비로서 대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하께서는 염려를 놓으십시오. 카툴라의 황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로크로몬서의 강인한 병사들과 공작의 세력을 합친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나는 제국의 황제 따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진정 경계해야 할 자는 그 공작이라는 자, 왕비의 양부지. 그러고 보면 왕비야말로 다방면으로 할 일이 많겠군. 만약 그대의 양부가 나와의 약속을 깨려 한다면, 그자를 설득하는 것 역시 딸인 그대의 몫이 될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이득을 볼 뿐, 잃을 것이 별로 없군. 혼인을 잘하고 볼 일이야.”

고르쿰은 흡족한 듯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힐데트로스는 당장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며 석상처럼 무표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후작가,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모멸감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르쿰 왕도 그렇거니와 위든 역시도, 일이 틀어질 경우 힐데트로스를 가장 만만한 희생양으로 삼으려 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남의 꼭두각시놀음이나 하다가 정말로 진창에 처박히는 일만은 사양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힐데트로스는 위든과 고르쿰, 둘 중 하나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리라 또 한 번 결심했다.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일이다. 위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그를 제거하기는 훨씬 쉬워지지. 그자가 죽으면, 전쟁밖에 모르는 이 멍청한 왕도 죽여버린 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감히 이 나를, 개처럼 몰아낸 이들의 머리를 잘라 성을 쌓아도 시원치 않아.’

고르쿰은 장군에게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카툴라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항구 쪽으로 진격한 해적들이 남쪽 경계를 허물고 도시 안으로 진입하면 자유로이 약탈을 허가한다는 전언도 남겼다.

약탈품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면 해적들은 더욱 거침없이 날뛸 것이다. 그들이 남쪽 구역을 엉망으로 짓밟는 동안 훈련된 정예 병사들은 북서쪽의 경계에서부터 수도로 진군하는 계획이었다.

제국군이 두 패로 나뉘게 되었을 때, 위든이 은밀히 길러온 사병들이 황궁을 습격하여 황제를 죽이면 모든 일은 끝난다. 로크로몬서의 침략은 단순히 눈속임일 뿐, 위든이 얼마나 빨리 일을 성공시키느냐가 관건인 셈이었다.

“하지만 영 성에 차지 않는군.”

“전하, 어떤 말씀이신지…….”

“고작 제국의 공작 따위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 말이야. 사병들 따위나 데리고 황제의 목만 치면 되는 그는 제국을 다스리고,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은 고작 땅덩이 일부라면 그다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 왕비의 생각은 어떻지?”

얼핏 느물대는 것처럼 들리지만, 힐데트로스는 그가 날카롭게 벼린 칼끝을 자신의 턱 아래에 들이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모두가 약속한 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막이 내리고 난 뒤에 무대 아래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이야 알 바 아니지만, 막이 내려가기 전까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해진 대로만 움직여야 했다.

“공작께서는 전하께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면 결코 전하를 홀대하실 분이 아니니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시지요.”

“믿고 기다리라……. 하핫, 양부를 무척이나 잘 따르는 딸이로군. 공작이 알면 매우 기뻐하겠어.”

그렇게 말한 고르쿰은 갑자기 힐데트로스의 뺨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억센 손아귀에 얼굴을 붙들리자, 힐데트로스는 안색만 파리해진 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고르쿰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감추려 애쓰는 그녀의 태도가 가소롭다는 듯, 고르쿰은 낮고 음산한 소리로 웃어댔다.

“일이 틀어질 경우에는 내가 먼저 왕비의 목을 잘라 이 석조 궁전에 매달아 놓을 테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응당 기쁘게 받아들일 테지.”

거들먹거리듯 속삭인 고르쿰은 코웃음을 치며 힐데트로스의 얼굴을 팽개치듯 놓아버렸다. 의자의 손잡이를 쥔 가느다란 손가락이 모멸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힐데트로스는 이를 갈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이 누구든,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만 했다.

134장 뜻밖의 그림자 (4)

에리히가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북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할 군대가 편성되었다.

기마대의 모든 병사들은 북서쪽의 경계 지역으로 가서 로크로몬서의 창병과 기마병을 상대하고, 일반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가며 경계 지역을 총 세 군데로 나누어 수도를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툴라가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 있었으므로 방어에 소홀했을 것이라는 고르쿰 왕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간 셈이었다.

기마대나 일부 정예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먹고살기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제국군에 자원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난데없이 일어난 진짜 전쟁 앞에서 많은 자들이 우왕좌왕했다.

반드시 충돌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는 벌써 많은 병사들이 탈영을 시도하다가 목이 잘려나갔다는 허무맹랑한 괴담까지 떠돌았다.

수도의 귀족들도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벌써 흉악한 해적이나 로크로몬서의 병사들이 황궁을 점령하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떨었다. 당장 지방의 별장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아버지와, 아직 수도까지 전쟁이 번진 것도 아닌데 꼴사납게 무슨 법석이냐는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부자간에 칼부림이 날 뻔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이 어지러운 와중에 모든 문제를 총괄해야 하는 에리히가 침착한 것은 그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에리히는 선황이 즉위했던 초기와 같이 군대의 규모를 새로 조직하고, 테오도르와 기사단장 세 명을 장군으로 임명해 각자 휘하의 부대를 관리하게 했다.

위든은 황궁에 남아 있었다. 전쟁이 벌어졌는데 영주인 그가 자신의 영지를 비워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에리히는 초기의 대처가 마무리될 때까지 위든을 황궁에 머물도록 지시했다.

“폐하, 아직 전쟁이 디몰트까지는 닿지 않았다고 하지만 소식을 들은 영지의 주민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영주로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지킬 의무가 있으니 한시바삐 돌아가고자 합니다.”

“디몰트는 수도에서 동쪽으로 한참 먼 곳에 떨어져 있지요. 만약 로크로몬서의 군사들이 수도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이 생긴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숙부님을 피신시켜 드릴 테니 지금은 돌아가 계십시오.”

에리히는 읽고 있는 문서에서 눈조차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무리 황제와 공작이라지만 사적으로는 조카와 숙부이며, 위든 역시 직계 황족이므로 에리히의 태도는 분명 예법에 맞다고 할 수 없었다. 위든도 그 점을 지적하려는 듯 이번에는 표정을 달리하고 말했다.

“폐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이런 상황에 저를 황궁에 붙잡아 두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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