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만약 이것이 사람에 의한 독살이라면, 왜 유레나의 시신과 정확히 똑같은 모습일까? 그렇다면 유레나도 결국에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
유레나가 죽었을 때, 곁을 지킨 것은 로즈안나 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자들이 걱정하던 대로 궁 안에 병이 퍼지는 일은 없었다. 그때 유레나의 시신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 화장했던 시종들도 그 이후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 말은 결국, 유레나가 죽은 이유도 독살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유레나를? 무슨 이유로?
그때, 아르사크도 에리히와 같은 의문을 곱씹고 있었다. 로즈안나의 말에 따르면 유레나 황녀가 죽었을 때의 모습과, 이 네페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 로즈안나의 말을 바탕으로 생각했을 때 유레나 역시도 같은 독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왜 유레나를 죽여야 했는지는 불명확했다. 고작 어린아이일 뿐인 황녀를 이토록 번거로운 방법으로 죽여서 누구에게, 무슨 이득이 될까?
아니, 이유가 무엇이건 이 독을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이득은 있었을 것이다. 아르사크가 말했던 대로 이 전갈의 독은 무척 희귀한 것이다. 제국에서는 구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으리라. 당연히 독살을 당했는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넋 나간 사람처럼 혼자 막사로 들어가려는 에리히를 뒤따라 들어갔다. 시종일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막사 안을 빙빙 돌던 에리히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자색전갈은 사막에서만 산다는 것이 확실한가?”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몸을 돌린 에리히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그 전갈은 크기가 매우 작은데 색깔은 무척 선명한 보랏빛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살죠. 몸을 숨길 수 없는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아요.”
“독은? 어떤 특징이 있지? 그대도 실제로 그 전갈의 독을 본 적이 있었나?”
“딱 한 번… 제가 열일곱 살 때쯤이었으니 벌써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먼 서쪽 사막까지 돌아다니는 부족 출신이 토르갈로 찾아온 적이 있어요. 희귀한 짐승을 사냥해 그 가죽을 팔고 다니는 자였지요. 그자가 우연찮게 뱀과 싸우고 있던 자색전갈을 잡았다고 하면서 보여준 일이 있습니다. 독도 이미 채취했더군요. 그 독은… 아무런 색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물과 다를 바가 없지요.”
“얼마나 사용해야 사람이 죽지?”
아르사크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얼 만큼을 써야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전갈에 쏘인 사람은 틀림없이 죽지요. 그러나… 황녀님이나, 네페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앓다가 죽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보통 아주 잠깐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요. 전갈에 쏘였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해독제를 갖고 있지 않으면 죽는다고 봐야 하죠.”
“해독제가 있단 말이야? 이 독에?”
“네. 버드나무 가지를 불에 태운 재를 물에 아주 조금만 녹여서 마시게 하면 해독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그런 걸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에리히는 순간 허탈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단순한 것이 해독제였다니?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을 하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오도르와 병사들을 불렀다.
“치료사들에게 버드나무 가지의 재를 물에 녹여 해독제를 만들라고 해라. 황후가 방법을 알려줄 것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전해라. 그리고 차도가 있으면 바로 보고해라. 그리고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막의 경계 지역을 넘어오는 상인들과 거래하는 모든 상단을, 규모와 관계없이 조사하고 그들의 취급하는 품목, 소매 계약을 거래한 인물의 목록을 받아두라고 해라. 또한 튈브리크에 있는 상점 중 약재를 취급하는 상점을 모조리 파악해라. 허가받지 않은 상점도 전부.”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테오도르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않고 막사를 나갔다. 독의 출처를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유레나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니. 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갑갑했다. 모든 정황을 명확히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도 어렸고, 당황하고 슬픈 마음이 빚어낸 무력감 때문일 것이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 왔다. 이제 와서 이런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방심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독살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했더라면… 그 누구도 그런 것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어.’
에리히는 선 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만약 선황이나 선황후, 혹은 에리히가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병이 났더라면 누군가 한 명쯤은 조심스럽게 독살의 가능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레나는 달랐다. 냉정한 이야기였지만, 그때 황족 중 누군가를 죽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면 유레나는 가장 쓸모없는 희생자였다.
‘대체, 이제 와서…….’
지금껏 자신은, 하나뿐인 동생의 죽음에 대해 무슨 애도를 해왔단 말인가? 그 애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왜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슬픔을 안고 동생이 그립다고 생각해 왔었나?
에리히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마음이 젖은 모래가 된 것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폐하, 폐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리히는 곧바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네페에 올 때 동행한 병사가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깃발은 황궁 기마대의 표식이었다.
“너는 기마대의 병사가 아니냐.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기마대 소속의 병사는 황제나, 그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람의 명령이 아니면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여기까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병사가 말했다.
“폐하, 저는 의전장관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지금… 로크로몬서의 고르쿰 왕이 막대한 수의 해적과 연합하여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서북쪽 경계 지역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져 제국군이 밀리고 있으며, 해적들의 배가 남쪽 항구에 닿기까지 하루도 남지 않았다는 급보입니다. 폐하, 지금 당장 황궁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133장 뜻밖의 그림자 (3)
로크로몬서를 지배하는 고르쿰 왕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차가운 인물이었다.
어둡고 단단하며, 어딘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석조 궁전의 왕좌에 앉은 모습을 볼 때면, 석조 궁전에 깃든 잔혹한 역사들이 그의 모습을 빌려 왕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말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제 서른두 살 나이의 노련한 군주였지만, 즉위했을 때만 해도 어린 소년왕에 불과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치열한 정쟁과 암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정적을 제거해 나가며 마침내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했다.
고르쿰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첫 왕비를 들였다. 그녀는 로크로몬서 안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의 딸로, 고르쿰이 왕위를 보존하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바 있는 가문에 속해 있었다.
고르쿰이 마침내 강력한 왕으로서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을 것을 제안했고 고르쿰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을 때, 고르쿰 왕은 왕비의 남동생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가문 전체를 결딴내고 이에 항의하는 왕비마저도 바다 한가운데의 무인도로 유배를 보냈다.
소년왕에 불과했던 그가 왕관을 지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가문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같은 것은 고르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왕비의 남동생이 반역을 도모한 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곧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 이후 고르쿰은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단지 몇 명의 후궁을 두었을 뿐이다. 그중 일부는 세력이 매우 약한 귀족의 딸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평민 출신이었다.
신분이야 어쨌든, 고르쿰은 그녀들을 완전히 평등하게 대했다. 귀족 출신의 후궁이라고 해서 더 좋은 대접을 해주지도 않았으며, 평민 출신의 후궁이라고 해서 부당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르쿰이 후궁들을 공평하게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후궁들은 단지, 왕이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골라잡는 물건이나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물건을 던져 부술 수 있듯, 고르쿰은 언제라도 후궁들을 죽일 수 있었다. 후궁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왕궁 내에서는 숨소리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왕이 새 왕비를 들이겠다는 포고를 했을 때 로크로몬서의 귀족들은 당황했다. 그 누구도 왕이 그런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맨 먼저 초점을 맞춘 것은 과연 어떤 가문의 딸을 골랐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 가문과 고르쿰 왕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을까 하는 문제였다.
귀족들은 조용하게, 물밑에서 아우성을 쳤다. 누군가는 앞서 결딴났던 왕비의 가문과 대립하던 가문의 딸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또 누군가는 후궁과 마찬가지로 세력이 적은 가문에서 허울뿐인 왕비를 들여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왕비의 정체를 알았을 때, 로크로몬서의 귀족들은 한 번 더 왕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되었다. 오랜 세월 공석이었던 로크로몬서의 왕비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다름 아닌 카툴라 제국 출신의 힐데트로스였던 것이다.
힐데트로스는 왕비가 되기에 앞서, 위든과 고르쿰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위든이 자신을 양녀로 들인 것, 그리고 로크로몬서의 왕비가 될 수 있도록 손을 쓴 것. 그 모든 것은 위든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위든이 반역에 성공해 카툴라의 황제가 되면, 고르쿰은 제국의 토지 일부를 위든으로부터 할애받기로 약속을 하고 그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또한 위든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만약 그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게 된다면, 제국을 다스릴 권한은 매우 정당하게도 힐데트로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위든과 힐데트로스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지만 고르쿰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어쨌든, 제국과 황제를 노린다는 목적에 있어서만큼은 세 사람 모두가 합의를 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