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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8화 (168/191)

168화

어느샌가 병사들 틈에 끼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 몇몇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때, 에리히가 우악스런 손길로 아르사크를 일으켜 세웠다.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함부로 말한다고요? 제가 지금 농담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자색전갈의 독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겠지만, 저는 아니지요. 자색전갈은 바위사막 중에서도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마른 곳에만 사니까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에리히는 천천히 고개를 젓다가 아르사크의 손에 들린 황동 조각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입속에 집어넣었던 부분이 얼룩덜룩한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때 로즈안나를 달래고 있던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하지만, 마마. 눈에 띄지 않고 이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독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비터 자작만을 노린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영지민들의 반 이상을 몰래 중독시키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사람들을 한꺼번에 중독시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냐. 이 마을에 수로가 몇 군데나 있지?”

아르사크의 질문에 사람들은 멀거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중 누군가가 퀭한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로는… 두 군데입니다.”

“다른 곳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하지는 않나?”

“그렇…습니다. 이 근처에는 호수나 강이 없기 때문에 수로를… 하, 하지만, 수로에… 독을요? 그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병에 걸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의 물은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물이다. 만약 그곳에 독을 풀었다면 지금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옳았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생각은 달랐다.

“수로의 물은 고여 있지 않아.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지. 그러니 만약 누군가 눈에 띄지 않게 수로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가장 아래쪽은, 물이 많이 고이면 흘러넘치지 않게 잠시 멈추게 되어 있지 않은가?”

“그, 그렇지요. 아래쪽 물받이에 물이 다 차면… 그, 그럼, 그 물을 가져다 쓴 사람들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르사크는 맥이 탁 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부옇게 개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간 내린 비 때문에 수로의 물은 흐르지 않아도 넘쳤을 것이고, 독은 이미 다 씻겨 나갔거나 땅으로 스며든 지 오래일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에리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르사크나 다른 사람들은 네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위든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페에 병이 돌았음을 알자마자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던 점, 어떤 병인지도 모르면서 두려움조차 없었던 점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이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동기였다. 네페는 오래전 번성했던 곳일 뿐, 지금은 소소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전략적인 요충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차후 개간 사업으로 크게 성공할 만한 요소도 없는 곳이다. 도대체 이런 곳을 무슨 이유로 노린단 말인가?

“최근 들어 영지에 뭔가 새로운 사건은 없었나?”

사람들은 황제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것 같았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사건? 이것보다 더?”

“뭔가 있었나? 영주님이 말씀하셨던 게…….”

“나는 모르겠는데. 이 촌구석에 새로운 일이 뭐가 있어?”

“아니, 잠깐만. 혹시 그거 아니야?”

에리히는 귀가 번쩍 뜨인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에리히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몸집이 크고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일평생 광부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에리히가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바닥으로 꺼슬꺼슬한 입가를 한번 훑고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그게… 영주님께서 좀 더 조사를 해보라고 하셔서, 아직 말씀은 못 드렸던 것인데요…….”

“말해라. 사소한 것도 빠짐없이, 전부.”

“그, 북쪽 광산에서… 예전에는 그곳이 가장 규모가 큰 광산이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채굴된 광석의 양도 많아서 가장 빨리 문을 닫은 곳이지요. 그런데 그… 광산의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간 곳에서 세버니트를 발견했습니다.”

“세버니트?”

아르사크가 되물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황후 마마께서도… 그 광물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아니… 나는 처음 듣는 것인데.”

“아뇨, 일전에 왜… 폐하와 마마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말입니다. 그때 클루이트 도련님께서 마마께 선물로 드리신 것, 그게 세버니트의 원석입니다. 한때는 수도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만 오래전에 채굴이 끊겨서, 지금은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것이 되었지요.”

그제야 아르사크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도 알겠다는 듯이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클루이트가 아르사크에게 주었던 커다란 돌. 쪼개진 안쪽에 연한 장밋빛 수정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던 그것이 다름 아닌 세버니트라는 광물이었던 것이다.

유일한 생산지였던 네페에서도 채굴이 끊긴 지금은 찾으려야 찾아볼 수도 없어, 값이 천정부지로 뛴 바로 그 보석이었다.

132장 뜻밖의 그림자 (2)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들보다 큰 충격에 휩싸인 것은 에리히였다. 말을 알아듣는 것과 별개로,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세버니트가 네페에서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아직 에리히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비터 자작이 광부들에게 좀 더 알아보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그도 역시 황궁에 보고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기껏 다시 생산될 것이라는 보고까지 했는데 고작 한두 삽 정도 나오고 말아서야 의미가 없으니까.

지속적으로 채굴할 수 있을 만큼의 양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누구보다 그가 먼저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세버니트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한편 세버니트의 존재를 알게 되자, 위든에 대한 의혹은 한층 더 현실성을 띠었다. 만약 위든이 네페의 광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폐하?”

테오도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에리히를 불렀지만 이미 그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에리히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쩌면 위든 역시 세버니트에 관한 것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네페를 공격할 만한 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만약 이런 일을 벌인 자가 위든이 확실하다면 이유는 세버니트 광산을 독차지하기 위해서가 틀림없었다.

굳이 위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세버니트의 존재에 대해 영주나, 마을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차렸다면? 광산의 소유권을 가로채어 독점하기 위해 네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광물이다.

켕기는 것이 있어 국내에서는 판매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역을 통해 수출하면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수입을 올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이만한 일을 저지르기에는 최적의 이유였다.

‘그리고 숙부님이야말로 이런 생각을 진정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만한 인물이지.’

위든이 다스리는 디몰트에도 규모가 작긴 하지만 광산이 있었다. 카툴라는 옛날부터 곳곳에서 채광이 이루어지던 나라이고, 또 그것으로 전성기를 지탱해 왔으니 그리 이상한 우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몰트에도 광산이 있기 때문에, 위든은 광산을 소유하지 않은 다른 영지의 영주들보다 광물이나 갱도에 대한 지식이 더 많았다.

그가 언제부터 네페의 광산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을까?

어쩌면 세버니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네페에서 규모가 컸던 대부분의 광산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이 주변의 산세는 복잡하고 험해서 아직까지 손대지 못한 곳이 많았다. 비터 자작가의 오랜 전통이 있어 영지의 풍족함이 절정에 달했던 때에도 마구잡이로 광산을 개발하지 않은 결과였다.

만약 위든이 이 광산의 잠재성을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면? 그러다 이번에 우연찮게 세버니트의 잠재량을 깨닫고, 결국 네페를 손에 넣고자 한 것이라면?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네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위든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냈을 때에만 의미가 있었다.

심증을 아무리 굳혀봐야 추궁할 만큼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병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했던 사람들 중 새롭게 발병한 자가 있는가?”

에리히의 질문에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지의 과반수가 죽은 데다가, 아직까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어 혼란했으므로 발병 시기를 따져볼 수 있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모두 가족을 다 잃었거나, 적어도 한 명 이상 잃은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낮밤을 가리지 않고 며칠 내내 붙어 간호를 했다. 그러던 사람들은 더러 지쳐 쓰러지기도 했지만, 병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설마 이게 정말로… 황후 마마의 말씀대로 병이 아니라, 누가… 누가 일부러 꾸며낸 일입니까?”

세버니트 이야기를 꺼냈던 덩치 큰 광부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침중한 표정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욱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새롭게 울음을 터뜨리거나 하늘을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끔찍하기는 해도 병이라면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사람이 저질렀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폐하… 저 애는 제 딸입니다. 이제 겨우… 겨우 여섯 살이었습니다. 제발, 폐하…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찾아내어 죽여주십시오.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울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망히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슬픔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에리히는 괴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다 알겠다는 짤막한 대답을 남긴 후 발길을 돌렸다. 그에게는 현재의 일 이외에도 한 가지의 끔찍한 의혹이 더 있었다. 유레나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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