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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7화 (167/191)

167화

에리히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아프도록 움켜쥐고 있던 아르사크의 손을 천천히 놓은 그는 왜인지 허탈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아르사크는 온 얼굴을 찌푸린 채로 어깨가 떨릴 만큼 강하게 자신의 양손을 맞잡았다.

“에리히, 당신이… 내게 다가올 때마다, 나는 약해져요.”

에리히는 허탈한 소리로 웃었다. 마치 전 재산을 걸었던 도박에서 마지막 한 푼까지 남김없이 잃어버린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대 같은 사람이 약하다면 대체 강한 사람은 누군데?”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난… 진심이에요. 내 마음이, 내 목표, 나의 의지가, 평생 이렇게 흔들렸던 적이 없어요. 날 죽이려던 자들이 내게 그러더군요. 자신들을 보낸 것은 바로 에리히, 당신이라고.”

처음 듣는, 그보다도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에 에리히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르사크 스스로도 말했듯, 그것은 농담도 말장난도 아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튈브리크로 갔던 날… 왜 그랬느냐고 물었죠? 그들이… 내게 말했어요. 자신들에게 날 죽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나라의 황제 폐하, 당신이라더군요.”

“그 말을 믿었어?”

에리히는 이제 정말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고 있느라 이상했던 것이라고?

그러나 아르사크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더라면, 지금 여기에 있을까요? 당신이 여기에 있을까요? 난 믿지 않았어요. 튈브리크로 달려갔지만 부족민들이 무사한 것을 보자마자 알았어요. 그게 거짓말이라는걸. 하지만 한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그게 무엇이냐고, 에리히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붙어버린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아르사크의 시선은 이런 순간에조차 에리히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에리히와 마찬가지로 떨렸다.

“당신이 날 약하게 만들어요. 내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어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나의 부족민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희생해도 좋다는 건가? 원하는 것도 놓쳐버리고, 바라는 것도 떠나보내면서?”

“그래요. 난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해요. 나는 하르슈의 딸이자, 토르갈의 족장이니까.”

그 말을 내뱉을 때, 아르사크는 가슴속 어딘가가 저미는 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이토록 마음이 아플까.

이미 통증에는 둔감해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흉터가 얼마나 많든, 과거에 얼마나 피 흘리고 다쳤든, 새로운 상처는 언제나 아픈 법이었다.

에리히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거칠게 흘러나오던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풍랑이 지나간 바다 한복판처럼 고요하고 외로웠다.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창공의 바람이고, 거대한 매였으므로.

무릎을 꿇어서 붙잡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빌어서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기꺼이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아르사크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군.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사크는 어느새 담담해진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앉은 채였지만, 예를 차리듯 천천히 허리를 숙이는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는 에리히의 눈빛은 깊숙이 까라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말해두지만, 암살자를 보낸 것은 결코 내가 한 짓이 아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두 번 다시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지 마라. 그대가 황후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에리히의 말투는 어느새 아르사크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싸늘하고 무감각했지만, 아르사크는 그것이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줄 뿐이다. 원망하거나 서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러니 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대도 황후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내일부터는 유목민의 옷을 벗고, 다시 제국의 옷을 입도록 해. 또한 네페에서 일어난 일도 나와 함께 조사해야 한다. 병에 걸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여 운트로 피신시키는 것이 우선이니 그것을 도와라.”

“네, 그렇게 하지요.”

쏘아붙이듯 말을 마친 에리히는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몸을 돌려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로즈안나를 불러 말했다.

“황후를 잘 돌봐다오. 근래 들어 놀랄 일이 많았으니 몸이 약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폐하께서도 몸을 살피셔야 합니다. 전… 저는, 폐하.”

로즈안나의 눈이 순식간에 글썽였다. 에리히는 그녀가 왜 우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차마 꾸지람도 하지 못했다.

비가 그치자 곳곳에서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더 많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궁에서 데려온 치료사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진찰하고 약을 먹이느라 하루 온종일을 다 보냈다.

“내일… 시신을 살펴볼 것이다. 그때, 로즈안나…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너 이외에는… 그때 유레나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131장 뜻밖의 그림자 (1)

밤새도록 천막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어느 순간엔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아르사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입었다. 에리히와 약속한 대로 토르갈의 옷은 입지 않았지만, 너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걸칠 수도 없었으므로 로즈안나가 어딘가에서 움직이기 편한 옷을 빌려왔다. 손끝에 만져지는 감촉은 약간 빳빳하지만 치마의 통이 넓고 허리에 맞춰 끈을 묶을 수 있는 옷이었다.

로즈안나가 가지고 온 옷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사크는 이전에 네페에 왔을 때도 영주 부인이 이런 옷을 구해다 준 사실을 떠올리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머리에 장신구는 달지 마, 로즈. 그냥 흘러내리지 않게 해줘.”

로즈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손길로 아르사크의 긴 머리를 꼼꼼하게 땋아 뒤통수에 붙이듯 틀어 올렸다.

머리카락을 고정하기 위한 핀 이외에는 그녀의 말대로 아무런 장식을 달지 않아, 얼핏 보기에는 아무도 아르사크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대접을 받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 아르사크의 태도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과장스럽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병과 슬픔으로 고통에 잠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다독이는 모습에 로즈안나는 복잡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과거에 한 번 겪었던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쉬운 일이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앓고 있는 사람들이 약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아르사크의 움직임은 능숙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로즈안나 님, 이리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종이 손짓하자 로즈안나는 아르사크를 한번 돌아보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뛰어들지 못하기 위함인지, 일렬로 늘어선 채 벽을 만들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에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혔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니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에리히와 테오도르가 보였다.

“폐하.”

“이쪽으로 오거라, 로즈안나.”

로즈안나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에리히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는 천으로 덮인 시신 다섯 구가 있었다. 세 구는 키가 컸고, 두 구는 작았다. 한눈에 봐도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윽…….”

뱃속이 꽉 조여들었다. 로즈안나는 시신을 덮은 천을 병사들이 한 장씩 거두는 것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떨었다. 아직 많이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며칠 내내 내린 비 때문인지 이미 조금씩 부패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무죽죽하게 변해버린 피부에서는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치료사가 말했다.

“폐하, 이 시신들은 죽은 지 시간이 많이 지난 듯합니다. 시반과 병으로 인한 반점을 구분하기 힘듭니다.”

에리히는 말없이 병사에게 눈짓을 건넸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로즈안나의 바로 앞에 있던, 가장 작은 크기의 시신을 덮은 천을 걷었다. 일곱 살 정도 되었을까.

로즈안나는 갑자기 둑이 터진 듯 눈물을 쏟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로즈안나.”

“…폐하, 같… 같습니다. 유레나 님과…….”

로즈안나의 목소리는 마치 괴로운 몸부림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급히 다가가 어깨를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리히는 부쩍 그늘진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시신을 덮으라고 명령했다.

어린아이는 오늘 아침에 죽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혈색이 도는 것 같았고, 아픈 채 지쳐 잠든 것처럼 보였다. 온몸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생겼고 목 근처는 시뻘겋게 부풀었다. 죽을 때의 유레나와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로즈안나가 오열하는 소리에 달려온 아르사크 역시 죽은 아이의 모습에 놀라 숨을 몰아쉬었다. 어수선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시신을 다시 덮어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르사크의 목소리였다. 에리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르사크가 죽은 아이를 건드리자 치료사가 기겁을 하며 그녀를 말렸다.

“마마, 시신에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아직 병이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한 가지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소.”

아르사크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아이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폈다. 피부 위로 나타난 반점과 부푼 목을 천천히 더듬어보다가, 다물린 입을 갑자기 벌렸을 때는 에리히조차도 놀랐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경악스런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동으로 된 뭔가를 가져와라.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다.”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에리히의 눈치를 보았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와라.”

병사 한 사람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한참 만에야 어디선가 닳은 스푼의 손잡이처럼 보이는 뭔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병사로부터 그것을 건네받은 아르사크는 죽은 아이의 입속에 그것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 빼내더니 찌푸린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이건 열병이 아닙니다. 이건 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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