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시신을 봐야겠다.”
“안, 안 됩니다! 폐하, 안 됩니다. 혹시 폐하께 병이 옮기라도 하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비켜라, 내가 직접 봐야겠다.”
에리히는 울면서 말리려 드는 이세트를 뿌리치고 둥글게 모인 사람들 쪽으로 급하게 걸었다.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곁에 누가 다가오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자신들이 그렇게 모여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탁하고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어른의 허리 높이 정도로 판 구덩이는 짚으로 커다란 가마니 같은 것을 짜 덮어 놓았는데, 시체를 가리기 위한 용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불이 잘 붙도록 그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에리히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가마니를 내려다보다가 불을 붙이려는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잠시 멈춰라.”
“안 됩니다. 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습니다.”
횃불을 든 자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구덩이를 덮은 가마니에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공허한 표정만을 지은 채 시선이 제각각 따로 움직였다.
“태워야 합니다. 태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염병이니까요. 모두가 죽었습니다. 영주님도, 마님도, 클루이트 도련님도. 저의 가족도 모두 죽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입니다.”
에리히의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무릎에 턱을 묻고 일렁이는 불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덩이에서도 탁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탓에 짚더미에 기름을 먹였는지,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났다.
“잠시 확인할 것이 있다. 그러니 불을 물려라.”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서도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듯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당황한 채 허둥거리는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선 에리히가 말했다.
“시신을 보여다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병은, 아마도 전염되는 병입니다. 폐하께서는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잔말 말고 열어라!”
그들은 머뭇거렸다. 보다 못한 테오도르와 이세트가 앞으로 나서서 구덩이 안을 덮고 있는 가마니를 걷었다.
구덩이 안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화장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조차 끔찍한 광경에 새삼스럽게 울음을 터뜨리거나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질렀다.
“폐하, 물러서십시오. 너무 가까이 가시면…….”
에리히를 붙잡으려던 테오도르는 마치 무서운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히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테오, 모르겠느냐? 똑같다.”
에리히가 넋 나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도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부축하듯 가까이 섰다.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엇이 똑같다는 말씀이신지요?”
“유레나와…….”
에리히의 입에서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 순간, 뒤쪽에서 로즈안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테오도르 님! 아르사크 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테오도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리히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렇게나 뒤엉켜 쌓인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파리하게 죽어버린 피부 곳곳에 아직도 얼룩덜룩한 반점이 남은 것이 보였다. 시체의 틈바구니에 파묻혀 어린아이의 조그만 손 하나가 구원을 바라는 듯 허공을 향해 뻗어 나온 것이 보였다. 그 아이의 손 역시도 반점투성이였고, 손톱은 푸르게 물들어 굽어 있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외치는 소리에 에리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서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에 싸인 채, 마치 쓰레기가 치워지는 것처럼 다급히 궁 밖으로 나가야만 했던 유레나의 시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아이의 모습은 살아있을 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꿈에서조차 볼 수 있을까 싶게 끔찍했다.
“아르사크!”
에리히는 쓰러진 아르사크의 어깨를 안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빗물에 젖은 아르사크의 얼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130장 아주 작은 균열 (5)
사방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르사크는 자꾸만 눈물이 괴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유르트 사이를 걸었다.
허름한 채 흐트러진 곳을 바로잡지 못한 천막을 조그만 손으로 만져보던 아르사크는 누군가가 천막 아래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움찔하며 발을 멈췄다.
“데르가 아저씨, 여기 누워있으면 안 돼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나 데르가는 커다란 몸을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르가 아저씨! 아저씨!”
아르사크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데르가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으켜 세워보려 했지만 어린아이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 아버지, 이쪽으로 와보세요! 데르가 아저씨가 쓰러졌어요!”
어린 아르사크는 울음을 터뜨리며 유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씨가 거의 다 죽어버린 화로를 앞에 둔 채, 아버지는 어깨와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딸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아버지! 데르가 아저씨가!”
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던 아르사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르사크는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에게서 튕겨 나가듯 떨어졌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뻥 뚫린 구멍뿐이었고, 벌어진 입술 안으로는 치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르사크는 소리를 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에서 나와야 하는 모든 소리가 몸속으로 파묻히고 만 것처럼.
아르사크는 목을 움켜쥔 채 기침을 해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그만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다. 손끝에서, 목에서, 열이 끓어오르는 모든 피부 아래에서 수포가 솟아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누가 좀 도와줘요, 제발!’
누운 자리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르사크는 힘이 다 빠져나간 몸을 겨우 일으키려 애쓰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겨우 바로잡았다.
꿈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지만 눈물이 흘렀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역하고 매캐한 냄새와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기 위해 하루 종일 유르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길어온 물을 나눠주고, 약을 달이는 것을 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아르사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임시로 친 막사 안인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안에서도 사람들이 죽었을 테니, 병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곳에 머물 수는 없었겠지.
비터 자작과 그 부인이 죽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현실이 되어 아르사크를 강하게 짓눌렀다. 클루이트마저도.
“누가 좀…….”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속삭이는 듯한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느라, 아르사크는 천막이 걷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군가, 웅크린 아르사크의 몸을 강하게 안았다. 아르사크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아버지…….”
에리히는 입술을 안으로 만 채 아르사크의 떨리는 어깨를 달래듯 두드렸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위로도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소용이 없었다.
“진정해, 괜찮으니까.”
에리히가 말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한 덤덤한 말투였지만, 아르사크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 터진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참아온 탓인지도 몰랐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울음이 제풀에 천천히 사그라질 때까지, 에리히는 품에 안은 아르사크를 놓지 않았다.
겨우 진정한 아르사크는 맥이 다 풀린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어떻게 된 거죠?”
“뭐가 어떻게 돼. 쓰러졌잖아.”
“쓰러져요? …맙소사, 로즈를 또 기절시킬 뻔했네요.”
“이 상황에 로즈안나 걱정이 먼저야? 대단하시군.”
에리히는 안심했는지 눈에 띄게 빈정거렸다. 아르사크는 붉게 충혈된 채 부어오른 눈을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로즈안나 걱정을 하지, 당신 걱정을 하겠어요?”
“다짜고짜 시비군. 나도 쓰러질 뻔했는데.”
“그래 봐야 난 걱정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왜? 어차피 떠날 거니까?”
아르사크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말하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순간 잊어버렸다. 입술과 턱이 동시에 떨리고, 떨림이 멈추자 아르사크는 갑자기 벼락을 때리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난 떠날 거니까! 그렇게 할 거고, 그래야만 해요! 그러니 당신 걱정 같은 것은 안 해요! 당신이 날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그런 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꿈속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아르사크는 천막 바깥에까지 다 들릴 만큼 목청껏 고함을 쳤다. 에리히의 멱살을 잡아챌 것처럼 손을 뻗쳤지만, 그 순간 에리히 쪽에서 먼저 아르사크의 양손을 거칠게 거머쥐었다.
에리히는 화가 난 것처럼 꾹 깨문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지런하지 않은 호흡이 서로 뒤섞이고, 수많은 감정을 억누른 눈동자가 위태롭게 떨렸다.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타는 것 같은 감정을 가져본 일이 없다. 닿을 듯, 닿을 듯 끝내 닿지 않아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낀 적도 없었다. 얼굴과 눈빛과 몸짓,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마주 본 채로 애가 타본 경험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벌써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서로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떠나기로 약속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어. 왜, 뭐가 그렇게 너를 조급하게 만드는 거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은가?”
“아니, 난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번에는 목숨을 내놓겠다 말했죠. 나는 믿어요.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건, 초조하게 만드는 건… 내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