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아까 들은 그대로다. 자세한 건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 지역에 원인 모를 병이 돌았고, 그래서 영지에 살던 주민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군.”
아르사크는 해 지는 창밖을 흘끗 쳐다보았다. 비스듬히 돌아간 옆얼굴에 쓸쓸한 근심이 떠올랐다.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네페로 출발할 예정이야.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남은 사람들에 대한 조치도 필요하니까.”
“혼자 가실 생각이신가요?”
“테오도르를 제외하면 그렇지.”
“저도 가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였다. 에리히는 들리지 않을 소리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온 이상 말려봐야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거야. 그대에게는 특히 더 그렇겠지.”
아르사크의 부족은 십 년 전, 전염병으로 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족장이었던 아버지마저 무너지고, 매일같이 시체를 태워야 했던 끔찍함 속에서 겨우 버티고 살아남은 아르사크였다. 네페에 가서 보게 될 광경이 감정적인 충격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터 자작이나 자작 부인도 그렇고, 클루이트도… 이방인이라고 저를 멸시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그 사람들에게 언젠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하다못해 마지막 의리라도 지키고 싶군요.”
아르사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터 자작 내외는 분명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네페에 머물렀던 때, 아르사크는 처음으로 제국의 귀족 중에서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 경험을 쉽사리 잊을 수는 없었다.
아르사크의 말을 듣고 있던 에리히는 마침내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같이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사크.”
아르사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에리히가 조용히 말했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어. 만약,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나에게 바로 말할 것. 내 말 이해하겠어?”
아르사크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에리히는 재촉하듯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그걸 지키지 않겠다면 절대 데리고 갈 수 없으니 그렇게 알아. 아무 데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할 테니까요.”
아르사크는 손목을 쥔 에리히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이 떨어지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목 안이 어릿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아픔은 찰나에 그쳤다. 에리히가 고개를 들어 아르사크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다시 단단한 성채처럼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그 고집스런 굳건함 때문에 마음 어딘가가 가닥가닥 뜯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리히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맞붙어 싸우지도 않았는데, 마치 싸움에 져서 달아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까마득히 지친 기분이 들었다.
에리히가 다가오려 할 때마다,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물러나느라 아르사크는 온종일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에게 모든 진심을 다 내보이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르사크는 입술 안쪽이 얼얼해지도록 세게 깨물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목표를 잃어버리면 뒤에 남은 부족의 사람들은 누가 이끌고 책임져야 하는가. 그들이 족장으로서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상, 그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후가 될 수도, 에리히를 사랑할 수도 없었다.
129장 아주 작은 균열 (4)
네페로 출발하는 아침, 보슬비가 내렸다.
체로 친 것처럼 가늘고 성기게 내리는 빗방울은 뿌연 물안개가 되어 지평선 너머에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아르사크는 창문 밖으로 이따금 손을 뻗어 촉촉하게 젖은 공기 속을 느리게 휘저었다. 그러다가 묵직한 회색빛으로 물든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했다. 조용하고 끈질기게, 오래 내릴 것 같은 비였다.
길이 진창이 되기 전에 서둘러 가느라 마차의 속도는 빨랐다. 이따금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젯밤에 통 잠을 자지 못한 듯 눈 아래가 거무죽죽했고, 찡그린 눈가에도 피로가 덕지덕지 엉겨 있었다. 네페까지는 마차로 꼬박 하루 반나절, 중간에 어딘가 누울 곳을 찾아 들른다고 해도 피곤함이 가실 것 같지는 않았다.
에리히는 팔짱을 끼며 불편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페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하루쯤 불편하게 잠드는 정도로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아르사크는 창밖을 보면서도 에리히가 자꾸만 선잠에 들었다 깨나길 반복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맥질을 하는 약한 물고기처럼, 그의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잠잠히 가라앉을 때마다 아르사크는 눈을 감은 에리히의 모습을 새기듯이 찬찬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닳겠군.”
잠든 줄 알았던 에리히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사크는 방심했다가 한 방 먹었다는 듯이 픽 웃고는 그와 똑같은 자세로 창틀에 머리를 기대었다.
“얌전히 잠들어 있었으면 닳는 것도 몰랐을 텐데요.”
“그렇게 열렬한 눈으로 보는데 어떻게 자?”
“좋을 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도가 텄네요.”
에리히가 눈을 떴지만, 아직 완전히 잠이 깬 표정은 아니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려 창밖의 시야를 더욱 뿌옇게 가렸다. 마치 은빛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물안개가 손에 잡힐 것 같다.
“이쪽으로 오지 않겠어?”
아르사크는 잠시 물끄러미 에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와’가 아닌, ‘오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그에서 듣는 것은 생소한 일이었다.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눈싸움이라도 하듯 지그시 보던 아르사크는 못 이기는 체하고 좁은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앉았다.
어깨가 맞닿자 에리히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한쪽 팔을 뻗어 아르사크의 몸을 당겨 안고, 그녀의 반대쪽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별로 편하지는 않은 자세로군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개의치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르사크의 말을 의도적으로 못 들은 체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런 자세로 머리를 기대고 나니 비로소 안심하고 잠든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무게를 가만히 지탱하고 있다가 그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뺨을 대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피부를 간지럽힌다. 모래 위에 비치는 햇빛을 살짝 베어낸 것 같은 금발을 가만히 매만지던 아르사크는 눈을 감은 채 어릴 때 들었던 자장가의 음을 흥얼거렸다.
비는 하루 반나절 내내 꼬박 내렸다. 네페에 도착했을 즈음, 빗줄기는 제법 굵어져 마차 지붕 위를 툭툭 때리는 소리가 났다.
네페 영지의 입구로 접어드는 골목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아르사크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이 땅 전체를 덮쳤음을 깨닫고 표정이 가라앉았다.
흐릿하게 내리는 비에 섞여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매캐한 냄새와 희미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바깥으로 번져 나오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날카롭게 깎아지른 바위산의 단면은 내리는 비에 젖어 이전보다도 더욱 거무죽죽하게 보였다.
마차가 영지 안으로 들어가자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아르사크는 이 냄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창백해진 아르사크의 얼굴을 살피던 에리히가 말했다.
“반드시 밖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면 마차 안에서 기다려.”
아르사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해진 얼굴을 들어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지요. 저도 가겠습니다.”
에리히는 누가 말리겠냐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젓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시종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을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이전에 네페를 방문했을 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종들이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머리 위로 기름 먹인 종이우산을 펼쳐 주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도대체…….”
에리히의 입에서 신음 같은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을을 이루고 있던 집들이 일시에 폐가가 되어버린 것처럼, 문들은 을씨년스럽게 열려 있었고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구덩이를 파놓고 그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모은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 땅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엎드린 사람, 몸 안의 생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선 사람.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런… 폐하.”
성으로 이어진 굽잇길 쪽에서 누군가 휘청거리며 걸어 나왔다.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에리히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너는 영주의 성에서 일하던 자로군.”
“그렇습니다, 폐하. 영주님을 모시던… 이세트라고 합니다. 이, 이렇게, 폐하께서 오셨는데… 제대로 모실 수가 없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이세트라는 자는 비터 자작의 심부름을 하며 성안의 시종들을 총괄하던 인물이었다. 몇 달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나이를 짐작키 힘들 만큼 기운이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곧 쓰러질 듯한 노인처럼 보였다. 모시던 영주의 가족이 모두 죽고 난 후, 그는 턱없이 늙어버린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황을 들어야겠군. 자작 내외와… 그 아들의 시신은 어떻게 했지?”
“일단은… 관에 넣어, 자작 가문의 무덤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다 병들었거나 죽어 관에 넣을 수조차 없어서, 보시다시피 저렇게…….”
이세트는 주름진 눈가를 질금질금 적시며 구덩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구덩이 안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그제야 보였다.
“시체를…….”
“그렇습니다, 폐하. 여러 사람에게서 발병하니… 최소한, 시신에서 전염되는 일은 없도록… 저렇게 모아서 태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