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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4화 (164/191)

164화

소식을 들은 중앙 귀족 중 몇 사람은 벌써 도착해 에리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히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의전장관이 짤막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처음 문제가 일어난 것은 열흘 전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민 중 몇 사람이 고열과 복통을 호소해 치료사가 다녀갔으나, 약을 써도 아무런 호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영지 내부에서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급속도로 늘었는데, 그 시기쯤 이미 비터 자작과 그 부인도 앓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왜 곧장 보고되지 않았지? 열흘 전에 처음 발생했다면, 적어도 하루 이틀이 지난 후에는 누군가 소식을 전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워낙…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환자가 발생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영주 내외조차 병에 걸려……. 폐하, 병의 전이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당장 근방을 격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가두어 놓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나? 그 안에 남은 생존자들은 어쩔 생각이지?”

“그건… 그것은, 하지만, 만약 수도나 황궁에까지 병이 번진다면…….”

“죽는 것이 무서우니 이미 죽어가는 사람들은 나 몰라라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더 이상 병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죽고 싶은가?”

“폐하.”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뚫고 위든이 일어섰다. 사색이 된 의전장관은 에리히와 위든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 식은땀이 흘러내린 이마를 훑었다.

“말씀하시지요, 숙부님.”

에리히가 말했다. 위든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짐짓 침통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 시선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

“폐하, 네페의 비터 자작과 저는 오래전부터 서로 알아 온 사이입니다. 평생 자신의 영지를 돌보며 살아온 그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닥치다니… 저 역시 괴로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위든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괴로운 것 같았기에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마음 한구석이 진득진득한 늪처럼 엉겨드는 것을 느꼈다. 위든이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작이 자신의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돌보고자 하였는지는 폐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숙부님. 저 역시 그를 여러 번 만나보았으니까요.”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 영지의 질서를 다스릴 영주마저 없다면 남은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네페로 가겠습니다.”

128장 아주 작은 균열 (3)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귀족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엇인지 알지도 모를 병이 번지고 있는 곳에 공작이 자처해서 가겠다니?

그들은 위든과 에리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내심 긴장했다. 혹시 자신들 중 누군가가 함께 가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표정조차 바꾸지 않은 채 위든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숙부님이 가시도록 할 수는 없지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폐하, 저는 비록 외곽의 땅을 다스리고 있는 공작이나 황실의 일원입니다. 제국의 시민들이 겪는 비극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시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숙부님이 그곳에 가셔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치료사를 대동하고 조심하여 이동할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네페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 조치를 숙부님께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을 질 사람은 황제인 저이지, 디몰트의 공작인 숙부님이 아니니까요.”

위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 순간 에리히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위든이 황제의 권한을 넘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투였기 때문이다.

에리히가 말했다.

“네페에 대한 조사는 물론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병의 원인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황궁과 수도의 안전 또한 신경을 쓸 것입니다. 환자가 아님에도 영지 내에 남은 사람들의 처우에 대해서도 곧장 방도를 마련할 것이니, 숙부님께서 직접 위험을 자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든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직접 네페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는지, 에리히가 거기까지 알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굳이 이런 때에, 아무도 바라지 않을 일을 자처하며 나서는 것이 대수로운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위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에리히는 그 생각이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위든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에리히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깨닫자 그는 재빠르게 한발 물러났다.

“그러시다면 폐하, 네페 영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조사는 누구를 중심으로 진행하실 예정입니까?”

에리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위든은 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페에서 벌어진 일을 한시라도 빨리 조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 앉은 귀족들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 자신이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에리히가 자신을 지목할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에리히는 그들 모두를 바깥으로 내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직접 갈 것입니다.”

앉아 있던 귀족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의전장관이 당혹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보았다.

“폐하, 직접 가신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만에 하나 폐하께서 병에 걸리시기라도 한다면…….”

“그럼 그대가 가겠는가?”

의전장관은 말문이 막혔다. 마땅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리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황제인 나의 안위를 그토록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라면 당연히 그대가 가겠다고 나서야지. 내 말이 틀렸나? 하지만 의전장관인 그대는 물론이거니와, 여기 모인 그 어떤 사람들도 나 대신 가겠다고 나서지 않는군. 만에 하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내 숙부님을 제외하고서는 말이야.”

누구도 한마디 대꾸가 없었다. 에리히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얼굴에서 숨기지도 않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테오도르가 그 뒤를 급히 따랐다.

“폐하, 네페로 직접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테오도르. 단순한 병이라기엔 정황이 이상해. 여태껏 네페 부근에서 전염병 같은 것이 퍼진 일은 없었어. 누군가 못 보던 자가 그 영지에 드나든 적은 없는지, 만약 떠났다면 어디로 갔는지를 샅샅이 조사하고 검토해야 한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다가 숙부님은…….”

말을 하려던 에리히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위든에 대한 의심을 섣불리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다른 보고 사항은 없나?”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답답한 표정으로 재킷의 버튼을 하나 풀어버리면서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네페로 출발한다. 마차를 준비하고 여장을 준비해라. 가장 실력이 뛰어난 치료사 세 명에게 지시해 여러 증상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약을 준비하라 일러둬라.”

“명령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운트의 촌장에게도 전갈을 보내어 네페 영지의 생존자들을 잠시 그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치해.”

오늘 밤은 바쁠 것이다. 로즈안나와 테오도르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에 함께 집으로 돌아간 일이 거의 드물었다.

에리히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테오도르에게 내린 명령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가 아니면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에리히가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테오도르가 그를 불렀다.

“폐하.”

“왜 그러지?”

“황후 마마께서 같이 가겠다고 하시면, 폐하께서는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에리히의 안색이 일순 어둡게 변했다. 자세한 정황을 안다면 아르사크는 분명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나설 것이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설득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 말을 타고 마차를 뒤쫓아 올지도 몰랐다. 그러느니 차라리 함께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직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네가 말한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 그에 맞춰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테오도르가 그 자리를 벗어난 후,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있을 동쪽 궁의 서재로 향했다. 평소처럼 단정하고 확신에 찬 태도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방황하는 사람 같은 몸짓과 표정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로크로몬서의 왕비가 되어 나타났던 힐데트로스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사크를 죽이고자 시도했던 쿠르두, 그리고 그를 죽여버린 위든, 아르사크를 습격한 신원 불명의 두 사람과 아르사크가 튈브리크의 부족민들에게로 갑자기 달려갔던 것까지.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한 일투성이인데, 그 실마리로 연결되는 하나의 점이 보이지 않았다.

힐데트로스가 떠날 때, 에리히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타국에서 축하 사절로 온, 심지어 왕비의 신분인 그녀를 섣불리 대했다가는 자칫 전쟁이 벌어질 위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에리히는 나갈 때보다 다소 지친 기색으로 돌아왔다. 아르사크는 여전히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둥그스름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에리히가 들어오자 얼른 일어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시종들조차도 네페에 끔찍한 일이 생겼다며 수군거리고 있어요.”

“…좀 앉아서 얘기해야겠어.”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몸을 등받이 깊숙이 파묻었다. 네페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아르사크 쪽에서 먼저 말을 했으니 이제는 피할 도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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