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 남자들은 뭐지? 그대가 그들과 싸운 건가? 갑자기 튈브리크에는 왜 간 거지? 대답해.”
에리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손아귀에서 방금 놓여난 사람처럼 심하게 떨었다.
아르사크는 문득 그가 애처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우스운 일이다. 무서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황제가 애처롭다니. 정작 죽을 뻔한 것은 나였는데.
그에게 대답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는 아르사크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부족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지 않았던가? 이간질임을 깨닫지 못할 만큼 아르사크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문득 아르사크의 머릿속에 티리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를 모두 잃은 그 아이를 동생처럼 돌보았던 그 긴 시간 동안, 아르사크는 한 번도 티리야의 그런 표정을 본 적 없었다.
‘내가 그 애를 실망시킨 거야.’
나밖에는 믿을 곳이 없던 티리야를, 내가 실망시켰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마치 울고 있는 사람처럼 목울대를 무겁게 울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날 사랑하나요?”
문득,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에리히뿐만이 아니라 아르사크도 그렇게 생각했다. 흔들리는 불길도, 깜빡이던 눈꺼풀의 움직임도, 숨소리조차도 전부 사라진 것 같다.
에리히의 어깨가 천천히 추켜 올라갔다. 희미한 떨림이 남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에리히의 얼굴은 슬프게 보였다.
“…그래, 사랑해.”
그 순간 정적은 끝이 났다. 아르사크는 눈썹을 찡그리다 눈을 감아 그의 모습을 시야에서 없애버렸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돌아누운 아르사크의 등을 에리히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대답이기라도 한 것처럼.
127장 아주 작은 균열 (2)
아르사크를 공격했던 두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결국 밝혀낼 수 없었다. 본인들이 죽어 심문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황궁 내에서 그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르사크의 생일을 핑계 삼아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자들이 데리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에리히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다른 지방에 머무는 귀족이 굳이 그렇게까지 귀찮은 일을 할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습격에 관한 일은 불문에 부쳐졌고,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자는 연회가 끝나자 자신의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힐데트로스가 곧장 떠났단 말이지?”
에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사크는 푸른색으로 물들인 허리띠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네, 마마.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좀 더 머물면서 뭔가 공작을 꾸밀 거라 예상했어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 정도가 준비했던 패의 전부였든지. …어느 쪽이든 좋아. 이번 판은 내가 이긴 셈이니까.”
에셴의 맞은편에 앉은 아르사크는 평소와 달리 낯선 복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모양을 내어 틀어 올리거나 보석으로 된 장신구를 꽂지 않았다.
에셴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마마. 오늘 그런 옷을 입으신 건…….”
“아, 이거? 처음 여기로 올 때 가져왔던 옷이야. 그간 넣어뒀는데, 꺼내서 세탁하고 터진 곳을 대강 고치니 괜찮더라고.”
에셴은 아르사크가 토르갈 부족의 옷을 단순히 재미 삼아 꺼내 입었다는 말을 믿을 만큼 생각이 얕지는 않았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고작 드레스 몇 벌을 유목민식으로 살짝 고치는 정도로 소심한 반항에 만족할 아르사크가 아니었다.
그녀가 황후로서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유목민의 옷을 입은 것은 틀림없이 그만한 심경의 변화가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까지는 에셴도 잘 알지 못했다.
“황후 마마, 폐하께서 잠시 마마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키 작은 시종이 말했다. 아르사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느린 한숨을 내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무슨 일이람.”
“폐하께서 마마를 몹시 염려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 살피시려는 게 아닐까요?”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걸. 그만 가봐, 에셴. 남편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르사크는 시종을 앞세워 에리히가 있는 동쪽의 궁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며 지나가는 다른 시종들이 아르사크의 옷차림을 곁눈질하며 의아한 소리로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다.
드레스를 입지 않은 지도 벌써 닷새째.
로즈안나는 진작에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아직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므로, 아르사크는 어디를 가든지 화제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폐하, 황후 마마를 모셔왔습니다.”
에리히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르사크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테오도르를 포함한 모두를 방에서 내보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몇 걸음 정도의 사이만을 두고 떨어져 서 있었다.
“그 옷은 언제까지 입고 있을 생각이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애매하게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옷을 입는데 기간을 정해야 하나요?”
“어떤 곳에서 입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여긴 황궁 안이고, 그대는 여전히 이곳 황실의 일원이야.”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면서도 에리히는 순간 그 발언을 후회하는 듯했다. 아르사크는 특별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에리히의 말이 그녀에게 가닿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답답했다. 예전에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길길이 날뛰고 화를 냈을망정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은 없었다. 맞붙어 싸움만 하는 결과가 되더라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 좀 해.”
에리히가 갈등 끝에 입을 열었다. 아르사크는 여전히 에리히를 외면한 채였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근의 에리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표현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달라진 점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르사크는 더 이상 에리히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아르사크의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에리히에게 무언가 말하려 할 때마다, 울면서 돌아서던 티리야와 떠나는 자신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결코 그들과 멀어질 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최근에 들어서는 이따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지 잊곤 했다.
불타는 것 같은 이 기분도 머지않은 때에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돌아서야 한다.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
“저는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가, 곧 무언가를 애원하는 것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내게 이야기를 하면 될 게 아닌가? 설마 이제 와서 내가 그대를 불신할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폐하께서 제 말을 믿든, 믿지 않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고작 그런 것이 두려워서 입을 다물 저도 아니지요. 대체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뭐가 궁금하냐고? 말이라고 해? 전부 다 궁금해. 대체 그날 당신을 공격한 자들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무슨 말을 들었길래 한밤중에 혼자 튈브리크까지 갔던 건지. 그리고 왜 이러는 건지.”
“이미 다 끝나버린 일을 이제 와서 듣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또다시 목을 베는 일에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왜 이러냐니요, 저는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머물 사람도 아니죠. 단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뿐.”
에리히는 자신을 외면하느라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아르사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기분을 감히 그녀에게 구제해 달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옳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사크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에리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에리히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힌 의전장관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기도 전에 대뜸 말했다.
“폐하, 급한 보고입니다.”
가쁘게 들이마신 숨소리가 불길할 정도로 거칠다. 에리히는 딱딱해진 표정을 한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무슨 일이냐?”
“네페 영지의 근방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네페에 알 수 없는 병이 돌아 주민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의전장관의 말에 놀란 것은 에리히만이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클루이트와 비터 자작 내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의전장관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자작 내외는? 그 아들은 무사한가?”
“아니요, 마마. 네페의 영주와 그 부인… 그리고 후계자였던 아들까지도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 폐하, 서둘러 대안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영지를 다스릴 사람이 없으면 문제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게다가 근방의 영지에는 병이 번지지 않았는지도 조사해야 하니 어서…….”
“곧 가도록 할 테니 물러가라.”
의전장관은 초조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에리히는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짚었다.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그를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았다.
“폐하.”
“…무슨 일이 이렇게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지 모르겠군.”
에리히는 지친 사람처럼 읊조렸다. 화를 내거나 놀랄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달싹거리다 그의 어깨를 어색하게 안았다.
“가보십시오. 상황이 심각한 것 같군요.”
“여기서 기다려.”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잠시 고민하듯 말이 없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