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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2화 (162/191)

162화

126장 아주 작은 균열 (1)

한밤중, 튈브리크의 시민들은 느닷없는 말발굽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무언가 뒤집어지는 소리,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땅을 뒤흔드는 듯한 세찬 발굽 소리에 소스라치며 깨어난 사람들은 다급히 창문을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남은 것이라고는 누군가 말을 달리며 걷어차고 지나갔을 게 분명한 엎어진 궤짝과 쓰레기 더미가 전부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졸린 눈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온 알린은 부족의 사람들 전체가 입구 쪽에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하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르사크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알린은 일시에 졸음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르사크!”

아르사크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어두워서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을 비추고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다.

티리야는 아르사크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면서 붕대와 약을 가지고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 몇몇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아르사크, 어떡해…….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진정해, 티리야……. 이거, 전부 다 내가 흘린 피는 아니야. 어깨는 다쳤지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르사크… 혹시 황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데르가 아저씨, 마을에 아무도 오지 않았나요? 병사들이 왔다거나,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아르사크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황후 마마’의 생일이라며 튈브리크 역시 하루 종일 북적거렸던 것이다. 주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만 몇 번 지나갔을 뿐, 병사들이 이 마을에 올 일이 대체 뭐가 있다는 말인가?

티리야가 치료를 해주었다. 어깨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러나온 것을 제외하면 아르사크가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나 곳곳에 생채기가 났고 손목도 약간 부어올랐다. 티리야는 숨이 넘어갈 듯 흐느끼면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아르사크, 제발… 무슨 일인지 말해주세요. 누가 이런 거예요? 도대체 누가? 황제라는 자는, 대체 그 사람은 뭘 하고 있었어요? 아르사크가 이렇게 될 동안……!”

“그만 울어, 티리야. 괜찮아, 난 죽지도 않았고……. 너희들도 무사하니 다행이야.”

“다행이라고요? 이게 다행이에요? 이런 꼴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행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쓸모없는 제국 놈들, 대체 병사라는 자들은 뭘 하는 거예요?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황궁 안을 돌아다니고요? 이따위 빌어먹을 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그만 좀 해, 티리야!”

날카롭게 소리친 아르사크는 다음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티리야를 돌아보았다. 크게 벌어진 검은 눈동자를 보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티리야, 난…….”

“아르사크는 변했어요.”

티리야의 말에 아르사크는 한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르사크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지만, 티리야는 꽉 깨문 입술을 덜덜 떨면서 그것을 외면했다.

“티리야, 들어봐. 그게 아니야.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아뇨, 아르사크는… 아르사크는 정말로 변했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금 당장 우리 다 같이 떠나자고 하면, 아르사크는 그럴 수 있어요? 우리와 함께 아무 미련도 없이 여길 버리실 수 있어요?”

“제발, 티리야. 내 말 좀 들어줘.”

“싫어요! 내가… 내가 알던 아르사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던, 우리를… 지켜주려고 애쓰던 분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지금은요, 아르사크를 가끔 만날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르사크는 이미… 우리를 벗어나고 말았다고요.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족장이 아니라, 이 거대한 나라의 황후가 되셨다고요.”

울음 섞인 티리야의 말은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아르사크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칼을 맞은들 이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젓는 아르사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너희를 항상 걱정하고, 너희만을 지키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노라고. 지금도 너희를 염려하면서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단 한 가지,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만약 티리야와 모든 사람들이 당장 이곳을 떠나자고 말한다면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티리야…….”

“아르사크가 행복하다면 그걸 원망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곳의 황후와…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티리야, 기다려. 그렇지 않아.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약속된 시간이 다 끝나면 난 너희들과 함께…….”

“가겠다고요? 어디로요? 그 자치구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여전히 이 나라 안에서 사시겠다는 얘기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다가 아르사크가 영영 떠나버리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어요?”

티리야의 목소리는 마치 환청처럼, 사방에서 아르사크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허공을 헤매던 아르사크의 손이 바닥을 짚은 순간, 티리야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눈물을 닦았다.

운 채로 열이 올라 퉁퉁 부어버린 눈꺼풀이 안쓰러웠지만, 아르사크는 티리야의 손을 잡아줄 수조차 없었다.

“피가 멎으면… 돌아가세요. 당신을 데리러 사람들이 오겠지요. 전… 이제 아르사크를 만나지 않을래요. 앞으로 다시는.”

“티리야, 제발 부탁이야. 그게 아냐! 난, 걱정이 돼서 왔어. 너희가… 전부, 너희가 전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온 거야!”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던 티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르사크를 바라보는 표정은 복잡한 채 풀리지 않았다. 티리야가 말했다.

“우리가 왜 죽겠어요? 이렇게 모든 것이 넘치고 풍족한 곳인데요.”

마지막 말에는 씁쓸하고 냉소적인 자조가 섞여 있었다. 티리야가 문을 닫고 나가버린 후, 바깥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알린이 뭐라고 소리치는 듯도 했지만 아르사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도착했다. 그들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르사크는 순간 자신이 죽인 남자가 말했던 것이 사실인가 싶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아르사크를 맞은 것은 당황한 표정의 테오도르였다.

“마마!”

말에서 내린 테오도르가 아르사크를 향해 달려왔다. 아르사크는 그토록 요동치던 마음이, 혼란스럽던 감정이, 일순간 눈 녹듯 사라지며 냉정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테오도르에게서 에리히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리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직접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실망스러운지, 왜 이토록 마음이 허탈한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제가 무엇을…….”

“아니야, 됐다. 아무 일 없으니… 돌아가자.”

“마마…….”

“됐다고 말했잖아. 더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 말을 데려와라.”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병사가 말을 끌고 왔다. 테오도르가 부축하기도 전에 말에 올라타 고삐를 쥔 아르사크는 서글픔에 일그러진 알린의 표정을 내려다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상황이 좀 정리가 되면 다시 올게. 티리야를… 보살펴줘. 잘 달래주고.”

“…아르사크, 아니… 마마. 우린…….”

“마마라고 부르지 마. 나는… 여기서만은 황후가 아니야. 나는 여전히, 여전히 토르갈의 족장이고, 토르갈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알려줘. 약속해, 알린.”

알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났다. 아르사크는 입술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혀끝을 꾹 깨물면서 그들을 등진 채 말을 돌렸다.

아무도 아르사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테오도르조차도 눈치를 보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말을 탄 병사들도, 호위하며 걷는 병사들도 아르사크의 턱에서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애써 못 본 척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아르사크는 따라붙는 호위를 모두 물리치고 혼자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벽난로에 피워둔 작은 불길이 일렁이는 것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창가에 드리운 긴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르사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에리히였다.

침묵이 내려앉는다. 에리히 역시 아르사크를 돌아보았지만 움직이지도,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숨길 수 없는 복잡한 시선이 잠시 오간 뒤, 아르사크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군요. 이만 자겠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여전히 창가에 기대어 선 채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눈으로 뒤쫓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겉옷을 벗었다. 치료를 하면서 옷도 갈아입었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마치 후녀가 되어 제국으로 오기 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죽은 자들이 있더군.”

고집스럽기까지 하던 정적을 뚫고 마침내 에리히가 입을 열었다. 괴로움을 참는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다.

아르사크는 누운 채로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자수를 놓은 부드러운 베갯잇이 에리히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답해야 하나요?”

“내게 뭘 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그 순간, 아르사크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충동적인 분노가 뱃속을 푹 찌르는 느낌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에리히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완전히 굳어진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온 얼굴을 찡그린 채 여전히 아르사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에리히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었음을.

이유가 뭘까? 가능성은 많았다. 놀랐기 때문에, 걱정했기 때문에.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대화는 태반이 말싸움이었다. 사소한 의견 대립도 곧 다툼이 되곤 했다. 금방 풀어지고 말 다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시달린 아르사크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아르사크는 마음속에서 누군가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그럴까?’

다가오지 못한 이유가 정말 나를 걱정해서일까? 혹시 뭔가를 숨기려던 것은 아닐까?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길 이유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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