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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1화 (161/191)

161화

아르사크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생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싸우는 곳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죽이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아르사크는 재빨리 움직여 오른쪽에서 달려든 자의 발을 걸었다. 한쪽 다리가 주춤한 찰나, 움켜쥔 주먹이 복면 위를 정확하게 가격하며 빡! 하는 소리가 났다.

“억!”

“둘 중 하나만 살려주지, 어느 놈이 살 테냐?”

“헛소리 마라!”

얼굴을 가격당한 쪽이 등을 웅크린 순간, 뒤쪽에서 다른 하나가 성난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아르사크는 몸을 피하려다 말고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획을 바꿨다. 몽롱한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었다.

아르사크는 복면 앞이 피로 젖은 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자신의 방패로 삼았다. 뒤에 서 있던 자가 휘두른 단검이 엉뚱한 자의 몸을 갈랐다. 목에서부터 찔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군. 축하한다, 네놈은 살았어.”

아르사크는 푸들푸들 떨며 쓰러지는 자를 발로 걷어차는 동시에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아르사크의 몸이 홱 돌았다. 그리고 그녀가 걸치고 있던 로브가 갑자기 상대방의 시야를 한순간 가렸다. 아주 짧은 순간의 멈칫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로브 뒤에서부터 칼을 휘둘러 그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연달아 찌르고, 비명을 터뜨릴 수 없도록 손바닥의 단단한 아랫부분으로 턱을 올려 쳤다. 혀끝을 깨물었는지 끅, 하는 신음과 함께 복면 밖으로 피가 몇 방울 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발로 차 멀리 날려버린 후, 아르사크는 그의 목줄기를 거세게 거머쥐었다.

“윽, 끄윽…….”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목이 졸린 채 쓰러진 자는 옆구리에서 피를 뿜으며 푸들푸들 떨었다.

아르사크는 그가 쓰고 있던 복면을 벗겼다. 흉터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궁 안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자였다.

“첫 번째 질문을 하마. 누가 보냈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아르사크를 향해 거칠게 침을 뱉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린 아르사크의 얼굴이 한순간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허벅지에 찔려 있던 검이 쑥 뽑혀 나오더니, 이번에는 왼쪽 손바닥에 꽂혔다.

“아악!”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지 그토록 알아보고 싶나? 그럼 계속 나를 시험해 봐. 찔려도 단숨에 죽지 않는 부위가 네놈의 몸에 몇 군데나 되는지 알고 싶다면 밤새도록 가르쳐줄 수도 있어.”

“크, 윽… 이, 괴물 같은… 계집.”

“알면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그럼 이런 꼴도 당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두 번째 질문을 할 테니 이번에는 머리를 잘 굴려봐. 왜 이런 짓을 하지? 나를 노리는 건가? 아니면 황제를 노리는 건가?”

“황제? 후, 흐흑… 황제를 노린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을 왜 노린단, 말이냐?”

아르사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던 아르사크는 그의 손바닥을 찔렀던 검을 다시 예고도 없이 빼내며 턱 밑에 들이댔다.

“무슨 뜻이지? 똑바로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숨통을 끊어버릴 테니까.”

“흐, 흐흑… 하! 어차피… 네가 죽이지 않아도, 실패했으니 죽게 될 테지. 어떤 자가 황제의… 쿨럭!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살아남겠어?”

“쓸데없는 말 지껄일 시간에 내 말에 대답해.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라. 황제가 너희의 주인이라고?”

“크, 흐…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정말이지 멍청하군. 폐하께서, 네놈 같은… 것들에게, 정말로 살 땅을… 마련해 주실 거라, 그렇게 생각했나? 네놈들에게, 그런 은혜를… 큭! 베푸셔서 대체,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지?”

호흡이 떨린다. 아르사크는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도 한순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에리히라고? 이 모든 일을 벌인 것이?’

그럴 리 없어. 아르사크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에리히가 자신을, 토르갈을, 이제 와서 죽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럴 이유가 없다.

“감히 더러운 입으로 황제를 거론하지 마라. 난 네놈의 말을 단 하나도 믿을 수 없으니까.”

“흐흐, 믿으면… 어떻고, 안 믿는들… 또 어떻지? 너는… 양이나 치며, 비루먹은 개처럼… 떠돌아다니던 부족 따위를, 다스렸… 쿨럭! 다스렸으면서, 감히 제국의 황제와… 협상을 논하려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죽었어야 할 죄다.”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목을 거머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뺄 뻔했다. 남자가 읊조린 말은 아르사크에게 그만한 충격을 주었다.

이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아르사크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리히와 자신이 약속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 이외에는.

하지만 두 사람은 테오도르와 로즈안나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알린과 티리야였는데.

아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르사크는 다 죽어가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뒤통수를 바닥에 쾅 찧어버린 뒤 이를 갈며 눈을 부릅떴다.

“위든이 보냈나?”

“크흑, 공작 전하는… 폐하와 함께… 황실의, 영광을… 이어나갈 분이시다. 두 분의 일에… 걸림돌이 되는, 너희 같은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지.”

“웃기는 소리 지껄이지 마!”

“하, 하하……! 믿고 싶지 않나? 그럴 테지, 윽……! 너희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다. 폐하의 앞길을… 막던 자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너희, 따위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너희 부족은… 도륙당할 것이다. 가축처럼… 말이야. 아마 지금일지도… 모르지. 폐하께서도, 그리고 전하께서도 같은… 의견이셨다. 너희들은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에…….”

남자의 목소리가 서서히 까라졌다. 아르사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지만 대량의 피가 빠져나간 얼굴은 허옇게 질려 두 번 다시 혈색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용 가치가 사라졌다고?

홀드빅과 볼핀을, 방해가 되던 귀족들을 없앴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팽개친 채 미친 듯이 달렸다. 경비대가 그들의 시체를 발견하면 일대 소란이 일어나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구간으로 달려간 아르사크는 사색이 된 병사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았다.

“저리 비켜! 죽고 싶지 않으면!”

“화, 황후 마마! 이 피는… 도대체? 아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황후 마마! 안 됩니다!”

호각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아르사크가 탄 말은 벌써 정원의 작은 꽃 덤불을 마구잡이로 뛰어넘고 밟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병사들 중 몇몇은 에리히에게 상황을 알리러 뛰어가고, 몇몇은 죽을힘을 다해 말을 달려 아르사크의 뒤를 쫓았다.

‘그럴 리 없어.’

고삐를 쥔 아르사크는 신들린 사람처럼 말을 몰았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머릿속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고, 그사이로 에리히와 부족민들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나를 죽이려 했을 리 없어.’

눈시울 안쪽에 열이 고인다. 아르사크는 이를 악물었다.

‘그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나?’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는 조금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허상이었을까? 아니면 당신도 역시 속았던 것일까?

그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에리히가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르사크도 차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대체 무슨 낯으로 부족민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까?

죽든, 살든, 그것 자체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게 설령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르사크는 숨을 몰아쉬며 쉼 없이 말을 재촉했다. 뒤따르는 병사들도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한참 뒤처지고 말았다. 마치 빛이 쏘아져 나가듯, 아르사크의 뒷모습은 빠르게 멀어졌다.

“뭐가 어째?”

노성이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르사크의 방이 비었으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에리히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허겁지겁 달려온 병사들로부터 아르사크가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나자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어졌다.

테오도르는 다급히 병사 한 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이 따라갔다고는 하지만, 당장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많은 인원을 풀어 찾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나갔느냐?”

“예, 폐하. 혼자 가셨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셨습니다. 저희가 말려도 듣지 않으시고, 게다가 피가…….”

“당장 죽고 싶으냐? 똑바로 말하지 못해?”

“폐, 폐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들은 오늘 말들을 지키는 당번이었습니다. 그, 그런데 황후 마마께서 갑자기, 뛰어오셔서 저희들이 말리는데도 뿌리치고 말을… 말을 타고…….”

“네놈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황후 한 명 붙들지 못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황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조리 목을 매달아 광장에 효수할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에리히의 성질을 맨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로즈안나조차도 에리히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시녀들을 시켜 황궁 주변을 샅샅이 살피라는 명령만 내렸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에리히는 화를 삭이지 못해 입술을 떨고 있다가 방 안의 협탁을 거칠게 걷어찼다. 길쭉한 넝쿨처럼 아름답게 굴곡졌던 협탁의 다리가 벽에 부딪히며 뚝, 부러졌다.

“폐하, 큰일입니다.”

그때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병사가 나타났다. 몸에 두르고 있는 휘장으로, 에리히는 그가 경비대의 단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후를 찾았느냐?”

“아니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황후 마마가 아니라,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다툼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황후 마마께서 연관되신 일이 아닌가 하여 달려왔습니다.”

에리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로즈안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병사들은 에리히와 함께 썰물처럼 방 안을 빠져나갔고, 시녀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로즈안나를 부축하느라 허둥거렸다. 겨우 의자에 앉은 로즈안나가 공허한 눈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르사크 님… 대체,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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