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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0화 (160/191)

160화

“숙부님.”

뒤돌아선 위든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에리히가 말했다. 위든은 검날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천천히 미소를 띠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단정한 얼굴이 곤란한 빛을 띤 채 천진하게 움직였다가, 이내 착잡해졌다.

“폐하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군요.”

“왜 그러셨습니까?”

두서없이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의도는 명백했으므로 위든도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어느새 깨끗해진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며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의 경솔한 제안으로 인해 황후 마마께서 겪으셔서는 안 될 일을 당하셨으니, 제 선에서 책임을 졌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죽이실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감히 황족의 몸에 상처를 낸 자입니다.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중죄지요.”

“제가 그것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아니지요.”

“황후 마마의 용태는 어떠하십니까?”

에리히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말없이 위든을 바라보았다. 위든은 시종에게 검을 치워 놓으라 이르고는 에리히에게 의자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망설이던 에리히는 끓는 듯한 호흡을 삼키며 위든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방금 사람이 한 명 죽어 나간 곳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폐하께서는 그자를 심문하여 배후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으셨겠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라도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 쿠르두라는 자는 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황궁에 있던 병사였습니다. 그자의 아버지는 선황이 계시던 시기 기마대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아내가 아이를 두고 그만 사고로 죽고 말아,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부대 안에서 길렀습니다. 폐하께서 그런 사정까지 속속들이 아시기는 어렵겠으나, 품행이 방정하고 충실한 병사의 경우 단장들이 이따금 그런 일을 묵인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요.”

위든은 수염이 까슬하게 돋은 턱 아래를 천천히 문질렀다. 촛불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단 반나절 사이에 갑자기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눈에 보이는 그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쿠르두는 아버지를 따라 입대했습니다. 태어나 보고 자란 환경이 그랬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줄로 압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가족이던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죽고 난 후, 그는 천애 고아가 되었지요. 돌봐줄 친척이라고는 애초부터 없었고, 일평생 병사로서만 살았던 인물인지라 그를 부추길 만한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심문을 하다 보면…….”

“폐하.”

위든은 한순간 격해진 에리히의 감정을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쉽사리 분질러버렸다.

“이런 일일수록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쿠르두를 심문하셨다면, 무언가 얻으실 수 있었을까요? 애초에 배후가 없는 자를 심문해 봐야 아무것도 나올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자가 심문을 당하는 동안 공포에 떨게 될 자들의 생각은 다르겠지요.”

“공포에 떨다니요? 지은 죄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공포에 떨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리 쉽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귀족들은 어떻게든 누군가의 ‘배후’가 되어보지 않은 자가 더 드뭅니다. 배후가 된다는 것이 사실은 그렇게 심각한 일만은 아니니까요. 아주 사소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많은 수를 씁니다. 보이지 않는 줄을 치고 먹잇감이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일 뿐, 서로 견제하는 사소한 일까지 폐하께서 모두 간섭하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에리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위든은 에리히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폐하께서 쿠르두를 추궁하여 그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캐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시면 귀족들은 겁에 질릴 것입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더라도 혹시나, 그자의 입에서 헛소리로라도 가문의 이름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무엇으로 벗어나겠습니까?”

“그 말씀은 방금 숙부님이 하셨던 말씀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저자가 만약 정말로 태어나서 병사들과 부대끼기만 했다면 어찌 알지도 못하는 귀족의 이름이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귀족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사람을 조종하여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병사들 중에서 그런 자가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저들 중에도 귀족이 있습니다. 만약 쿠르두가 누군가로부터 흘려들은 귀족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내뱉는다면, 폐하께서는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분명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쿠르두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이상 그를 용서할 수도 없다.

에리히는 이를 갈며 위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 사이에서는 어떤 소문이 나겠습니까? 공포로 바쳐진 충성이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일개 병사 따위가 홀몸으로 황후와의 검술 시합을 요구하고, 또 그토록 살기등등하게 달려들 수 있다고 보십니까?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입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좋게든 나쁘게든 눈에 띄는 분입니다. 그분과 관련된 소문이 대개 어떤 것들인지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쿠르두는 자신의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던 자였습니다.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순간의 자존심이었을 것입니다. 막상 상대를 하고 보니, 황후 마마께서 소문과 다르지 않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반드시 꺾고야 말겠다는 불필요한 호승심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태를 이대로 납득해야 한단 말인가? 에리히는 무릎에 얹힌 주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세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배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도,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저 역시 폐하께 사죄를 드립니다. 저의 불찰로 황후 마마께서 부상을 입으셨으니 죄를 물으십시오.”

위든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에리히는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갔든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인 쿠르두는 이미 죽었다. 이제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에리히가 위든을 찾아가 쿠르두가 죽었음을 안 바로 그 무렵, 정신을 잃은 채 자고 있던 아르사크가 깨어났다.

“로즈? …로즈안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시중드는 시녀들이 한두 사람쯤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자고 있는 아르사크를 배려하느라 그랬는지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깨가 욱신거리긴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침대 아래로 내려와 의자에 걸린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밤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나절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아르사크는 조용한 복도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바깥에도 사람들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많더니,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마치 낮에 있었던 일이 꿈인 양 멀게 느껴진다. 그 함성, 그 햇빛, 생사를 가를 수도 있었던 검의 움직임.

그자는 죽었을까? 아니면 갇혀 있을까? 아르사크는 생각에 잠겨 걸었다.

쿠르두라고 했던가. 그는 잘 훈련받은 병사다웠다. 그가 나섰을 때 병사들이 수군거리지 않은 것을 보면 실제로 부대에 소속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황궁 안에 존재하는 부대의 병사들은 귀족이나 황족들을 마주칠 기회도 많다. 그들 중 누군가가 쿠르두에게 불미스러운 의도로 접근했다 하더라도 눈을 피할 방법 역시 얼마든지 많았다.

‘이 일에는 힐데트로스가 관련되어 있을 거야, 틀림없이… 하지만 외국의 왕비가 되었으면서 대체 어떻게? 설마 후작가의 세력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손을 뻗치고 있는 건가?’

쿠르두가 충성하는 자가 힐데트로스인지, 아니면 볼핀 후작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든 아르사크는 자신이 멍하니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곳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에리히에게 가보는 게 나을까? 아니, 차라리 감옥에 찾아가 그가 있는지 물어볼까? 만약 누군가 그를 시켜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혹시 그때 니나처럼…….

아르사크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돌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걸으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누군가 소리 없이 땅을 박찬 것이다. 아르사크가 몸을 돌린 순간, 어두운 그림자 두 개가 그녀에게로 재빨리 달려들었다.

125장 불청객 (6)

‘빠르다.’

달려든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아르사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심지어 그들은 아르사크가 어깨를 다쳤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붕대를 감아놓아 오른쪽 팔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쪽으로만 공격을 집중한 것이다.

방을 나설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음을 후회하면서, 아르사크는 입술을 깨물며 옆구리를 노리고 뻗쳐오는 단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누가 보낸 놈들이지?”

아르사크가 외쳤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르사크는 이들이 오래전 힐데트로스가 보냈던 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저 보수를 받고 잔일이나 하던 심부름꾼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아니다. 두 명 모두 확실한 실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쓰고 있는 복면. 눈이 어디 붙었는지조차 제대로 분간할 수 없게 완전히 얼굴을 가린 복면은 절대로 어쭙잖은 심부름꾼들이 걸치고 다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어. 경비대가 운 좋게 지나가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면 하나씩 처리하는 수밖에는.’

그러나 역시 다친 어깨가 문제였다. 게다가 약 기운도 아직 다 빠지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어지러이 돌았다. 아르사크는 옆에서 달려드는 단검을 피하며 그의 손목을 거꾸로 꺾었다.

“큭……!”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에 쥔 단검을 놓지 않았다. 이 정도의 참을성 역시 시시한 자들에게는 가르치려야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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