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과연 훌륭하시군요.”
어깨를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르두는 순간적으로 흠칫했을 뿐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아르사크는 검을 쥔 손에서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그의 가라앉은 얼굴을 쏘아보았다.
“이제 와서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한들 내가 너를 용서해 줄 리 없다는 사실은 잘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제가 그런 꼴사나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럴 만한 놈이었다면 몸소 상대해 주는 일도 없었을 거야.”
두 사람이 다시 움직였다. 쿠르두는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빨랐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이 좋겠지.
아르사크는 이 싸움을 오래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세차게 부딪친 검이 잠깐 물러난 순간, 아르사크는 쿠르두의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살의를 읽고 잠시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자는 굳이 나를 죽일 필요가 없다.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 역시 끊어지고 말 것이다. 용서도, 살아날 한 줄기 희망도 바라지 않고 달려드는 이유가 뭘까?
이런 눈빛을 어디서 봤더라?
‘저는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니나!
아르사크의 머릿속에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 니나였다. 황후가 선택되는 최종 예식이 있던 날, 자신의 시중을 드는 척하며 마지막까지 곁에 남았다가 암살자로 돌변했던 니나가 떠올랐다.
그 순간, 아르사크는 머릿속을 부유하던 애매한 가능성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돌아볼 여유는 없지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등 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을 힐데트로스를 말이다. 아르사크의 피가 흩뿌려지기만을 기대하고 또 기대하면서 초조하게 이 시합을 지켜보고 있을 그녀의 성마른 얼굴을.
“너는 보는 눈이 없는 개로구나.”
아르사크의 말에, 쿠르두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하는 빛이 나타났다.
이렇게 빨리 알아차렸단 말인가? 자신이 후작가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조차 없는, 비천한 출신의 병사일 뿐인 자신이 볼핀 후작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가능성을 감히 떠올린 사람조차 여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정곡을 찔리니 뜨끔한 모양이군.”
“좋을 대로 생각해라. 어차피 추측일 뿐, 나의 진실은 어디로도 흘러갈 일 없을 테니.”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모래로 만들어버리면 흐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 믿는 건가?”
아르사크는 빙긋이 웃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는 그녀의 태도에 쿠르두조차도 내심 놀랐다.
“나는 짐승을 잘 다루지. 그게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도 말이야.”
이제 관중들의 눈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병사들 중에서도 많지 않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에리히의 명령을 받은 테오도르는 어느새 경기장 아래로 내려와 두 사람의 치열한 접전을 지켜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르사크의 실력이 남다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저 쿠르두라는 자도 결코 이름 모를 병사로만 머물 실력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이날만을 위해 혹독하게 단련시킨 살인마 같았다. 달려드는 햇빛마저도 사정없이 베어버리며 휘두르는 검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르사크의 죽음.
“느려!”
아르사크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양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한 손으로 바꿔 쥐면서 쿠르두의 힘을 발판 삼아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쿠르두는 아르사크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어깨를 비틀려 했으나, 아르사크가 비어 있던 다른 손으로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밀어냈다.
반격이 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쿠르두의 검이 한순간 휘청거리며 아르사크의 어깨 근처를 찔렀다. 그러나 검이 미처 다 들어가기도 전에 예감이 왔다. 찔러 넣은 자리는 비었다.
관중석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 뒤를 이어 잊고 있었다는 듯한 웅성거림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르사크의 검이 쿠르두의 등을 사선으로 길게 내리그었다. 거대한 몸집이 움찔거린 순간, 붉은 피가 한낮의 악몽처럼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쿠르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르사크는 검끝을 그의 목에 들이대며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너는…….”
모든 사람이 그녀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이곳이 어디인지, 이 상황이 어쩌다 일어났는지조차도 잊고 있었다. 쿠르두의 말은 한 가지는 옳았다. 이곳은 이미 전쟁터다.
“네 책임의 무게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쿠르두의 고개가 한순간 움직인 듯했다. 그는 아르사크를 돌아보려 했지만, 자유로이 운신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정신을 잃어버린 그를 허둥지둥 달려 나온 병사들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흥건하게 고인 피 웅덩이 위에 선 아르사크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관중석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힐데트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결코 네 손에는 죽지 않아.’
힐데트로스는 아르사크의 눈빛에서 그런 의도를 읽어냈다. 부채를 살짝 펼쳐 입가를 가린 그녀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차갑게 굳은 입매를 감추었다.
‘그래요, 마마.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면 너무 재미가 없지요. 당신은 지금부터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지키셔야 할 겁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군요.’
호흡을 정돈한 아르사크는 땅바닥에 검을 내던지고서야 찌푸리며 어깨를 쥐었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통증이 그녀를 날카롭게 찔러대기 시작했다.
쿠르두의 검이 어깨를 향해 들어왔을 때, 정통으로 맞는 것은 간신히 면했지만 검날의 폭 때문에 완전히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르사크의 손바닥 아래로 핏줄기가 흘러 떨어지자 누구보다 먼저 테오도르가 그녀를 향해 달려나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르사크의 시야도 가물가물하게 멀어졌다.
에리히가 벌떡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사람들 사이로 도망치듯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등, 저 움직임. 저 사람이 누굴까.
“치료사를 불러라, 지금 당장!”
에리히의 외침을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아르사크는 지친 사람처럼 정신을 잃었다.
124장 불청객 (5)
한낮의 소동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르사크가 쓰러진 후, 당연하게도 모든 경기는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불길한 예감을 안고 뿔뿔이 흩어져 떠나거나 궁 안에 마련된 거처에 소리 없이 틀어박혔다. 어떤 사람인가는 마차를 타고 서둘러 떠나기도 했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라는 치료사의 말도 에리히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해는 무력하게 기울고, 미처 치우지 못한 광장의 꽃종이와 사탕 껍질,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떨어져 돌 틈에 낀 금화의 반짝임이 스산한 어둠에 고요히 잠겼다.
아르사크가 잠든 사이, 에리히는 테오도르를 데리고 병사들이 머무는 부대로 갔다. 그러나 쿠르두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치료하는 곳에도 그의 모습은 없었다.
“어디로 갔느냐.”
남아 있던 병사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 대답을 미뤘다. 에리히의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미간을 좁히며 앞으로 나섰다.
“폐하께서 질문하고 계시는데 대답하지 않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저… 쿠르두는, 아까… 정신이 들자마자 공작 전하께서 직접 데려가셨습니다.”
에리히와 테오도르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작이라고?
“어디로 데려갔느냐?”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필요한 사람이 사라지고 없는 곳에서 화를 내고 있어 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에리히는 치미는 분노를 속으로 누르며 바깥으로 나갔다.
위든이 머무는 곳까지 한달음에 도착했을 때, 안쪽 건물에서 시종들 몇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흰 천에 덮인 무언가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았다.
“거기 서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시종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왠지 에리히가 나타나 기묘하게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에리히는 시종들이 짊어지고 가던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굳이 저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곁에 서 있던 테오도르 역시 놀라고 긴장한 표정을 한 채 천 위로 배어 나오는 붉은 핏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구의 시체냐.”
“저, 폐하, 마,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아, 아까 낮에…….”
“황후와 대결했던 그 병사냐?”
“그렇습니다.”
에리히의 호흡 소리는 이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테오도르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커져 있었다. 누가 이 자를 죽였는지는 뻔한 일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시종들을 내려다보며 다시 질문했다.
“누가 죽였느냐?”
“폐… 폐하, 실은, 공… 공작 전하께서.”
“이자를 여기로 데려오라고 한 사람도 숙부님이시냐?”
“그…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을 추궁해 봐야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테오도르를 시켜 쿠르두의 시체를 거두라는 명령을 내린 뒤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위든은 에리히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음이 분명한데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서는 아직도 핏줄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위든은 시종이 가져다준 천으로 검날의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어두운 녹색의 융단 위로 뚝, 떨어진 핏방울이 마치 진흙처럼 질척질척하게 엉긴다.
에리히는 어두운 표정으로 위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