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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58화 (158/191)

158화

123장 불청객 (4)

한순간 경기장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열을 이루고 선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한마디라도 잘못 내뱉었다가는 죽음이 확실한 저 쿠르두라는 인물보다도 자신의 목이 더 빨리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에리히가 당장 쿠르두를 끌어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리히는 의중을 알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 된다.”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쿠르두가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으로 에리히와 아르사크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공작께서도 말씀하셨듯, 이곳은 본래 제국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이처럼 여흥을 위한 경기를 진행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는 분명 생사를 걸고 엄숙한 결투를 벌이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장소에서 검을 뽑은 이상, 비록 재미 삼아 벌이는 대결이라 할지라도 배움의 기회로 삼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일개 병사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너에게 배움의 기회를 줄 인물이라면 많다. 감히 황후를 지목하여 검을 겨뤄보고 싶다는 말을 지껄이다니, 두 번 다시 오만불손한 소리를 함부로 내뱉지 못하도록 너를 이 자리에서 죽여 본보기로 삼을 수도 있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위든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받아주마.”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경기장 전체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사크에게로 쏠렸다. 에리히는 미간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서더니 아르사크의 손목을 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저는 싸움을 걸어온 자를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 폐하. 저 쿠르두라는 병사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와 겨뤄보고 싶다고 청하며 저를 지목하였는데, 제가 여기서 발을 빼고 피한다면 두 번 다시, 누구의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 없겠지요.”

에리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한 아르사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온갖 색깔의 시선을 하나하나 똑바로 마주 보려는 듯이 천천히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힐데트로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르사크는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싸워라. 그리고 여기서 죽어라.

‘네 생각대로는 안 돼.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아르사크가 생각했다. 두 진영의 병사들도 숨을 죽인 채 그녀가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 후, 손목을 붙들고 있던 에리히의 손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뿌리쳤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 더욱 큰 문제가 생길 거예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미간을 찌푸린 에리히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얕게 들썩이는 어깨를 위로하듯이 가볍게 만진 아르사크는 빙긋이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저는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으니까요.”

“난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허락할 수 없으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제가 당신의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아서 절 사랑하잖아요.”

순간 에리히의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정지했다. 찰나의 침묵이 지나가고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지만, 아르사크는 이미 에리히의 그런 반응마저도 빤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웃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무신경한 거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한때는 그랬던 적도 있지만, 흘러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무의미한 노력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입에서 직접 이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에리히는 갑갑한 마음에 그만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다. 어떤 함정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기사조차 아닌 일개 병사가, 감히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에서 그녀와 검을 겨뤄보고 싶다고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는 끝내 아르사크를 막을 수 없었다. 에리히의 머릿속에서도 아르사크가 떠올린 것과 똑같은 생각이 지나간 탓이었다.

만약 여기서 아르사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물러난다면, 지금껏 그녀가 두려워 함부로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했던 자들에게 쓸데없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꼴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런 위험에 노출시키느니 차라리 여기서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 그럴까?’

아르사크가 아래로 내려서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나 그녀가 갈 길을 열어주었다. 반짝이는 공작 비단의 오색 빛깔이, 매끈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튼튼하게 자란 나무줄기를 닮은 눈동자가 서서히 멀어진다.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사람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테오도르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자신을 부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기장 아래로 내려선 아르사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기사에게 명령해 싸울 수 있는 옷과 검을 준비하라 일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대열을 맞추고 서 있던 병사들이 각자의 진영이 대기하는 자리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르사크와 쿠르두만이 고대의 검투사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쿠르두의 체격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암울함이 깃든 표정은 혹독한 전쟁터에서 수십 년을 홀로 살아남은 자의 그것처럼, 삶의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아르사크는 문득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도맡아 하도록 만든 배후는 누구이며, 이자는 그에게 대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걸까?

“너를 이 자리에 서도록 만든 누군가는, 분명 안전한 자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웃고 있겠지.”

아르사크가 말했다.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여서, 그녀의 목소리는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쿠르두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어두운 눈이다.

“제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존귀하신 황후 마마.”

“아니,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너는 진실로써 이 일의 책임을 지게 될 테니까.”

“저의 책임이 진실이라면, 황후 마마의 책임은 무엇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여기가 전장이라면 나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너를 마주했겠지. 그러나 여기는 전장이 아니다. 이기든 지든, 내가 네게 무엇을 내놓아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쿠르두의 입가에 한순간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르사크는 그가 발검할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깨닫고 몸을 약간 낮추었다.

“마마께서 저의 도전을 받아들이신 순간, 이곳은 이미 전장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검이 밖으로 드러난 것과, 서로를 향해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르사크의 검이 쿠르두의 검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훌륭한 것이었으나, 쿠르두의 힘이 워낙 강해 맞부딪친 순간의 충격은 서로 비슷했다.

잔뜩 움츠린 채 고여 있던 공기를 두 자루의 검날이 갈라 찢는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경기장 전체를 에워쌌다.

“마마!”

지켜보던 루이제가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지만 아르사크에게는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카르반테는 떨고 있는 루이제의 어깨를 감싸 진정시키며 초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그는 체계적인 검술 훈련은 받지 못했지만, 한때 아버지였던 우드하우스 남작의 명령으로 그를 호위하기 위한 실력을 기르며 상당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인물이었다.

카르반테가 판단하기에, 이것은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보여주기식 놀이가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물론이거니와 쿠르두조차도,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전장이라고?”

아르사크가 외쳤다. 그 순간 검날이 거센 소리를 내며 두 번 부딪쳤다. 급소를 노리고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쿠르두의 검을 옆으로 흘린 아르사크는 오른쪽 어깨가 빈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리쳤다.

그러나 쿠르두의 움직임은 만만찮게 빨랐다. 인정사정없이 휘둘러오는 아르사크의 검을 아슬아슬한 차이로 피하면서 동시에 반격했다.

“전쟁이 무엇인지 구경이나 해보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못 보았을 것 같은가?”

쿠르두는 이제 아르사크에게 경어조차 쓰지 않았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허공에서 두 자루의 검날이 거세게 충돌했다.

아르사크는 그에게 힘으로 밀어붙일 여유를 주지 않고 날렵하게 땅을 디디며 몸을 허공으로 반 뼘가량 띄웠다. 검에 실린 힘을 반동 삼아 뛰어오른 아르사크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쿠르두의 목을 정확히 겨냥한 채 두 번 움직였다.

쿠르두는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에서 아르사크의 칼이 들어오는 각도를 잘못 계산하고 말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쿠르두는 등골이 섬찟하게 당기는 것을 느꼈다. 자란 후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죽음의 공포였다.

핏방울이 땅 위에 후드득 흩어졌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구경하던 사람들 몇몇이 그제야 놀라서 벌떡 일어섰지만 에리히는 여전히 침묵한 채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감히 나서서 경기를 중단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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