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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57화 (157/191)

157화

처음 이 자리에 섰을 때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던가. 자신이 여기서 황후로서 선택받을 때. 그때는 이토록 요란한 환호와 축하를 받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필요도 없었다.

에리히가 아르사크와 맞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환호는 더욱 커졌다. 그때 둥글게 굽어진 양쪽 회랑에서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음악이 광장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르사크는 바구니 안에 있던 금화를 한 줌씩 아래로 던졌고, 양쪽에 몇 명씩 서 있던 시녀들도 꽃가루와 사탕을 아래로 던졌다.

사람들은 머리 위로 팔을 뻗은 채 즐겁게 금화와 사탕을 받았다. 목마를 타고 있던 꼬마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을 재촉해 사탕이 떨어진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좀 더 멀리까지 던져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받지 못하는군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도 복을 못 받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요. 이렇게 하면 좀 멀리 날아가려나?”

손안에 금화를 한 움큼 쥔 아르사크는 갑자기 난간 너머로 팔매질을 하듯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밑에서는 황후의 호쾌한 금화 뿌리기에 박수를 치며 난리가 났고, 로즈안나는 웃음을 참느라 혀를 깍 깨물어야 했으며, 에리히는 손끝으로 이마를 짚으며 하필이면 왜 이런 상대에게 반하고 말았는가 진지하게 고찰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광장뿐만 아니라 황궁의 정원과 연회장에도 사람들은 가득 모여 있었다. 다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수도의 시민들이라면, 황궁 내부를 꽉 채운 사람들은 귀족들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그리고 오늘은 생일을 맞은 아르사크가 원하는 대로 황궁의 중앙 정원과 기마대의 훈련장, 그리고 마상 시합이나 투창, 판크라티온과 같이 황족과 귀족들을 위해 기사들이 대결하는 경기장까지도 시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당연히 발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파가 많이 밀려든 곳은 경기장이었다.

황후의 생일 연회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기사단의 대장들과 병사들이 한데 어울려 크게 흑백으로 진영을 나눈 뒤 여러 가지 종목을 겨루는 것이 오늘의 가장 큰 볼거리였다.

넓은 경기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좌석에 앉은 귀족들은 맨손 격투를 벌이는 병사들의 시합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는 중이었다.

에리히와 아르사크 역시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시합을 구경했다.

황후를 배려한 종목인지 말을 이용한 시합이 두세 가지 있었는데, 기마대의 정예 병사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을 달리며 과녁의 중앙에 활을 쏴 맞추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을 터뜨렸다.

“즐거운 구경이네요. 병사들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고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고는 미소를 띠며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꼬았다.

“재미있다니 다행이야.”

“저도 내려가서 말을 달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데,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걸 알면서 굳이 묻는 속내를 모르겠군.”

그때 흑팀의 병사가 마지막 화살을 정중앙에 맞혔다. 아르사크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는 말머리를 휙 돌리더니 아르사크 쪽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한 뒤 당당하게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종목은 뭐죠?”

“글쎄, 기다려 보자고.”

아르사크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떠오른 바로 그때, 위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주변이 조용해지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황후 마마의 경사로운 날에 이처럼 즐거운 구경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폐하.”

“저만의 기쁜 날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죠.”

“제국을 지키는 병사들이 이토록 실력이 출중함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비록 여흥을 위한 시합이나 제국의 백성으로서 마음이 놓입니다. 폐하와 마마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이번에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하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위든의 말에 에리히는 순간 미간을 좁혔지만 곧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그녀이니 의견을 존중하고자 한 것이다. 아르사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시합을 제시하실지 기대가 되네요.”

주변에 앉은 귀족들의 얼굴에도 흥미진진하다는 기색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었다. 에리히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기분을 느꼈지만 떨쳐버리려 애썼다.

위든의 말마따나 고작 여흥일 뿐인 이 시합, 그것도 병사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는 눈요기 정도에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이따금 불길한 예감은 무서울 정도로 잘 들어맞기도 한다.

“이 경기장은 원래 장군과 기사들의 검술 대련을 위해 지어진 곳입니다. 서로 실력을 겨루며 보다 완벽한 전사로 거듭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감히 제안하건대, 검술 시합을 열어 최종적으로 승리한 자에게는 오늘의 주인공이신 마마께서 에레벤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 어떠하실지요.”

검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에리히는 반대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아르사크의 대답이 더 빨라 말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좋습니다, 재미있겠군요.”

“그리 말씀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리히는 위든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 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럴 수밖에. 옛날부터 숙부는 그런 분이셨으니까…….

그때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손등을 살짝 붙잡았다.

“허락하시지요, 폐하.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니, 이참에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검술을 보다 갈고닦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눈을 깜박이던 에리히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주변의 분위기로 봐서는 이미 내려진 결정이다. 뭐라 해도 황제인 자신이 밀어붙이면 무산되고 말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검술 시합쯤 벌이는 것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길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사태를 지레 겁내는 황제가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습니다, 숙부님.”

에리히의 허락이 떨어지자, 위든은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경기장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각 진영의 병사들은 줄을 맞추어 나열한 채 위에서의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그대들의 훌륭한 모습은 지고하신 폐하와 고귀하신 황후 마마를 비롯하여 이 자리의 모두가 보고 들었노라!”

병사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에리히는 갑자기 연설가로 돌변한 듯한 위든의 뒷모습과, 그의 외침에 응답해 환호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오싹함을 느꼈다.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는 그대들의 강건함과 용맹함을 오랫동안 기억하실 것이다! 자, 그대들 중 가장 뛰어난 자는 누구인가? 이곳은 본디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검사를 가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 실력과 충성을 증명하려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검을 세우고 앞으로 나오라!”

위든의 목소리는 경기장 반대편까지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힘차게 울렸다. 병사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제 기대와 더불어 이상한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단지 축제의 흥을 북돋우기 위한 시합장에서,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그의 저력에 아르사크조차도 놀랐을 정도다.

그때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른 누군가가 양쪽 진영의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용감한 전사의 등장에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냉정히 가라앉은 그의 움직임을 본 에리히는 표현하기 힘든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일반 병사인 듯, 기사에게 허락된 작은 휘장이나 표식은 달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부진 몸집과 큰 체구, 도저히 만만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한 기백만으로도 구경하던 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앞으로 나선 병사는 황제와 황후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상체를 약간 숙였다.

위든이 말했다.

“좋다, 용기 있는 병사여.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그대의 이름을 고하라!”

“존귀하신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마마의 안전에서 감히 고합니다. 저의 이름은 쿠르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위든처럼 커다랗게 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꽤 멀리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말을 뚜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무거운 연기가 바닥을 타고 번지듯, 그의 이름을 듣고,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며 긴장을 감추려 애썼다.

“그대의 기백에 폐하께서도 만족하시리라. 이제 그대가 실력을 겨룰 자를 호명하라. 증명을 위하여 스스로 나선 전사에게는 싸울 자를 고를 권리가 있지.”

그것은 전쟁터에서나 통할 법한 논리였으나 제국은 전쟁을 잊은 지 오래된 국가였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위든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쿠르두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들었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면서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쿠르두가 말했다.

“이곳은 공작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을 위해 수없이 싸운 선조들께서 진정한 실력을 판가름하기 위한 장소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감히 청하옵건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과 겨뤄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소서.”

그는 위든을 보며 말하고 있었지만,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그가 누구를 지목하려 하는지 깨달았다.

테오도르일 것이다. 그는 테오도르를 지목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을 말을 써 가며 포석을 깔고 있는 것이리라. 황제의 최측근 호위기사와 공개적으로 실력을 겨룰 일 같은 건, 일반 병사에게 죽었다 깨나도 겪어보기 힘들 기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에리히가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를 슬쩍 돌아보자 그도 자신을 지목할 것을 예상한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리히는 허락을 기다리는 위든과 병사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짐짓 시큰둥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제아무리 날고기는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테오도르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참에 한 수 가르쳐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에리히의 허락이 떨어지자, 쿠르두는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귀를 의심할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황후 마마, 저는 황후 마마와 검을 겨뤄보고 싶습니다. 원컨대 무명 병사의 작은 소원을 너그러이 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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