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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56화 (156/191)

156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온갖 본능을 누르고 냉정하고 얌전한 연기를 잘 해냈다. 그리고 위기에 몰렸을 때, 그러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한 덕분에 위든의 눈에 들어 양녀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볼핀 후작의 딸로서는 수도로 출입조차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몰락한 후작의 딸에게 그럴싸한 혼담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복수할 길도, 하다못해 다시 일어설 길도 막혀버린 힐데트로스가 위든이 내민 손을 붙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록 양녀가 되는 그 조건에 로크로몬서의 고르쿰 왕과 결혼해야만 한다는 것이 들어 있었지만 힐데트로스는 그것조차 받아들였다. 어차피 황후가 되기만을 위해 규격에 맞추어 길러진 자신, 그 목표를 잃어버렸다면 다른 상대가 누가 되든 관계는 없다.

아니다,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골라야만 한다면 자신에게 최대한 도움이 될 사람, 그 도움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 잡힌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손에서 미끄러졌던 목표를 다시 쥐여줄 사람. 힐데트로스는 그런 사람을 원했고, 위든과 고르쿰은 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인 자들이었다.

“전하께서 이 제국을 손에 쥐게 되신다면, 저는 반드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든의 어깨가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힐데트로스의 말에 놀랐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팔걸이를 쥔 손끝이 힘 있게 경련하는가 싶더니,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낮게 껄껄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시 고개를 든 위든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의 목을 노리는 들개처럼 번득거리고 있었다.

“아비가 딸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염려 놓아라.”

“네,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저를 살펴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저를 양녀로서 보듬어주실 수 없다면, 저 역시 전하를 아버지로서 섬길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느냐?”

그 순간, 촛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가 슬그머니 튀어나오는 것이 힐데트로스의 눈에도 보였다.

어둠 속에 완벽히 파묻힐 수 있도록 새카만 로브를 입고 있는 그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지만, 허리 안쪽으로 돌아간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위든의 표정에는 이제 꾸며낸 온화함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힐데트로스는 떨지 않았다. 단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깊숙이 숙이며 위든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저의 치기 어린 발언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다면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입니다.”

“됐다, 일어나라.”

위든이 손짓하자, 힐데트로스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시선을 내리깐 채 담담히 섰다. 위든이 말했다.

“내가 너를 양녀로 삼은 것은 너의 그 두려움을 모르는 성미 때문이다. 너는 원하는 것을 네 손에 쥐기 전까지 포기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지. 그런 것을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인간들은 손이 닿지 않는다 싶으면 지레 포기하는 것이 본능임에도 너는 그러지 않아. 그렇기에 너를 나의 양녀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런 인간이라야만 이 광대한 나라의 안주인으로서 걸맞지.”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안심해라. 내가 너를 보듬지 않을 리 있겠느냐? 너와 고르쿰의 왕이 내 뜻에 따라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나 다음으로 제국을 다스릴 자는 다름 아닌 너희들이 될 것이다.”

힐데트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시종일관 차갑던 성마른 얼굴에 매우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찰나였다.

“저 혼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위든은 한쪽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듯 가리며 다시 작은 소리로 웃었다. 마치 유쾌한 광대놀음이라도 본 양, 가소롭고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는 소리로.

“좋아.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첫 번째로 원하는 것은 복수입니다, 전하. 저를 농락하고, 밀어 떨어트린 자의 피를 뿌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매우 분명한 어조였다. 그것은 위든과 힐데트로스가 서로의 이해를 논할 때 가장 먼저 합의한 부분이기도 했으므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좋겠지. 준비는 철저히 하였느냐?”

“예. 아버님이 수도에 계시던 시절부터 은밀히 볼핀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자가 있습니다. 실력은 이미 검증된 바 있으니, 전하께서 내일 그가 나올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상대를 얕봐서는 안 된다. 또한, 허점이 있어도 안 된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황제만큼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라. 만약 첫 번째에 실패한다면, 두 번째는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 내 말을 이해하고 있겠지?”

힐데트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다. 실패는 있을 수 없었다. 더불어 들킬 염려도 없었다. 실패하는 그 순간, 일을 맡은 자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말이다.

위든이 손짓을 하자 힐데트로스는 소리 없이 인사를 남긴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힐데트로스가 나간 뒤 문이 닫히자, 어지러이 뒤엉킨 벽의 무늬 때문에 그곳에 다른 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고요해졌다. 위든은 구석에 서 있던 로브를 쓴 자를 불러 포도주를 가져오게 했다. 둥그스름한 잔 안에 반쯤 채워진 술은 음험한 자줏빛을 띤 채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의 조카님께서 무척 슬퍼하시겠군. 이제야 겨우 부부다운 부부가 된 것 같던데 말이야.”

씁쓸한 맛이 감도는 포도주를 들이켜며, 그는 조용히 웃었다.

122장 불청객 (3)

“이런 건 왜 해야 하는 거야?”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건만 아르사크의 표정은 영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이미 익숙하고 예상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구겨지기 쉬운 부분을 길게 늘어뜨려 펼치면서 대답했다.

“제국의 전통입니다. 아르사크 님께서는 황후이시니 전통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셔야지요.”

“저번에 그 노을이 뭐가 어떻고 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제국 사람들은 참 실없는 짓을 많이도 한다니까.”

아르사크가 불만스레 말했지만 로즈안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미소를 띠며 그녀의 한쪽 손에 바구니 하나를 들려주었다. 커다란 수박 한 덩이 정도가 들어갈 법한 크기의 바구니 안에는 갓 닦아놓은 것처럼 샛노랗게 반짝거리는 금화가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걸 저기서 뿌리면 된단 말이지?”

“네. 폐하와 함께 테라스로 나가신 다음, 양쪽의 회랑에서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때 뿌리시면 됩니다.”

“밑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어. 이걸 줍느라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황족의 탄신일에 뿌리는 금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자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겨서, 모두들 그리 많이 주우려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신기한 이야기다. 아르사크는 제법 묵직한 바구니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테라스 밖의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일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아본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금화와 값진 사탕을 뿌리며 생일을 축하받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와 황후 이외에는 없었다.

“준비는 다 되었나?”

뒤쪽의 커다란 휘장을 걷으며 나온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모습을 보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르사크가 오늘을 위해 입은 드레스는 수도에서도 실력이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최고의 장인이 수십 일이나 매달려 만들어낸, 단 한 벌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날아가 버릴 듯한 공작 비단을 새의 깃털처럼 여러 번 겹치고 또 겹쳐 풍성하게 부풀린 치맛단을 만들었고, 날씬하게 빼낸 허리선 위로는 오팔과 다이아몬드를 바수어 마치 햇빛을 한껏 받은 호수의 반짝임을 슬그머니 떼어다 붙여놓은 것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손만 대도 미끄러질 것처럼 광택이 도는 천 위에 어떻게 그 조그만 조각들을 엮어 놓았는지, 그 비밀에 대해서는 옷을 지은 장인과 에레벤나 신만이 알 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눈을 떼시지 못하시네요, 폐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에리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눈을 한번 깜빡였다.

본바탕은 흰색이겠지만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도저히 한 가지 색깔로는 보이지 않는 드레스, 그것을 날개 삼아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은 아르사크의 모습은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황홀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태도로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그럭저럭 태가 날 정도로는 꾸며놓았다 싶어서 보았을 뿐이야. 자기 입으로 그렇게 아름답느냐니, 자화자찬이 심해도 정도가 있지 않나? 황후의 미덕은 겸손함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뺨을 쓰다듬는 손끝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아르사크는 생기 있게 빛나는 입술을 자신만만한 태도로 끌어 올리며 에리히의 턱선 위로 그림을 그리듯 손끝을 미끄러트렸다.

“정말이지 어느 입이 이렇게 미운 소리만 골라서 할까? 확 쥐어박으면 정신을 좀 차릴까요?”

“궁금하면 직접 해보든가.”

그러면서 에리히는 재빨리 몸을 기울여 아르사크의 입술 옆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시치미를 떼며 앞을 바라보았다.

“속내가 엉큼하시네요.”

“안 그랬으면 서운했을 거면서 거짓말하지 마.”

“내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좀 편해져요?”

“보시다시피 엉큼해서.”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모습이 드디어 테라스의 난간 너머로 드러나자,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입 옆에 손나팔을 만들어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마마!’하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르사크는 왜인지 꿈을 꾸는 것처럼 그 소란한 외침을 하나씩 귀에 새기듯 또렷이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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