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아르사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 힐데트로스는 부채 끝으로 입가를 가린 채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남작이 되어도 변함이 없군요……. 하긴, 저토록 철이 없으니 지금까지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는지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철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면죄부가 될 수 없지. 루이제는 천성은 나쁘지 않아.”
“그렇다면 저는 천성이 선량하지 못하여 마마의 곁에 머물지 못했다는 말씀이실까요?”
힐데트로스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힐데트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긴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이 어때? 피차 딱딱한 예의를 갖춰가며 속내를 살필 만큼 서먹한 관계는 아니잖아.”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이상한 생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의 전사처럼, 흥분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마께서도 루이제처럼 변함이 없으시기는 마찬가지군요.”
힐데트로스는 가벼운 숨소리를 섞어 짧게 웃었다.
“나도, 루이제도, 서로 조금씩은 변했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지. 그렇다면 너는 어떨까? 뭔가 변했나?”
아르사크는 힐데트로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볼핀 후작의 딸이었던 때에는 오만하기는 하나 체득된 고상함이 엿보이던 모습이었으나 지금의 힐데트로스는 그때와 달랐다.
그때의 힐데트로스가 남들에게 다 보일 만큼 빳빳이 가시를 세운 장미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가시라고는 없이 다만 화려하기만 한 꽃잎 속에 맹독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건드렸다가는 손쓸 도리도 없이 독에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저 역시 변했습니다. 모두 마마의 덕분이지요. 마마께서 순순히 제 손에 죽어주시지 않으신 이후로, 제 삶은 많은 부분이 변했답니다.”
“글쎄, 그게 과연 내 덕분일까? 난 네가 친 덫을 살짝 피했을 뿐인데.”
“피하시기만 했더라면 이렇게 마주 보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마께서는 덫을 피하시기만 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수셨고, 덫을 매단 줄을 누가 잡고 있는지까지도 알아버리셨지요.”
“들으면 들을수록 내 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만?”
힐데트로스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물론… 마마의 능력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덫을 놓는 저의 솜씨가 미욱했을 뿐이죠. 짐승이 덫을 알아차렸다고 하여 짐승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마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도발적인 태도를 숨기지도 않건만 아르사크는 쉽사리 분개하지 않았다. 다만 맹수처럼 눈을 빛내며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힐데트로스는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때와 달리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덫을 놓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모처럼 잘 생각했군. 능력이 부족하다면 사냥은 포기하고 풀뿌리나 캐는 것이 적당하지.”
“아뇨. 마마께서는 그리 바라셨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사냥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랍니다. 덫을 놓는 대신, 이제는 스스로 사냥감의 목을 긋는 방법을 택했지요.”
천천히, 힐데트로스가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왔다. 아르사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서 힐데트로스의 움직임을 한 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작 한두 걸음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을 때, 아르사크와 힐데트로스의 코끝에는 서로에게서 풍기는 완전히 다른 향기가 번졌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각별히 주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가 누구를 먼저 사냥할지는, 전적으로 사냥꾼인 제 뜻에 달려 있으니까요.”
“상대하지 못할 사냥감은 애초에 건드리지도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야. 그런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한 가지뿐이지.”
“과연 그럴까요? 훌륭한 사냥꾼은 한 번의 실패에서 수많은 것들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힐데트로스는 다시 그림 같은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나붓이 절을 한 뒤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르사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그녀가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누구를 먼저 사냥할지는 자신의 뜻에 달려있다고?’
힐데트로스가 노릴 만한 사냥감. 그것이 자신 이외에 또 누가 될 수 있을까. 아르사크는 한 가지의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찌푸린 눈을 감았다.
121장 불청객 (2)
고요한 밤이다. 만찬의 열기가 모두 가시고, 연회장의 불도 꺼진 지금 황궁의 회랑은 아까까지의 활기가 꿈이었던가 싶도록 조용했다.
힐데트로스는 그렇게 텅 빈 회랑을 다 꺼져가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길이라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망설이거나 걸음을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중앙 귀족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볼핀 후작의 총애받는 차녀였던 때 이 회랑을 따라 걷던 기분과, 환영받지 못하는 나라의 왕비가 되어 남들의 눈을 피해 걷고 있는 기분이 같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힐데트로스는 그런 굴욕감마저도 수면 아래로 감추어버린 듯,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새하얀 얼굴 위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전하께 내가 왔음을 고해라.”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 힐데트로스는 어둠 속의 한 점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어두운 그늘이 묵직한 커튼처럼 천천히 흔들렸다. 이윽고 잘 보이지도 않던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벌어지며 혓바닥처럼 일렁거리는 불빛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힐데트로스는 미끄러지듯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그곳에는 다시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을 어두운 그늘만이 남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다시 또 복도가 나타났다. 벽 곳곳에 초가 밝혀진 램프가 걸려 있기는 했지만, 유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닦지 않았는지 기름과 그을음이 엉겨 붙어 대부분의 빛을 다 흡수해 버리고 있었다.
포석의 틈새에서 스며 올라오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냉기는 마치 죽은 사람의 손끝이 발목에 닿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힐데트로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힐데트로스도 몸을 구부정하게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오래된 서재처럼 꾸며진 방 안에는 청동 장식을 붙인 고풍스러운 모양의 서랍장과 빈 장식장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가 더 있었다. 문을 등진 채 놓인 의자. 그리고 거기에 앉아 있는 한 사람.
“카툴라 제국의 공작, 디몰트의 대영주, 저의 주인이자 아버지이신 전하께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리나이다.”
의자를 바라보고 선 힐데트로스가 조용하게 속삭이며 몸을 낮추자, 앉아 있던 이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든이었다.
“일어나라.”
위든이 말하자, 힐데트로스는 절을 할 때처럼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급히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전하께서 살펴주신 덕택에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나이다.”
“그런 딱딱한 말투는 그만두어라. 나는 너의 양부인데, 아버지 앞에서까지 그렇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겠지.”
일견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힐데트로스는 그 이면에 숨겨진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힐데트로스가 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촛대의 촛불이 가물가물 흔들렸다. 빛이 닿지 않은 자리의 검은 그림자가 위든의 얼굴 위에서 유령처럼 춤을 춘다.
“로크로몬서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그곳의 석조 궁전이 매우 웅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지만,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군.”
힐데트로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로크로몬서의 석조 궁전은 위든의 말대로 인근 국가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는 했다. 다만, 그곳에 직접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궁전의 모든 부분을 다 알 수 없었다.
로크로몬서의 석조 궁전은 궁전으로서의 기능보다는 거대한 요새로서의 기능에 더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장식이라고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첨탑 지붕, 그리고 아래를 음산하게 굽어보는 지붕마루의 조각상들이 거의 전부였다. 뱀의 머리를 닮은 그 조각상들은 궁전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지붕마루에 빼곡히 올라앉은 채 드나드는 사람의 정수리를 언제나 굽어보았다.
그러나 힐데트로스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바로 궁전의 안쪽이었다. 왕의 침전을 중심으로 가로 양옆으로 뻗은 복도 역시 거무죽죽한 돌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에는 전쟁과 불, 비통한 절규가 뒤섞인 무늬가 짜여 있었다.
그곳을 따라 걷고 있노라면 힐데트로스 자신 역시 왕비가 아닌, 마치 이 성에 포로로 끌려온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언젠가 전하께서 방문해 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께서도 석조 궁전에서 전하를 만나 뵙게 되는 날 크게 기뻐하시겠지요.”
“네가 잘 적응한 듯해 다행스럽구나. 애지중지하던 딸을 타국으로 보내며 후작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지.”
“아버님께서는 제가 죽음 속에서 안식을 얻느니, 고통과 두려움뿐이더라도 살아있는 것을 더욱 바라셨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물론이다. 관 속에 누워 숨만 붙어있다고 한들 그것을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 남의 발밑에 엎드린 채 바닥을 긁게 되더라도, 언젠가 그를 넘어뜨리겠다는 결심만 남아있다면 네가 살아날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힐데트로스는 무표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위든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불같은 흥분이 요동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