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120장 불청객 (1)
충격에 빠진 침묵과 소곤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놀라 일어서기도 전에, 에리히의 차가운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멈춰라.”
사람들은 돌아서려다 말고 멈칫하며 저마다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힐데트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당당한 미소를 띠며 치맛자락을 펼쳐 정중히 절을 했다.
“로크로몬서의 왕, 고르쿰 팜필리아 에브뢰 전하를 대신하여 카툴라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예를 갖추나니 모쪼록 읍진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법에 있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태도. 깔끔한 선으로 그린 것 같은 힐데트로스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눈치를 살피며 저마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에리히는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힐데트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그대에게 이곳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였는가? 나는 그대의 가문에 내린 추방령을 거둔 적이 없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볼핀 후작의 세력을 따르던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사실 힐데트로스의 등장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또한 수도 귀족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볼핀 후작에 대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황후 간택과 관련한 예식에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가, 끝내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머나먼 땅으로 추방된 사실은 제국 전체에 본보기처럼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때 에리히는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인 볼핀 후작뿐만 아니라, 그 가문에 속한 모든 직계 자손들과 친척들까지도 5년 동안 수도에 출입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의 딸이자 당시의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힐데트로스가 난데없이 황후의 생일에 맞춰 얼굴을 내밀다니? 어떤 사람들은 힐데트로스가 그만 정신이 나가버린 것은 아니냐고도 말했다.
그러나 물론, 힐데트로스는 제정신이었다. 스스로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좀 더 빨리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은 시종이 힐데트로스를 뭐라고 불렀는지 다시 떠올려보았다. 로크로몬서의 왕비?
“폐하께서 격노하시리라는 것은 저 역시 우려했던 바입니다. 한때 황실의 방계 일원이셨으나, 이제는 제국의 죄인일 뿐인 볼핀 후작께서 저의 친부이시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폐하께서 추방령을 내리시고 수도로의 출입을 금지하신 것은 후작가의 자손들이지요. 저는 후작께서 추방되신 후, 인자하신 분의 양녀가 되어 볼핀 가문의 성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의 부군인 고르쿰 팜필리아 에브뢰 전하를 따라 로크로몬서 왕실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볼핀 후작가와 저 사이에 이제 더는 아무런 연관이 없사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준철히 판단하여 주시옵소서.”
힐데트로스의 말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르사크와 에리히마저도 놀람을 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떤 목적이 있다 해도 감히 타국의 왕비를 사칭할 수는 없으니 아마도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제국과 인접한 왕국들 중 로크로몬서 왕국은 규모도 작고 인구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와 인접하여 예로부터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였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호전적인 성향과 군사력이 막강하게 발달한 나라였다.
로크로몬서의 왕인 고르쿰은 해상 전투에서는 따라갈 자가 없다고 일컬어지는 전사로, 왕실 직속의 정예 부대를 거느리며 주변 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에리히는 잠시 갈등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힐데트로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타국의 왕족을 쫓아내는 것은 곧 선전포고와도 같은 일이다.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그녀가 이제 고르쿰의 왕비인 이상 이쪽에서도 그만한 대접을 갖추어 예우해야만 한다.
힐데트로스는 고작 일 년 사이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비교적 수수하고 고루해 보이던 이전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피어나기 직전의 장미처럼 교묘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황후 마마,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힐데트로스는 아르사크의 앞까지 나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아르사크는 입꼬리만 살짝 움직여 지어낸 듯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대가 나를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주었다니 기쁘오.”
“마마께서 친히 로크로몬서로 방찰을 보내셨사오니 마땅히 예를 갖추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고르쿰 전하께서도 마마께 직접 인사를 드리고 황실의 안부를 여쭙고자 하셨으나, 때마침 분주다사하시어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아르사크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힐데트로스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힐데트로스는 에리히 쪽을 향해서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후 사람들 사이로 물러났다.
누구도 힐데트로스에게 섣불리 말을 걸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런 외면조차도 개의치 않는 듯이 여전히 도도했다.
“초대장이라니… 로크로몬서로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미간을 좁힌 채 힐데트로스를 지켜보던 에리히가 작게 말했다.
북서쪽의 변경이기는 하지만, 로크로몬서의 국경은 제국과 맞닿아 있었고, 예전부터 몇 번씩 작은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었다. 선황들이 로크로몬서의 도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은 그곳이 제국에 비해 너무나 소국이었던 탓이다.
로크로몬서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소요를 오래 끈 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제국과의 관계가 그리 원활하지만은 않아서, 이번에도 당연히 로크로몬서로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외국의 왕족들에게 보내는 초대장만큼은 에리히가 직접 점검을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혹시 누군가 로크로몬서로 보내는 초대장이 빠졌음을 안 것은 아닐까요?”
아르사크가 물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곧장 고개를 저어 가능성을 일축했다.
“황궁에서 여는 공식적인 연회의 초청장에는 황실의 문양이 찍힌 인장이 필요해. 아무나 제멋대로 휘갈겨 쓴 것을 공식 문서랍시고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면 누군가 황실의 인장을 빼돌렸다는 말이로군요.”
“그 인장은 내가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잠겨 있고, 내가 아니면 누구도 열 수 없지. 인장을 빼돌렸다는 것보다는 위조했다는 쪽이 차라리 현실성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노릇인데요.”
“들켜서 목이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겠지. 아니면 결코 들키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든지. 어느 쪽이든 찾아내고 말 테지만.”
에리히의 푸른 눈동자가 홀 안을 느리게 훑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벌인 짓이든 이것은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니다. 누가 굳이 그녀를 양녀로 삼고자 했을까?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동정심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또한 힐데트로스가 스스로 그 이유를 밝힐 리도 만무한 일이다. 에리히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만찬이 끝난 후에도 연회장은 분위기는 떠들썩했다. 달콤하고 화려한 디저트와 술이 끝없이 차려졌고, 음악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르사크는 자리를 벗어났다. 계속 웅성거리는 소음을 듣고 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마마!”
아르사크가 테라스로 나옴과 동시에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좀 쉬려고 했더니만 한시도 도와주질 않는다. 아르사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제, 남편은 어디 내버리고 혼자서 촐랑거리고 다니는 거야?”
“참, 마마도. 지금 카른을 걱정하실 때예요? 마마, 제가 말씀드렸지요? 제 말이 맞지요?”
“뭐가 네 말이 맞냐는 거야?”
“힐데트로스 말이에요! 로크로몬서의 왕비가 되었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폐하께서 로크로몬서에 초대장을 보내셨나요? 제국과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는데…….”
정말 별걸 다 안다니까. 아르사크는 우아한 몸짓으로 소매를 살짝 걷었다. 뭘 하려나 싶어 루이제의 눈이 동그래진 순간, 손끝이 루이제의 이마를 톡, 때렸다.
“아야!”
“엄살은.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가서 남편이랑 손잡고 춤이나 추렴.”
“아휴, 마마! 걱정도 안 되세요?”
“걱정은 무슨 걱정? 생일 축하하러 왔다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게 진심일 리 없잖아요!”
“뭐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가요, 루이제 양?”
별안간 들린 목소리는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섬뜩할 정도로 단조롭고 반듯했다. 발까지 굴러가며 답답해하던 루이제뿐만 아니라 아르사크조차도 잠시 흠칫했을 정도다.
힐데트로스는 귀부인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미소를 띤 채, 흥미롭다는 눈으로 아르사크와 루이제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시간을 제가 방해하였나요? 두 분께서 이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실 줄이야.”
루이제는 조그만 입술을 움츠린 채 안절부절못하며 아르사크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황후인 그녀는 몰라도, 제국의 귀족일 뿐인 자신은 힐데트로스보다 지위가 낮아도 한참 낮아 옛날처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루이제 앞으로 살짝 나서며 힐데트로스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이 늘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지.”
“네, 물론 그렇지요. 제가 여태껏 살아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요? 아, 루이제 양께서도 물론.”
루이제는 눈에 띄게 긴장하면서도 아르사크가 옆에 있어서인지 기죽지 않고 샐쭉하게 말을 받았다.
“로크로몬서의 왕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제가 죽어있길 바라기라도 하셨나요?”
예의라고는 없는 뾰로통한 대꾸였으나 힐데트로스는 가벼운 웃음만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제가 루이제 양의 죽음 같은 것을 바라서 무엇에 쓰겠어요? 단지… 루이제 양이 이제는 작위를 받아 어엿한 가주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을 뿐이랍니다. 들리는 말로는 남편을 맞으셨다고도 하고……. 언제까지나 철부지이실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제국의 황후 마마와도 절친한 관계이신 것 같고 말이에요. 이전의 루이제 양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감탄할 만한 일이 아닐까요?”
철부지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볼만 실룩일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르사크는 루이제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남편과 춤을 추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루이제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보란 듯이 아르사크에게만 절을 하고 총총히 테라스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