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맙소사, 앞으로 한 번만 더 생일을 치렀다가는 아마 그날 내 장례도 같이 치러야 할 거야.”
아르사크는 지금껏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상대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지방의 귀족들이기 때문에 수도의 귀족들만큼 아르사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난데없이 못 해 먹겠다며 드러누워 괜한 소문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티리야는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르사크는 새로운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들어올 때마다 무심코 티리야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마음을 바꿔 찾아온다 한들, 귀족들 틈에 끼어 나타날 리 없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나타났다 하더라도, 화려한 차림을 한 채 고상하게 앉아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인사말을 반복하고 있는 아르사크를 보았더라면 그대로 걸음을 돌려 떠나버리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에셴의 생각은 아르사크와 조금 달랐다.
“책임감이지요, 마마.”
아르사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에셴을 올려다보았다. 에셴은 주둥이가 긴 잔에 든 가벼운 음료를 아르사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마마께서 황후의 자리를 탐탁잖게 여기신다는 사실은 저도 대강이나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실 수 있지요. 어쨌든 폐하께서 마마를 후녀로 모셔올 때, 무척 신사적이지 못한 방법을 택하셨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신사적이지 못한 방법이라. 아르사크는 킥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에셴은 평소 귀족들과는 달리 직설적인 말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이럴 때는 누구보다도 더 귀족적인 방식으로 말을 했다. 결코 핵심을 찌르지 않는 ‘에둘러 말하기’다.
에셴은 아르사크의 손에서 빈 잔을 받아 시녀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실, 누구도 마마께 황후다운 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임은 분명하지요. 다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폐하께서도 차마 그러실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죠. 마마께서는 원래 책임감이 강한 분이죠. 때문에 불합리에 분노하시면서도, 역경을 겪으시면서도, 마마를 따르고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책임감을 가지시게 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부족을 저버리시거나, 변하신 것이 아니라.”
아르사크는 에셴의 말에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에셴의 말이 맞을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편하게 자고, 온갖 희귀한 것들을 먹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생활에 젖어 만족해 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적어도 티리야는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르사크를 멀게 느끼는 건 아닐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소용돌이치듯 몰려왔다. 누군가 자신에게 제국과 부족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망설일 것도 없이 부족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후로 남는 것에 아무런 미련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므로.
아르사크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머리 위에서 가볍게 짝, 하는 소리가 났다. 에셴은 손뼉을 친 자세 그대로 양손을 모은 채 미소를 띠고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자, 마마. 이제 일어나십시오. 만찬을 위해 준비하실 것이 많으니까요.”
생일 전야 만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끝도 없이 긴 테이블 위에는 꽤 행세하는 귀족들조차도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 놓여 있었다.
“어머나, 이게 뭘까요?”
“저도 처음 보는 것이군요. 오! 이걸 보세요. 움직이는데요?”
“신기해라. 회전판인가요? 이런 것이 어째서 식탁에?”
궁금증은 요리가 든 접시가 나오고서야 풀렸다. 줄잡아 수십 명은 될 법한 시종들은 저마다 뚜껑을 덮은 접시를 가지고 들어와 문제의 회전판에 차례로 올려놓은 다음, 마치 공연을 선보이기라도 하듯 매끄러운 동작으로 판을 돌려가며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회전판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돌려가며 원하는 음식을 조금씩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대체 이런 생각은 누가 해냈지요? 저택에 돌아가거든 당장 만들어보고 싶군요.”
“황후 마마의 생일 전야 만찬을 위해서 폐하께서 특별히 만드셨다지 뭐예요?”
테이블 위에 수없이 많은 요리를 늘어놓고 식사를 하는 것은 평소와 별다를 바 없었지만, 회전판이라는 새로운 요소만으로도 타성에 젖어 지루하던 귀족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기엔 충분했다.
음악과 불빛 아래에서 그들은 감탄과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만찬을 즐겼다. 심지어 이것이 본 연회의 만찬이 아니라 전야 만찬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더욱 흥분한 것 같았다. 전야 만찬에 이 정도의 볼거리라면, 내일은 또 얼마나 신기한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체 이 요리의 반이라도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연회의 주인공인 아르사크의 감상은 역시 감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회전판을 떠올린 발상만큼은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보자 손을 대기도 전에 질린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다 못 먹는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아르사크는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낭비가 심하다는 거지요.”
“그대의 기준에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봐. 오늘 이 연회에 쓰인 뇌조나 공작새가 각각 쉰 마리씩이라고 가정하지. 뇌조도 그렇지만 공작새 같은 것은 민간에서는 좀처럼 사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단가가 비싸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싼값에 넘기면 사냥꾼들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야.”
아르사크는 눈을 깜빡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에리히는 살구 소스를 끼얹은 메추라기찜을 흘끔 내려다보고는 뒤이어 말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그것도 이 정도 규모의 연회가 열린다면 부르는 게 값이지. 평소 사들이는 가격의 두 배, 세 배를 더 주게 되더라도, 주방에서는 어떻게든 사들이게 돼 있어. 수를 맞춰야만 할 테니까. 그러면 그 돈은 푸주의 주인에게도 돌아가고, 사냥꾼에게도 돌아가게 돼.”
“…그러니까 낭비를 해도 괜찮다는 건가요?”
“항상 그런다면 문제가 되지. 어쨌든 황실의 돈은 대체로 백성들의 세금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지나친 사치는 곤란해.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돈을 써야만 사냥꾼이 공작을 잡을 덫 재료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지. 더 비싼 생선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말투 때문에 도리어 궤변처럼 느껴지는 말이지만 어쨌든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르사크는 채소를 익혀 찬 푸딩으로 만든 것을 조금씩 떠먹으면서 연회장에 가득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도 아직 전부 다 온 것이 아니라니. 내일 본격적으로 생일 연회가 시작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넓은 공간에 모일 것이다.
하루 종일 춤을 추고, 선물이 들어오고, 또 수도 없이 많은 인사를 받아야 하겠지. 아르사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깜빡였다.
전야 만찬이 시작된 지금도 조금 늦은 사람들이 서둘러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구에서는 방문객의 신분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왔다.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 동시에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접시를 가지고 다니며 먹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만찬이라 가능한 일이다.
아르사크는 또 이름 모를 백작 부처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오늘, 아니, 내일을 위해 전국 각지에 있는 귀족가와 외국의 왕가에까지 뿌려진 초대장의 수는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모두가 다 호의를 갖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불손한 호기심으로, 또 누군가는 노려봄 직한 과녁으로……. 생각만 해도 피로한 일이다.
“왜 그래? 몸이 좋지 않은가?”
아르사크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알아차린 에리히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아르사크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어지럽군요.”
“조금만 참아. 적당히 식사를 마칠 때쯤 빠져나가도 괜찮으니. 내일은 그러기도 어렵겠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최대한 자리를 지켜보겠어요.”
에리히는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아르사크조차도 순간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은, 임시로라고는 해도 황후의 자리에 있고, 그렇다면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모인 이들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일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었다.
‘에셴이 말한 게 바로 이런 건가.’
곰곰이, 낮에 들었던 말을 곱씹어본다. 자신이 이 자리를 지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모두에게 칭송받고 사랑받는 황후가 되기 위해서? 축하를 받기 위해서?
전부 다 아니다. 이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히가 약속을 지킨다면 자신은 두 번 다시 이 자리에 오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최대한 충실하게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그를 위해서도 옳은 일일 것이다.
“지금…….”
에리히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백작 부처가 입장한 이후 비스듬히 닫혔던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문간에 서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목록을 확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화려한 불빛과 수없이 많은 음식, 음악 소리, 그리고 시선들. 그 모든 것들을 한 몸에 받으며, 오만하기까지 한 자세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저분은, 설마…….”
누군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그 순간 드디어 마지막 방문객의 이름이 연회장을 울렸다.
“로크로몬서의 왕비, 힐데트로스 장블루 에브뢰 왕비 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