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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52화 (152/191)

152화

황실 연회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물론 대단한 영광이다. 하지만 황족의 탄신 연회나 신년 연회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귀족에게까지 초대장이 발송되니, 사실 ‘황실 연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왔다’는 정도만으로는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오히려 ‘초대장을 받지 못했을 때’다.

만약 저 빠트린 초대장이 중요한 수도 귀족 앞으로 갈 것이었다든가, 아니면 외국의 왕족 앞으로 갈 것이었다면?

기꺼이 참석할 생각이 있든, 없든, 주변의 모두가 초대를 받았는데 나만 받지 못했다는 것만큼 그들을 굴욕적인 기분에 빠지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자칫하면 심각한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진실이야 어찌 되었건 초대장을 옮긴 업무를 맡은 헤다가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 순간 헤다로서는 위든이 구세주인 셈이었다.

“가, 감사하옵니다. 전하… 제가 잠시 발이 미끄러져… 떨어트렸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황후 마마의 탄신 연회 초청장이다.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가겠다. 너의 일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헤다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로 초대장 묶음을 안은 채 멀어져갔다. 위든이 아직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단 한 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위든은 이름도 모를 시종의 태도 같은 건 별 관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끼워 넣은 한 장의 봉투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봉랍에 찍힌 문양은 다른 봉투에 찍힌 것들과 다른 데가 전혀 없지만, 사실 그것은 교묘하게 위조한 가짜 인장으로 찍은 것이다. 들키면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중죄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 기막히게 눈이 좋은 사람이 봉투를 하나하나 대조하여 매우 미세한 차이를 알아본다 해도, 누가 감히 디몰트의 공작이자 황제의 숙부인 그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까?

“생일 축하는 되도록 여러 사람에게서 받아야 더 즐거운 법이 아니겠습니까?”

위든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혼잣말을 하고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 * *

황궁의 거의 모든 인원이 총동원되어 연회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르사크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생일은 물론 본인에게 중요한 날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였다.

“네, 필요하답니다.”

에셴이 말했다. 그녀는 오늘 아르사크가 생일 연회의 전야 만찬에 입을 드레스를 함께 살펴주기 위해 황궁에 와 있었다.

아르사크는 옅은 홍매색과 붉은색, 그리고 녹색의 넝쿨 자수와 금사가 어우러진 드레스를 걸친 채 파티션 너머로 에셴을 힐끔 쳐다보았다.

“왜 필요한데?”

“황제 폐하나 황후 마마의 생일이란, 단지 태어난 것만 축하하는 날이 아니지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의 주인이 얼마나 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 걸 보여줄 핑계로 마침 적절한 날이 생일이라는 거로군.”

“그렇죠.”

에셴은 기다리고 있던 시녀에게 다른 드레스를 가져오라 명령하고는, 그사이 아르사크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르사크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주무르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말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야. 상대방이 못 덤비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시원하게 한번 맞붙고 말 것이지. 이런 방법으로 과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늘 그런 식으로만 정적을 처리해야 한다면 황제나 왕이 될 사람은 먼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되어야 할 테니까요. 대부분이 왕관을 쓰기도 전에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새로 가져온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어두운 푸른색 바탕에, 공작 깃털과 마름모꼴이 어지럽게 교차한 자수가 두드러졌다. 주름을 잡아 자연스럽게만 부풀린 치맛단이 우아하게 내려앉는 형태는 지난여름, 아르사크가 직접 모양을 그렸던 드레스를 몇 번의 변형을 거쳐 최신 유행에 맞게 고쳐진 것이다.

그때 아르사크가 로브처럼 생긴 남청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는지, 한동안 수도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비슷한 드레스를 지어 입기도 했다.

에셴은 이것이야말로 아르사크에게 잘 어울린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띠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마의 탄신 연회이고, 또 첫 번째로 치러지는 것이니 많은 손님들이 오시겠지요. 국내의 귀족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웃한 국가에서도 축하 사절단이나 혹은 왕족들이 초대되어 올 것입니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지만, 사소한 불화가 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함부로 누구 때리지 말란 말이지? 잘 알겠어.”

티리야가 보낸 선물은 아르사크의 생일 이틀 전에 황궁에 도착했다. 상자나 종이 포장을 쓰지 않고 비단으로 감싼 것이 티리야다웠다.

쿠션은 솜을 넉넉하게 두어 푹신하면서도 단단한 탄력이 있었다. 앞면을 꼼꼼하게 채운 자수는 하루 이틀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을 만큼 무늬가 복잡하고 섬세했다.

“티리야가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네요.”

로즈안나마저도 쿠션의 자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르사크도 무척 수를 잘 놓았지만, 그보다 나이가 어린 티리야가 이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게 믿기 힘든 것 같았다.

실밥이 어그러진 곳도 하나 없고, 색깔의 조화나 무늬의 배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취향이 까다로운 귀부인들마저도 서로 갖고 싶어 탐을 낼 만했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르사크 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르사크는 쿠션을 한쪽으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젖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로즈안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토르갈의 티리야 앞으로 보냈던 초대장이 쿠션과 함께 되돌아온 것이다.

어차피 아르사크는 자신의 생일을 티리야나 알린 없이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초대장을 보낸 것 자체가 단순히 의미 없는 장난일 뿐이었는데, 참석 여부를 표시하는 부분에 무언가 꼬불꼬불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로즈안나가 물었다.

“아르사크 님, 여기… 그려진 선은 뭔가요?”

“그건 선이 아니야.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야.”

로즈안나는 제국에서 사용하는 글 이외 외국어는 전혀 몰랐다. 볼수록 재미있게 생긴 글자다. 왠지 글자라기보다는 그림 같기도 했다. 호수나 강의 물결을 표현한 것처럼.

“뭐라고 적혀있는 건가요?”

아르사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가축들이 굶주렸다.’고 적혀 있어.”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왜 그런 말을 적었나요?”

“누군가 초대했을 때 거절하는 거야. 가축들을 먹여야 해서 많이 바쁘니,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거지.”

로즈안나는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아르사크와 비슷하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토르갈의 부족민들은 지금 튈브리크에 있다. 그곳에는 가축들을 살찌우도록 먹일 만한 풀밭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수많은 말이나 양을 팔아버린 일이 벌써 오래전이다. 당연히 가축을 먹여야 하는 일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티리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르사크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토르갈을 방문할 때마다 티리야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않아 결국 늘 찜찜한 기분을 안은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티리야를 오래 봐온 아르사크가 그녀의 기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티리야는 뭔가를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그게 아르사크 때문에 생긴 불안감이라면, 그다음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였다.

“로즈.”

“네, 아르사크 님.”

“네가 보기에도 내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니?”

느닷없는 질문에 로즈안나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럴 리가 있느냐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르사크 님이 달라지시다니……. 그야 처음 뵈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달라진 부분도 많으시죠. 하지만 아르사크 님 자체는 달라지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네. 옷이나 장신구, 잠자리나 음식 같은 것으로는 변하지 않는 분이시잖아요. 아르사크 님은 여전히… 제가 처음 뵈었을 때와 똑같으십니다. 자유로운 분이죠. 가끔 너무 자유로우셔서 제 수명을 줄이기도 하시고요.”

아르사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의 생각도 로즈안나와 같았다.

낯선 곳에서 낯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도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사소한 것이라고.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

조용히 읊조린 아르사크는 티리야가 보낸 쿠션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혀,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19장 극의 전주곡 (10)

아르사크의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전 무렵부터, 황궁은 각지에서 온 귀족들의 마차로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주인공인 아르사크는 미리 눈도장을 찍고자 찾아온 귀족들의 인사를 받느라 아침부터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틈이 없었다.

생일 연회는 내일이지만, 내일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할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저마다 아르사크의 얼굴을 먼저 보고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배경의 귀족도 아니고, 하다못해 제국 태생도 아닌 아르사크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나, 겉으로는 그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황후 마마,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에레벤나께서 마마의 앞날에 빛이 깃든 손을 얹으시어 길이 축복하시기를.”

“먼 길을 와주어 고맙소.”

“이것은 마마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제가 준비한 작은 정성입니다. 부디 흡족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대충 그런 식이었지만 그 정도의 짧은 대화도 스무 명을 넘어가기 시작하니 슬슬 미칠 노릇이었다. 다행히 에셴이 적당히 일어날 시기를 귀띔해 주었고, 아르사크는 겨우 북적거리는 인파로부터 도망쳐 조용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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