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니타니의 생각대로, 티리야는 다람쥐처럼 나무를 기어 올라가더니 곧 큼직한 열매가 매달린 가지를 향해 발을 뻗었다. 그런 다음 손으로는 굵은 나무줄기를 단단히 붙잡고, 발뒤꿈치에 온 힘을 실어 가지를 꾹꾹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지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아래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와!”
“잘 받아, 바구니에 맞춰서 떨어트려 주진 못하니까!”
티리야가 말했지만 그래도 한두 개는 떨어지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방법으로 가지 두세 개를 더 밟아 흔들자 니타니가 가지고 온 바구니 하나가 꽉 찼다. 더 욕심을 부렸다가는 들고 내려가지도 못할 것이다. 티리야는 올라갔을 때처럼 손쉽게 나무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티리야, 너 정말 대단하다. 무섭지도 않아?”
“떨어져도 죽지도 않을 높이인데 무섭긴 뭐가 무섭니?”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티리야는 바닥에 떨어진 개복숭아 중에서 멀쩡한 것을 주워 한 입 베어 물었다. 새큼한 맛에 순식간에 침이 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떫지는 않았다.
니타니도 상처가 덜한 것을 하나 주워서 먹더니 신맛에 온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정말로 아까 나무는 왜 깎고 있었던 거야?”
티리야는 과육이 조금 붙은 씨앗을 멀리 내던지고는 대답했다.
“그냥 깎고 있었대도 그래. 조그만 조각 같은 거나 만들어 보려고.”
“나무로? 너 그런 것도 할 줄 아니?”
“왜? 너도 배우게?”
니타니도 티리야를 따라 하듯이 뱉어낸 씨앗을 멀리 던졌다. 그러고는 조그맣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손으로 뭘 만드는 건 영 못 해. 바느질이나 겨우 배운걸.”
“자수 같은 건 안 해?”
“잘 안 해. 재미없어. 너도 전에 봤잖아.”
그러자 곧장 납득했다는 듯이 그랬지,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얼마 전, 같이 자수를 놓고 싶다며 찾아왔던 니타니는 티리야가 수를 놓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고는 완전히 기가 죽고 말았다.
자신의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때 티리야는 니타니의 세 배쯤 되는 크기의 천에 직접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때 자수 놓던 건 어쨌어? 완성했어?”
“거의 다 완성했어.”
“그 천으로 뭘 할 거야? 이불이라기엔 너무 작던데…….”
“안에 솜을 넣어서 방석을 만들까 해. 아니면 쿠션이라든가… 내가 쓸 건 아니고 선물할 거라서 뭘 만들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선물? 누구에게?”
티리야가 살짝 웃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니타니는 그 웃음이 조금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아르사크의 생일이거든.”
니타니는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랬어? 황후 마마의? 와! 그럼 연회가 크게 열리겠네! 좋겠다, 너도 가는 거지? 부러워라.”
“부러워?”
“부럽지, 그럼. 큰 연회 같은 건,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옛날에… 딱 한 번, 영주님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도 모두 초대받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때도 난 못 갔어. 열이 났거든.”
그렇게 말하는 니타니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 티리야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니타니의 고향은 얼마 전, 산 위의 물을 가두고 있던 댐이 터지는 불행한 사고로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사고로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에는 니타니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지만,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과거를 말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난 안 가려고.”
티리야가 짧게 말했다. 우울하고 복잡한 기분에 잠겼던 니타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가? 가야지……. 그분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잖아.”
니타니가 아르사크를 언급할 때는 항상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럴 만도 했다. 홀드빅 자작에게 선동당해 토르갈을 공격한 자들의 주축이 니타니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데다가, 그 사람들 사이에 니타니도 끼어 있었다.
하마터면 토르갈 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할 뻔한 순간, 아르사크는 마치 신처럼 나타나 그들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아르사크가 보여주었던 믿지 못할 몇 가지 일들은 튈브리크 사람들에게 ‘그때 그 사건’ 정도로 함축된 채 불렸다.
티리야는 니타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티리야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르사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티리야 본인도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아르사크는 족장이고 스승이었으며 또한 언니였다. 단 하나, 황후라는 이름만이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가지 않아도 별로 서운하지 않으실 거야.”
“티리야, 너 오늘따라 좀… 왜 그런 말을 하니? 나라면 당연히 서운할 텐데…….”
그간 아르사크에 대해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말이 나오면 누구보다 분개했던 티리야였다. 그런 모습을 직접 본 바도 있으니 니타니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르사크는 여전히 종종 튈브리크를 찾아와 토르갈을 살피러 왔고, 티리야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먼발치에서 몇 번이고 보았는데 이 반응은 대체 뭘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아르사크는…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마치 예전 그대로이신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 들거든. 황궁의… 같이 오는 사람들과 사이도 좋은 것 같고.”
“그야 당연히… 그분은 황후 마마시잖아. 그리고 같이 오는 사람이라고 해도 황제 폐하신데, 당연히 사이가 좋으시지. 부부인걸.”
니타니는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있었을 때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는 걸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이가 나쁜 부부를 본 적 없는 건 아니지만, 황제와 황후가 부부싸움 같은 걸 하는 모습은 니타니의 상상력 밖이었다.
티리야는 니타니의 말을 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르사크가 황후의 자리에서 곧 내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약속을 하고 황후가 되는 것을 승낙했으니까.
그날, 에리히와 협상하던 자리에서의 아르사크는 자신의 생각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티리야도 2년의 시간을 참기로 결심했다.
이 생활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무리 떠나고 싶어도. 아르사크가 다시금 족장이 되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아르사크를 보면 그런 생각은 차차 헛된 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티리야는 어쩌면 아르사크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졌다.
아르사크가 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만큼은 티리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부족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열렬히 사랑하고 지키지 않았던 아르사크에게 또 하나의 사랑할 것이 생긴 탓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혹시 가지 않더라도… 선물은 보내드릴 거지, 티리야?”
니타니는 티리야가 만들던 선물까지 팽개칠까 봐 도리어 걱정하는 것 같았다. 티리야는 조그맣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마지못해 수긍하는 것처럼 소극적인 동의로 보이기도 했다.
118장 극의 전주곡 (9)
황후의 생일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평소에도 겉으로만 평온할 뿐 늘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눈으로 보일 만큼 부산스러웠으니 안 보이는 곳에서는 얼마나 바쁜지 짐작할 만했다.
아르사크가 황후가 된 지는 이제 일 년째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생일을 치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르사크가 후녀가 되어 황궁으로 오기 직전에 생일을 지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처음 맞는 황후의 생일을 위해 황궁의 주방 뒤쪽으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식재료를 실은 마차가 들락거렸다.
연회장을 장식할 꽃을 때맞춰 피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원사들은 아예 꽃봉오리 앞에서 에레벤나 신에게 기도라도 올릴 판이었고, 연회가 무르익은 밤중에 쏘아 올릴 폭죽을 관리하는 병사들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아!”
산더미처럼 많은 초대장 묶음을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뛰어가던 헤다는 불룩하게 접힌 융단의 끄트머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마 끈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초대장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맙소사! 어휴…….”
헤다는 인상을 찡그리며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초대장을 주워 모았다. 다른 편지도 아니고, 황후 마마의 생일 연회를 위한 초대장이다. 잃어버려서 발송을 못 하거나 종이가 파손되면 혼나는 것은 둘째 치고 감당 못 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황궁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하며 자란 헤다는 이런 초대장이 단순히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어디로 빠지거나 하진 않았겠지?”
복도는 일직선이었지만 곳곳에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기도 하고 장식용 가구도 놓여 있어서 완전히 마음을 놓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많은 양의 초대장을 다시 한 장씩 세어볼 수도 없는 노릇, 구석진 곳까지 꼼꼼히 살핀 뒤 빠트린 것이 없음을 확인한 헤다는 다 챙겼다고 믿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여봐라.”
‘바빠 죽겠는데 대체 누가 부르는 거야.’
하지만 저렇게 부를 만한 사람 치고, 헤다가 인상을 찌푸려도 괜찮을 사람은 없다.
천천히 몸을 돌린—귀족 앞에서는 너무 허둥거리는 것도 무례한 짓이므로— 헤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저, 전하.”
“이걸 떨어트렸더구나.”
위든은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헤다가 들고 있는 초대장 사이에 봉투 하나를 끼워 넣었다. 황실 문양이 뚜렷하게 찍힌 봉랍을 본 헤다는 사색이 되었다. 설마 했는데 자신이 진짜 한 장을 빠트렸다는 것을 알게 되니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