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체첼리카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도로테아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는 날뛰는 체첼리카를 달래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실리케는 아이를 낳다 죽고 말았다, 실리케를 원망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어쩔 수는 없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에게는 아무 죄도 없으니 부디 불쌍하게 생각하거라…….
“드로스 이오나.”
에리히의 시선이 드로스에게 가 닿았다. 그는 이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황제가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에리히는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짐짓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너는 감히 황제의 질문에 거짓으로 답을 하였으며,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행실로 나의 신민을 욕보였다. …테오도르.”
“명령하십시오, 폐하.”
“드로스 이오나를 데려가 혀와 입을 잘라내고, 저자가 지은 죄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이마에 새긴 다음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 영지로 돌려보내라. 재산과 저택, 토지, 영주로서의 권한은 모조리 몰수하여 추방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자비로운 처벌이었다. 모두 다 빼앗기고, 사람의 몰골조차 아닌 꼴로 돌아간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돌팔매질뿐이다.
드로스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면서 뒤늦게야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체첼리카는 그제야 미친 사람처럼 로즈안나의 발치로 기어갔다.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로즈안나의 드레스 자락을 붙들며 매달린 체첼리카의 입에서 비참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로즈안나! 로즈안나… 제발! 나,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나는 모르고 있었어!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제발 용서해 주렴. 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어! 제발, 네 손으로 나를 죽여도 좋으니까, 제발…….”
에리히도, 아르사크도, 심지어 테오도르조차도 로즈안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체첼리카를 용서하더라도 누구 하나 로즈안나를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로즈안나는 몸부림을 치며 애원하는 체첼리카를 내려다보았다.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가슴속을 꽉 채운 것처럼, 차마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입니다.”
로즈안나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첼리카의 몰골은 시간이 지나자 더욱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사람이 두려워서 잠조차 마음 편히 잘 수 없던 날들이 얼마였나.
“당신이… 내게 한 짓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돌아가신 내 어머니에 대한 것도… 당신이 정말로 몰랐다면 그것도, 나는 용서할 수 있어요.”
“로, 로즈안나…….”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 아무… 죄도 없는 유레나 황녀님과, 황후 마마까지도 모욕했습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당신이 몇 번이고 내 앞에 무릎을 꿇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끝났다. 체첼리카 이오나는 끌려 나간 드로스 이오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멍하니 로즈안나의 드레스에서 손을 떼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체첼리카 이오나의 처벌에 대해서는 황후에게 결정을 맡기지.”
모두가 아르사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체첼리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번 다시 함부로 손찌검을 할 수 없도록 양손을 전부 못 쓰게 만들어라. 그리고 드로스 이오나와 똑같이 영지로 추방해라.”
“화… 황후 마마, 황후 마마! 아악! 로즈안나! 안 돼! 제발, 제발 용서를……! 차라리, 차라리 죽여주세요! 악! 이것 놔……!”
병사들에 의해 일으켜진 체첼리카가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는다. 아르사크는 무심한 표정으로 체첼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로즈안나가 용서하지 않으면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겠다고. 너는 처벌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죽을 자유도 없을 것이다. 네 남편인 드로스 이오나도.”
117장 극의 전주곡 (8)
수도의 운트겔 저택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살벌한 피바람이 불고 있을 때, 티리야는 마침 한가로운 오전 시간에 나무나 깎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튈브리크에 거주하는 토르갈 부족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 사건’이 있기 전이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좌판을 벌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물건을 가지고 나갔고, 마을 내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역시 해가 뜨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막과 초원에서 모든 생애를 보내는 유목민들은 그야말로 평생을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자신의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부지런히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유목민들이 제국의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부지런하고 성실한 천성을 타고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렇게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척박한 환경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성처럼 되어버린 것이라 해야 옳았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처럼 할 일이 없이 손이 비게 되자 티리야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났다.
곡식으로 만든 둥글고 딱딱한 빵을 양젖에 축여 간단한 식사를 하고, 이부자리를 대강 정리하고 나니 더는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가롭다고 해서 자리에 누워 뒹굴고나 있는 것은 티리야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티리야는 마을 한 켠에 쌓인 나무토막들 중에서 그럴싸한 것을 골라내어 주머니칼로 조금씩 깎아내기 시작했다. 껍질은 딱딱하고 억셌지만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나자 그때부터는 손놀림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티리야, 뭐 해?”
마을 주변을 따라 빙 둘러놓은 울타리 너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를 깎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던 티리야는 울타리 너머에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니타니를 발견했다. 그리고 주머니칼을 쥔 손을 인사하듯 한번 흔들며 말했다.
“나무 깎아.”
“나무는 깎아서 뭐 하려고?”
“뭐라도 만들어지겠지. 넌 그런 걸 들고 어디 가?”
니타니는 이거? 하듯이 바구니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재미난 장난이라도 꾸미는 것처럼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고 말했다.
“비밀 하나 알려줄게, 나랑 같이 안 갈래?”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치고 니타니는 등산에 영 재능이 없었다.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길을 올라가면서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하고, 중간에 두 번쯤 쉬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더 가야 한다니, 도대체 이런 체력으로 어디까지 올라갔던 건가 싶어 티리야는 물끄러미 산허리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뭔데 그래?”
“가서 보면 알아.”
니타니는 콧잔등에 송송 돋아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다시 열심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짧은 활을 멘 티리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말없이 니타니를 따라갔다.
한때 서로를 죽일 뻔하기도 했던 둘은 다들 ‘그 사건’이라고 부르는 날 이후 어영부영 친구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타니 쪽에서 먼저 울며 사과를 해온 것을 티리야가 받아주었으니 어영부영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든 감이 있었지만, 사과를 받았을 당시 티리야는 니타니와 친하게 지낼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는 대충 그 정도로 얼버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니타니는 생각이 단순하기는 해도 본래 악랄하고 표독스런 성질머리는 아니었고, 티리야는 퉁명스럽고 매서웠지만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을 걷어찰 만큼 매몰차지는 못했다.
“저것 좀 봐!”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산을 타던 니타니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올라왔던 길보다 경사가 좀 더 완만한 곳에 개복숭아 나무 두어 그루가 보였다.
가지가 뻗은 모양이나 자란 위치를 보아 누가 일부러 심어다 놓은 것은 절대로 아니고, 어쩌다 저런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용케 살아남은 모양이다. 아마도 최근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 가지마다 익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저거 별로 맛도 없는데.”
티리야가 말했다. 못 먹는 것은 아니지만, 산책 삼아 나온 것이라면 모를까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바구니까지 끼고 나올 만큼 맛이 좋은 과일은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리는 흰 복숭아 같은 것이야 한 입 베어 물면 환상적일 만큼 감미로운 맛이라지만, 개복숭아는 운이 좋으면 새콤달콤한 게 걸리지만 대체로 떫었다.
“맛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비싸게 팔린대. 치료사들이 약으로 쓴다나.”
“저걸 약으로 쓴다고?”
“응.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분명 그렇다고 했어. 그러니까 따다가 약재상에 가지고 가면 돈이 좀 될까 해서. 너도 따서 가져가자. 꽤 많잖아.”
티리야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큰돈이 되지 않더라도 어쨌든 사주는 사람만 있다면야 안 팔 이유가 없다. 정 산다는 사람이 없으면 마을에 가지고 가서 대충 나눠 먹어도 될 것이다.
바구니를 내려놓은 니타니는 의욕적인 태도로 소매를 걷으며 나무 둥치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무가 꺾어진 오르막을 비스듬히 자라난 탓에, 열매가 매달린 곳까지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았다.
“아… 손이 안 닿아. 어쩌지? 가지를 좀 흔들어볼까?”
“그러기엔 너무 굵지 않아?”
“근데 막대기 같은 걸로 때렸다가는 상처가 날 텐데.”
어차피 약으로 쓴다면 자르거나 말릴 텐데 열매에 상처가 나는 것쯤이야 뭐가 대수랴 싶었지만, 티리야는 조그맣게 한숨을 쉰 뒤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벗은 뒤 니타니에게로 다가갔다.
“저리 내려가서 바구니나 들고 있어 봐.”
“어? 나무를 타게?”
“안 그러고 무슨 수로 저걸 따겠어?”
니타니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내려가서 티리야가 시키는 대로 바구니를 들었다. 자기 또래의 평범한 소녀였다면 위험하다고 말렸겠지만, 티리야만큼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